길 잃은 소녀를 찾고 나서야,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던 소금 수송대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디베어를 임시 휴식 지점에 눕히고 다른 이상은 없는지 샅샅이 살핀 뒤, 지휘관은 마침내 테디베어의 입을 통해 그간의 이상 증세에 대한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거지. 나한테 써서 이 정도로 끝난 거니까. 아직은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있어.
내가 만든 거니까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서 그랬지...
마음 한구석에 스며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말을 삼켰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의 테디베어는 굳이 진짜 이유를 들추고 싶지 않았다.
원래는 그냥 복제 프로그램으로 기억 데이터의 특정 부분만 반복해서 검색하게 설계한 거였어. 근데 막상 적용해 보니, 개체 차이 때문인지 예상 밖의 부작용이 생긴 모양이야.
아니, 그 녀석은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그전까진 그 녀석이 아니었어. 그냥 멍청한 인형 하나가 다였어.
인간은 기가 막힌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위험하지 않아.
새로 나타난 시뮬레이션 의식은 그냥 허세만 가득한 놈일 뿐이거든, 구조체가 질식사라도 할 것 같아?
당연히 나 자신이지. 내가 못 할 것 같아?
내가 이성만 잃지 않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구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 인간의 당황한 눈빛을 보는 순간, 뒤늦게 밀려온 불안감이 소녀의 이성이란 둑을 거세게 두드렸다.
(방금 내 모습... 과연 이성적이었을까?)
(앞으로도 계속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테디베어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깊은 보랏빛 소용돌이가 다시 그녀의 눈동자에서 일렁였다.
인간은 재빨리 테디베어의 손목을 붙잡아,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그녀를 끌어냈다.
미안... 아직 영향이 좀 남아있는 것 같아.
테디베어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난처함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표정에, 지휘관의 마음 역시 미세하게 흔들렸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낮추며 천천히 말했다.
여정 내내 테디베어가 평소와는 미묘하게 들떠 있었다는 걸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자신은 이미 그녀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진작에 솔직하게 말해야 했는데.
하지만... 그땐 이미 영향을 받고 있었나 봐. 그 프로그램이 계속 내 사고를 방해했던 것 같아...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어. 아니, 나 자신도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이 많았어.
"뇌"가 제멋대로 논다니, 이거 참 희한한 경험이네.
표정이 왜 그래? 걱정할 거 없어. 이 정도는 나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어.
뭐? 지금 나 못 믿겠다는 거야?
소녀는 애써 웃어 보였다.
(기대라고?)
테디베어의 호흡이 순간 흐트러졌다. 소녀는 눈을 감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라는 간단한 두 글자가 질긴 실타래를 끌어냈다. 한쪽 끝은 사랑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매달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 끝은 영혼을 옥죄는 올가미였다.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언어 모듈에 영향을 줄 리 없는 감정의 파편이었지만, 테디베어는 한동안 침묵하며 더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 애썼다.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
테디베어는 끝내, 더 가볍고 재치 있는 대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
산처럼 쌓였던 피로가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알았어. 음악 축제 끝나면 제대로 기체 검사를 받을게.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밤은 깊어지고, 먹구름이 별하늘을 가렸다. 잠 못 이루던 인간은 테디베어와의 의식 연결이 주기적으로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것을 감지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테디베어의 의식의 바다 상태가 염려되었기에, 결국 그녀의 의식 공간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인간이 의식 공간으로 잠입한 순간, 크고 작은 두 그림자가 소리 없이 등 뒤에 나타났다.
가.
뭐?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리야? 그럼 넌 왜 안...
다음 순간, 크리스의 손바닥이 디어베어의 목덜미에 슬쩍 얹히더니, 위협적으로 주물럭거렸다.
네가 좀 더 순해 보이잖아.
그게 칭찬이야, 욕이야...
내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전에, 네가 가서 바보인 척 경계심을 흐트러뜨려. 그래야 내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낄 수 있잖아.
어차피 우린 본체를 "죽이려는" 문제 인물로 찍혀 있으니까, 이게 너한테도 이득일 거야.
뭐? 그건 너잖아! 날 끌어들이지 마! 난 한 번도 그런 적...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는 인정사정없이 디어베어의 목덜미를 잡아채 인간 앞으로 내동댕이쳤다.
말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눈치는 빠르네.
거봐, 네 얼굴이 더 객관적이라고 했지...
그럼 나는?
맞아, 난 곰 인형이야!
바보인 척하랬지, 진짜 바보가 되라는 소린 아니었어.
바보 아니거든!
전혀 달라 보이지만 뿌리는 같은 두 인격이, 옆에 있는 인간을 아예 무시한 채 아이처럼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둘 수 있다면, 나중에 테디베어의 표정이 볼만할 텐데...
테디베어의 의식 공간이라 그런지, 인간의 눈앞에도 어린 시절 테디베어가 어려운 문제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스스로와 토론하며 결정을 내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라?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른 방법이 있었겠어? 주변엔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멍청이들이랑, 내 진심을 약점 삼아 공격하려는 교활한 놈들밖에 없었으니까.
크리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사방이 적인 상황에선, 자기 자신과 상의하는 게 가장 안전한 법이지.
<i>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고, 기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i>
<i>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만 했고, 점차 어떤 위기든 뒤집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i>
<i>혼자라는 이유로 얕보이지 않기 위해, 모든 걸 스스로 해내야 했고,</i>
<i>언제나 당당하게 행동하며 단 한 순간도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됐다.</i>
<i>억눌러야 했던 감정과, 허락되지 않았던 나약함이 너무나도 많았기에,</i>
<i>가장 순수한 소망조차 더는 솔직하게 내비칠 수 없게 되었다.</i>
<i>어른이 된 게 아니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어른인 척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i>
인간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어.
우린 어차피 프로그램의 산물이고,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만 해. 나는 해답을 찾는 역할이야. 그러니 어떤 대가를 치르든, 눈앞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그 "바이러스 프로그램" 때문에, 테디베어의 이성의 경계가 잠시 허물어지고 봉인해 둔 일부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어.
감시 카메라에 단서가 그렇게나 명확했는데도, 카레니나 그 멍청이는 아무 조치도 안 했고, 저 쓸모없는 인형 녀석도 전혀 제구실을 못 했지.
이봐, 난 지금 여기 있거든? 다 들린다고.
어머, 멍청하지만 귀는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네.
결론적으로, 저 둘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야. 이 기체의 이성을 붙들고 있는 인격은 나라고.
첫째, 우리 둘 다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 둘째... 음... 둘째는...
지금 멍청한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멍청한 거야?
안 멍청하다고!
그 상황에선, 그 애를 강제 종료시키는 게 우리의 목표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이성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절대로 위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것.
그 애는 이미 "광기"의 문턱에 서 있어. 더는 이 기체를 대표해서 어떤 결정도 내릴 자격이 없단 말이지.
아니야?
살짝 의아해하는 크리스의 얼굴을 보며, 인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넌 내가 널 해칠 거란 생각은 안 드나 보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널 제거하는 것도 꽤 괜찮은 선택지인데 말이야.
제법이네.
시도는 해봤지.
그게 시도야? 살인이지!
시끄러워.
크리스가 무심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디어베어의 모습이 마치 지워진 분필 자국처럼 소리 없이 의식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계속 말해봐.
하지만 역시... 감정 문제는 내면에서 해결하기 어렵더군. 적어도 내겐 벅차.
난 행복을 추구할 권리 따위는 이미 포기했어. 나 자신과 싸워봤자 의미가 없거든. 너한테서 답을 얻어야 해.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대답해줄 수 있어? [player name]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부드럽게 흩어졌다.
자욱한 안개 같은 파도가 인간의 대답을 집어삼켰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목소리보다 빠른 공격이 크리스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그녀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피했다.
생각보다 늦게 깨어났네.
테디베어는 야간 자가 복구 도중 깨어나 의식 공간의 이상을 감지했고, 망설임 없이 크리스를 공격했다.
네가 감히...
구조체 소녀는 인간이 무사한지 걱정스레 재빨리 상태를 확인했다.
네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네. 겁도 없구나? 내가 널 그냥 두고 볼 거라고 생각했어?
난 그저 궁금한 게 있어서 답을 들으려던 것뿐인데.
그래? 그럼 내가 너 대신 그 일을 "똑똑히" 기억하게 해 주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식 공간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데이터 스트림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배척력이 인간의 의식을 혼돈의 중심부에서 튕겨냈다.
인간의 의식이 의식 공간에서 사라졌다.
뭘 하려는 거지?
내가 너무 우유부단했어. 네가 이렇게까지 도발하니, 가장 확실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지금 여기서, 이 불안정한 위험 요소를 직접 삭제하고 포맷해 버리겠어.
여기서? 의식의 바다가 손상되는 건 두렵지 않고?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 지금 내 꼴을 좀 보라고.
크리스의 형체 가장자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마치 녹아내리는 얼음 결정처럼, 조금씩 실재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네가 나설 필요 없어. 난 이미 답을 얻었으니... 규칙에 따라, 곧 사라지게 될 거야. 두 번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그 답이 뭔지 너한테 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너...
테디베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크리스의 모습은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처럼, 데이터 스트림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와.
짧은 정적 끝에, 테디베어는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너까지 내 속을 썩일 셈이야?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디어베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쑥 내밀었다.
우린 그저 답을 찾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쳐놓고, 뭐 대단한 결론이라도 얻으셨나?
디어베어는 잠시 침묵하더니, 인간이 사라진 자리를 재빨리 힐끗 쳐다봤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었던 것처럼, 지휘관에게 묻고, 기대 봐.
테디베어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디어베어의 모습은 서서히 흐려지더니, 아주 눈치 빠르게 분노한 소녀의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의식이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처럼, 테디베어의 감각이 다시 현실 세계로 채워졌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본질적으로 그 녀석들은 내 사고 과정을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에 불과해. 내 안의 여러 생각들이 형상화된 것뿐이지, 정말로 또 다른 인격으로 분열한 게 아니야.
이 프로그램 실행이 끝나면, 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올 거고, 아무런 후유증도 남지 않을 거야.
인간의 안색은 한결 나아졌지만, 테디베어는 어딘가 망설이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걔가... 너한테 뭘 물어봤어? 그러니까... 또 다른 나 말이야.
됐어. 듣고 싶지 않아.
네 말이 맞아. 그 녀석들은 확실히 더 위험해졌어... 어쩌면 우린 정말 이 여행을 끝내야 할지도 몰라.
마음이 바닷속으로 던져진 무거운 돌처럼, 느리지만 멈출 수 없이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테디베어의 단말기에서 갑작스러운 알림음이 울렸다.
9호 태풍의 경로가 변경되어, 내일 컨스텔레이션 연안 지역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다수의 초청 게스트가 예정대로 도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합적인 안전 평가 결과, 이번 음악 축제는 부득이하게 취소되었음을 안내해 드립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또 하나의 육중한 추가 허공에서 떨어져,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천칭 위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진심으로 가고 싶었든 아니었든, 그 순간, 여정의 목적지는 아침 이슬보다도 허무하게 새벽녘에 증발해 버렸다.
알겠어, 어쩔 수 없지... 나도 알아.
다음번에 기회가 있겠지.
마침 잘됐네. 지금은 이런 걸 할 상황이 아니니까.
테디베어는 실망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목소리를 과장해 쾌활한 척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인간은, 말없이 테디베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름은 별빛을 가리고, 밤바람은 차가웠다. 그림 같던 낮의 풍경도 짙은 어둠에 잠기자 스산함만이 감돌았다. 이곳은 결코 완벽한 무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은 테디베어가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여정을 끝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제안은 부드러운 지푸라기처럼, 깊은 바다로 가라앉으려던 그 마음을 붙잡았다.
그 노래?
네가 그렇게 기대한다면, 안 될 것도 없지.
전에 수정하면서, 반주를 수송차 단말기에 저장해 뒀을걸.
그럴 필요 없어. 풀어봤자 더 좋아질 것도 없는데.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등 뒤에서 인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테디베어의 입꼬리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테디베어는 눈을 감고, 의식의 바닷속에서 음악 축제에서 부르려고 했던 그 신곡을 다시 떠올려 보려 했다.
왜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없었다.
테디베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눌러뒀던 공포가 처음으로 그렇게 선명하게 그녀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없는 거야?
의식의 바다에는 정처 없이 떠도는 멜로디의 파편들뿐이었다. 마치 폭풍우에 산산조각 난 거미줄처럼, 도저히 하나의 온전한 선율로 엮어낼 수가 없었다.
"공포"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손이 테디베어의 사고를 강하게 옥죄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단말기를 열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파일 목록을 하나씩 훑어 내렸다.
텅 비어버린 그녀의 의식의 바다처럼, 단말기에는 몇 개의 샘플 파일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새로운 오디오 파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성된 곡은커녕 그 흔적조차 없었다.
이 여정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야 했던 노래, 음악 축제에서 부르려던 그 곡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디베어의 기억 속에도, 손에 쥔 단말기 안에도,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럼 설마...
(전부... 허상이었어?)
그럴 리가 없어! 오는 길에 분명 파일도 수정했고, 흥얼거리기까지 했는데...
초조하게 기억 데이터를 뒤지며, 지난 며칠간의 기억을 몇 번이고 되감아 보았다.
없어...
파일을 수정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빈 파일에 샘플만 채워 넣은 거였다. 흥얼거렸다는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깨지고 뒤엉킨 소리 조각들뿐이었다.
만약, 이 노래 자체가 거짓이라면... 난 대체 왜 음악 축제에 가려고 한 거지? 이 여행을 위해 차는 또 왜 준비했던 거고?
더 이전의 기억도 점차 선명해졌다.
어머? 음악 축제 초대장이네요. 안 가세요?
그 순간 눈앞에 그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지만, 그 형체가 뚜렷해지기도 전에 이성의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시간이 없어. 그리고... 내가 가서 뭐 하겠어? 거절 목록에 넣어 둬.
의식의 바다에서 찰나의 영감으로 떠올랐던 이 노래는 존재하지 않았고, 테디베어는 모처럼의 휴가를 포기하고 관심도 없는 음악 축제에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이 초대장은, 도착한 그 순간 이미 거절당했던 것이다.
오픈카? 여행이라도 가게? 내가 아주 끝내주는 놈으로 하나 찾아주지. 언제쯤 쓸 거야?
몰라. 쓰게 될 수도 있고, 영원히 안 쓰게 될 수도 있고.
물론, 한가할 때면 막연히 특별한 장거리 여행을 꿈꿔본 적도 있었다. 타고 갈 운송 장비의 스타일까지 세세하게 상상했지만, 옆자리에 누가 앉을지는 그려보지 않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사명과 책임감은 언제나 한발 앞서 테디베어의 들끓는 의식의 바다를 억누르며, 감정을 함부로 낭비할 자유 따윈 없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그냥...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망상일 뿐이지.
어차피 상상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었기에, 실행에 옮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점차 선명해지는 기억의 조각들은, 테디베어에게 단 하나의 사실만을 증명하고 있었다.
애초에 시작할 생각조차 없었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신곡은... 존재한 적조차 없었다.
그 부드러운 지푸라기는 흩날리는 거미줄이 되어, 부서진 거미집조차 엮어내지 못했고, 추락하는 영혼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이 노래의 존재가 거짓이라면... "나"는?
끊어진 거미줄이 영혼을 더 어두운 곳으로 끌어당겼다.
숨이 막히던 그 순간, 크리스의 말이 구조체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이 몸을 조종하는 너는... 약해 빠지고, 사랑이나 갈구하는, 멍청한 녀석이라고.
이 몸을 조종한다고?
그래서... 결정권을 쥐고 있던 "나"는, 사실 "사랑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다"는 갈망이 만들어 낸 가상의 인격이었던 건가?
그리고 디어베어가 말했던, 계속해서 이 여행을 방해하고 막으려 했던 존재가... 진짜 "나"였던 거야?
...
테디베어는 가볍게 웃었다.
넌 계속해서 거부당하고 싶었나 보네. 무너져 내리는 기분은... 분명 괴로웠겠지.
그래서... 모든 고통의 근원은, 바로 "나"라는 이 인격의 존재 그 자체였던 거야.
이 약하고, 발버둥 치는 "나"만 사라진다면, 테디베어라는 온전한 존재는... 어쩌면 "사랑받고 싶다"는 이 어리석은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만... 사라지면 되는 거야.
일종의 자멸과도 같은 평온이 테디베어를 감쌌다. 그녀는 추락하지 않았지만, 무너져 내리는 심연이 그녀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초점을 잃은 두 눈이 불길한 보랏빛 소용돌이로 변했고, 소녀의 기체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인간의 팔에 쓰러지듯 안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