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Affection / 테디베어·해영·그중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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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베어·해영·그중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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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차가 83호 보육 구역으로 들어설 무렵, 세상은 가장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 아래 나른한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조교석에 앉은 테디베어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덜컹거리는 차의 흔들림에 스르르 잠들어 있었다.

기괴하게 뒤틀린 바이올린 선율이 무례하게 소녀의 단잠을 헤집고 들어왔다.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짜증이 어린 눈빛을 드러냈다.

아, 시끄러워...

엉성한 연주가 중앙 광장에서 흘러나왔다. 낡은 바이올린은 더 많은 풍파를 견뎌온 듯한 노인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현 위를 춤추듯 오갔지만, 시선은 오직 함께 춤추는 여인에게만 머물렀다. 그녀의 몸짓 역시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들어보니 조율 문제 같은데...)

테디베어는 턱을 괸 채 잠시 조용히 감상했다. 그러는 사이 수송차가 서서히 멈춰 서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 보육 구역은 물자 중계 센터와 가깝고 수공업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덕분에, 기반 시설과 생활 수준이 괜찮은 편이었다.

다 왔어?

구조체의 수면은 하루 종일 운전한 사람이 신경 쓸 일이 아니거든~

그리고, 너 혼자 보급품 나눠주게 놔둘 수 없지. 만약 쓰러지기라도 해서 내 탓 하면 어떡해?

상대방을 이렇게 피곤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지만, 현재 자신의 의식 상태를 고려했을 때, 방향키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테디베어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후, 자세를 살짝 고쳐 앉으며 몸을 인간 쪽으로 살짝 기울이더니,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나온다면...

흥, 잘 됐어. 이제부터는 인정사정없이 부려 먹을 거니까,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성실하게 일해.

보육 구역이 넓지 않아서, 전체 구역에 안내 방송이 울리자마자 상주 인원과 주민들이 안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보급품을 받으러 모였다.

인간은 마지막 수제 사탕 봉지를 테디베어의 손에 쥐여주었다.

딱 보니까 누가 먹고 싶어서 나한테 슬쩍 "떠넘기는 거"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테디베어는 얌전히 사탕 두 알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턱을 괸 채 인간의 모습이 방호문 뒤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테디베어는 줄을 선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보육 구역은 보급품이 넉넉해서 줄이 느리지만 질서 있게 줄어들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나지막한 대화 소리마저 유쾌하게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이 절제된 평온 속에서 차분히 이어졌다.

저... 저기...

노인이 책상 앞으로 다가와 조용히 제 차례를 기다렸다. 테디베어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명단을 보며 배급량을 빠르게 확인했다.

제랄드, 일반 보급품 2인분. 자.

한참이 지나도 제랄드는 보급품을 가져가지 않았다.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이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그 노인이었다.

노인의 옷은 심하게 닳았지만 아주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었고, 깊은 주름이 새겨진 얼굴은 더없이 평온했다. 머리카락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었다.

노인도 소녀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주저하며 좌주위를 살피더니 천천히 한 걸음 다가왔다.

제 차례인가요?

제랄드, 물건 가져가도 돼.

제랄드는 무의식적으로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소녀의 입 모양을 읽으려 애썼다.

미안합니다. 제가 귀가 어두워서... 혹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오랫동안 소리를 듣지 못해 목소리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게 된 탓인지, 노인의 목소리는 조금 컸다. 그는 곧바로 무의식중에 주위를 살폈다.

(어쩐지 바이올린 소리가 그 모양이더라니...)

테디베어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마음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손을 뻗어 책상 위의 보급품을 앞으로 밀어주었다.

제랄드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지만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보급품 선반을 훑어보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노인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사탕 봉지에 닿았고, 얼굴에는 기쁨과 망설임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거? 미안하지만, 이건 애들한테만 주는 거야.

제랄드는 힘겹게 상대방의 입 모양을 읽었다.

아이? 아, 아뇨, 아내입니다. 제 아내에게 줄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싶어서요. 이걸로 사탕 한 알만 바꿀 수 있을까요?

노인은 보급품 중에서 식량 일부를 덜어내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이걸로 사탕 한 알을 바꾸고 싶습니다.

사탕은 애들 몫인데...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말했다.

네, 아내에게 줄 생일 선물입니다. 괜찮을까요?

귀가 잘 안 들리는 상대와 이렇게 "복잡한" 대화를 계속하긴 힘들어 보였다. 테디베어는 광장에서 봤던 춤을 떠올렸다. 그리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사탕 두 개를 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부인 성함이 어떻게 돼?

이번에는 테디베어가 목소리를 좀 더 키우고, 말도 천천히 했다.

디어, 아내 이름은 디어입니다.

소녀는 책상 위의 사탕 두 알 중 하나를 집어 제랄드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건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사탕이었다.

선물로 줄게.

인간이 창고에서 돌아왔을 때, 첫 번째 보급품 배분은 거의 끝나 있었다. 이제 둘이서 다음 보급품을 정리하고 수령 현황만 확인하면, 교대 근무자에게 무리 없이 업무를 인계할 수 있었다.

뭐라고? 제랄드와 도리스라고?

그 사람 아내 이름이 디어가 아니었어?

문제가 없을지도... 내가 지금 바보 같은 언어유희에 낚인 건지, 아니면 그냥 잔머리 굴리는 나쁜 놈한테 당한 건지 헷갈려서 말이야.

다행히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곧, 광장에서 춤을 추던 그 여인이 제랄드를 데리고 테디베어 앞으로 돌아왔다.

여인은 명단을 확인하던 인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죄송해요. 남편의 인공와우가 고장 난 지 오래돼서 폐를 끼쳤네요.

난 애들 몫은 안 건드렸어. 내 몫을 준 거야.

근데, 왜 아내 이름을 지어낸 거지?

테디베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여인 뒤에 서 있는 제랄드를 쳐다보았다. 대화를 듣지 못하는 노인은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지어낸 게 아니에요. 제 본명은 도리스지만, 남편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제 이름은 "디어"였거든요.

남편이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나 봐요. 하지만 저희는 사탕이 필요 없으니, 괜찮으시다면...

죄송합니다,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그런데... 이 물자로 납땜용 송진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전자 부품 납땜에 쓰는 재료야.

그걸로 바이올린 송진을 대신하려고? 그 바이올린은 음정도 안 맞고, 남편분의 지금 청력으로는 조율도 불가능해.

까놓고 말해서, 송진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적어도 보급품이랑 바꾸기엔...

낭비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텐데.

낭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아직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모든 걸 포기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저희가 송진과 바꾸려던 보급품은 더 어려운 곳에 가져가 주세요. 비록 미미하겠지만, 이 철없는 낭만에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결말을 남기고 싶어요.

억지로 강요할 생각 없어. 당신들 일이니까 직접 결정해. 근데 대부분 납땜용 송진엔 산성 첨가물이 들어 있어서, 바이올린 현이랑 활 털 다 망가질 거야.

이 바이올린, 당신들한테 의미가 깊은 물건이잖아? 그렇게 망가뜨려도 괜찮겠어?

도리스는 놀란 기색 없이, 그저 온화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게 마지막 춤이에요.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오늘 밤이 지나면, 저희는 이 바이올린과 작별하고 추억 속에 소중히 간직할 거예요.

...

현실적인 의미보다 상징성이 더 큰 집착 때문에 더 유용한 걸 포기하다니. 너무 감정적인 거 아닌가? 남편분보다는 더 이성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낭만이란 게 어리석고 우습지 않으면, 그게 어디 낭만이겠어요?

...

테디베어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떨궜다.

확실히, 당신은 악기 자체보다는 의식에 관한 연구를 훨씬 더 깊이 한 것 같네.

납땜용 송진은 원래부터 음향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물건이야. 당신이 마지막 수단으로 그걸 사용한다 해도, 음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진 않을 거야.

그냥 이성적으로 봤을 때, 이 보급품은 남겨 두는 게 맞아. 내가 당신 남편 인공와우 한번 점검해 보고, 고칠 수 있는지 볼게.

그 바이올린이 다시 제대로 된 소리를 내게 만드는 편이, 납땜용 송진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일 거야.

도리스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곁에 있는 남편을 한번 돌아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제안에 동의했다.

보육 구역의 여건은 열악했다. 테디베어는 책상 위의 부품들을 꼼꼼히 살피더니,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내장 프로그램 조정은 끝났는데, 하드웨어에 꼭 필요한 부품 몇 개가 없어서 이 인공와우의 기능을 복구할 수 없어.

이건 다 안 되겠고, 창고에 한번 가볼게.

창고라고 해봤자, 그냥 선반으로 꽉 찬 방 하나가 다였다. 비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선반은 천장에 닿을 듯이 높게 세워져 있었다.

...

소녀는 까치발을 들고 높은 곳에 놓인 부품 상자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선반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등 뒤에서 흔들리는 선반을 받쳐 주며, 손을 뻗어 테디베어가 까치발을 해도 닿기 힘든 높은 곳의 상자를 쉽게 꺼냈다.

어느 순간 팔꿈치가 무심코 스치고,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

노르만 가문의 정원에는 사계절 내내 푸르른 거목이 한 그루 서 있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서늘한 그 나무 그늘에서 등을 기대면, 잠시나마 이 세상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듯한 착각과 함께 평온이 찾아오곤 했다.

타다닥...

들어가!

막 고개를 내밀려던 디어베어는 주인격에게 가차 없이 억눌리고 말았다.

응, 맞아. 고마워.

소녀는 인간의 손에서 부품을 건네받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네가 비켜줘야 내가 나가지.

인간이 길을 비켜주자, 그 여름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테디베어는 다시 인공와우 수리에 집중하며, 손에 든 부품을 유심히 살폈다.

한참 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들론 안 돼... 하긴, 이 정도 규모의 보육 구역에서 맞는 부품을 찾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내장 시스템의 프로그램 설정은 정교하고 깔끔하지만, 하드웨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어.

응, 못 고쳐.

인간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이란, 영화처럼 모든 일이 마음 먹은 대로 흘러가 주지는 않는다.

테디베어는 인간을 따라 좁은 창고를 나왔다. 인간이 제랄드와 도리스 곁으로 다가가, 자신을 대신해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빛과 바람이 부드러워졌다.

(저런 물러터진 성격으론 안 되겠네... 역시 내가 직접 나서야겠어.)

마음이 통한 듯, 막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상대방이 제자리에서 망설이던 소녀를 향해 손짓했다.

그들 곁으로 다가갔을 때, 제랄드는 이미 인공와우를 다시 귀에 착용한 상태였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 같은 세상에서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정말 행운이죠. 저는 그저 이 행운을 잘 지켜서, 남은 날들 동안 서로 곁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 이상의 것들은 모두 사치예요...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라는 나이는 지났는걸요.

음악이 있든 없든, 생일을 보내는 건 마찬가지예요. 둘이 함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죠. 오히려 괜한 집착을 내려놓게 해줘서 고마워요.

제랄드는 대화를 듣지 못한 채,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띠며 도리스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우리가 음악을 준비할게. 우리 수송차에 방송 시스템이 있으니, 단말기에서 음악 몇 곡을 넣을 수 있어.

적어도... 춤 한 곡은 더 출 수 있게 해줄게.

그 말에,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보급품 배분을 마친 후, 남은 시간 동안 둘은 도리스의 생일 파티 장소를 꾸미는 데 힘썼다.

인간은 광장에 쌓인 잡동사니를 치우고, 체리 맛 전해액 한 캔을 테디베어의 손에 쥐여주었다.

너는? 너는 안...

테디베어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순간, 인간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

넌 안 쉬어? 아... 정말!

코를 꼬집힌 소녀는 코맹맹이 소리로 인간의 짓궂은 장난을 탓하며, 화가 난 듯 장난치는 손을 쳐냈다.

타다닥...

상대는 또 한 번 서둘러 떠나며 뒷모습만 남겼다. 테디베어는 턱을 괸 채,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 소리는 디어베어의 목소리와 겹쳤다. 테디베어는 말없이 반쯤 남은 전해액 캔을 흔들고는, 다시 나타난 인형의 귀를 세게 잡아당겼다.

좀 달콤하고, 좀 씁쓸하고... 이게 무슨 맛일까~

테디베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인형 버전의 자신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나도 반성 좀 해야겠네. 맨날 이렇게 비꼬는 거 진짜 짜증 나긴 하네.

너처럼 자기까지 깎아내리는 것도 진짜 별로야.

짜증 나면 뭐 어쩔 건데? 짜증이 나든 말든, 할 일은 계속 생기잖아.

또 누가 네 심기 건드렸어?

테디베어는 광장에서 파티를 준비하는 도리스 부부를 향해 턱짓했다.

봐, 이 세계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도, 저 사람들은 저런 뜬구름 잡는 낭만을 포기 못 하잖아.

사탕, 송진, 바이올린 소리, 춤. 이 중에 뭐가 저 사람들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데?

하나도 없는 것 같네. 그래도 저 사람들, 행복해 보이잖아? 맨날 생존만 생각하는 것도 좀 불쌍하지 않아?

테디베어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런 시대에, 현실이 엉망인데도 마음의 위안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은 결국 호르몬에 휘둘린 사람뿐이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사랑의 극적이니 비극이니 쫓아다니는 건 진짜 시간만 낭비하고, 허무할 뿐이야.

근데 이상하게... 난 자꾸만 이런 허무한 짓을 도와주고 싶어져.

그렇게 낭비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니까.

손에 든 전해액 캔이 비워지자, 디어베어는 석양이 사라지기 전에 모습을 감췄다.

또 다른 자신이 사라진 순간, 도리스가 구조체 소녀의 곁에 앉았다.

실례지만, 여기 앉아도 될까요?

음? 편하게 앉아.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미안하다니?

남편의 인공와우는 제가 설계하고 제작한 거예요. 당신에게 건네주기 전부터 여기서는 고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무용수인 줄 알았는데.

그건 그저 취미일 뿐이에요. 저는 한때... 물리학자였어요.

어쩐지 납땜용 송진으로 대체하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더라니. 혹시... 혹시 응용 물리 전공이거나 엔지니어인가?

도리스는 웃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당신을 더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갔어야지.

퍼니싱이 터진 순간, 제가 연구하던 분야는 이미 의미를 잃었어요. 물론, 저를 필요로 하는 다른 곳에 가서 도울 수도 있었죠.

하지만 제 재능이 그리 뛰어난 건 아니라서, 과학 연구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저는 그저 작은 모래알에 불과했어요.

어쩌면 이 작은 모래알로 끝없는 블랙홀을 메우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 사람의 세상엔 별 하나조차 없었죠.

제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겐, 제가 유일한 별이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그런 이해득실, 거창한 이상 같은 거 다 버리고, 그냥 낭만적인 별이 되기로 한 거예요.

진짜 낭비네.

저한테 낭비라고 하신 게 벌써 두 번째네요.

미안.

하지만, 당신은 정말... 낭비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아.

당신은 엔지니어잖아. 마땅히...

(더 중요한 곳에서 빛을 발해야 하는데...)

제가 뭘 낭비했다고 생각하세요? 제 인생이요? 근데 그 인생 사는 건 저잖아요, 안 그래요?

제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낭비가 아니죠.

당신은 이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

그럼 당신은 인생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적어도 저한테는, 너무 많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라고 생각해요.

만약 과학 연구에서도 당신이 없어서는 안 될 별이었다면, 그래도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

그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실험 데이터가 없군요. 차라리 그 별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

의미도 없고, 선택할 필요도 없어. 난... 아마 그 사람의 별이 아닐 테니까.

그렇다는 건, 당신이 별인지 아닌지 고민하게 만드는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거군요?

도리스의 시선은 정확히 멀리 있는 인간 지휘관에게 향했고, 그녀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때로는... 질문 자체가 답이 되기도 하죠.

도리스

당신은 엔지니어이니, 플랑크에 대해 잘 알겠군요.

원자론과 엔트로피의 모순은 고전 물리학의 위기이자 현대 물리학 탄생의 촉매제였죠. 그리고 그 문을 연 플랑크는, 한때 고전 물리학의 충실한 신봉자였어요.

그의 일생일대 가장 위대한 업적은, 평생 믿어온 고전 이론의 틀을 직접 깨뜨린 것이었어요. 이로 인해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그동안 지켜온 과학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죠.

그렇게 조심스럽게 애썼지만, 결국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막지 못했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의심과 저항이 싹튼 그 순간부터, 양자 이론의 문은 이미 열렸고, 그 누구도 이 거대한 힘을 막을 수 없었어요.

자신 내면의 질서가 어떤 존재 때문에 흔들린다면... 어쩌면 그 존재 자체가 답일지도 몰라요.

테디베어의 입꼬리가 힘겹게 잠깐 올라갔다. 그 미소는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씁쓸했다.

좋은 말 고마워.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얘기 하는 거야?

네?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당신이 처음 "낭비"라고 말했을 때, 제 젊은 시절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때 생각했어요. 만약 제게 딸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따르라고 말해줘야겠다고요.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나요?

아니, 당신과 얘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그렇게 말했지만, 테디베어는 더 이상 도리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제 인생에도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서, 선택해야만 했던 힘든 순간이 있었어요. 부디... 누구도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요.

생명이 위독해 보살핌이 필요한 연인과 이미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과학 연구의 이상.

젊은 시절의 도리스에게 그것은 상상보다 더 힘든 선택이었다.

나도 그러길 바라. 우리 모두 그런 선택을 겪지 않기를.

노르만 가문의 교육은 테디베어가 도리스의 말에 빈틈없이 대응하게 했지만, 동시에 마음에 높은 벽을 쌓게 했다.

테디베어는 애써 태연한 척 일어나, 도리스에게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와우 하나 제대로 못 고치면 너무 창피하잖아. 다시 한번 시도해 볼게, 도리스 부인.

같이 얘기해 줘서 고마워. 그 보답으로, 내가 방법을 좀 더 생각해 볼게. 당신의 마지막 춤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서 묵직한 충격이 다시 덮쳐왔다. 이전보다 더 심한 현기증에 테디베어의 눈은 순간 초점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소녀는 방금 전의 어지럼증을 잊은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린 테디베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송차로 향했다.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인간을 지나치려던 테디베어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멈춰 서서 대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 훑어보았다.

왜... 거기 서 있는 널 쳐다보면 안 돼?

수수께끼의 답이 바로 저기에 있다면, 누구든 보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해질녘의 어스름이 낡은 광장을 벨벳 같은 막으로 감싸안았다. 세심하게 조정된 차량의 헤드라이트는 무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마저 반짝이는 별처럼 보이게 했다. 도리스는 그런 빛과 먼지 속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음, 이걸로 하자.

테디베어가 운송 장비의 스피커를 켜자, 감미로운 첼로 선율이 밤의 장막 속으로 흘러나왔다. 울려 퍼지는 음표 속에서, 도리스는 팔을 뻗어 사랑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랑의 인사>.

황금시대 초기에 탄생한 이 클래식 명곡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달빛 아래, 헤드라이트는 사랑하는 연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더 이상 젊지 않은 부부는 서로에게 기댄 채 천천히 몸을 흔들고 회전했다. 그들의 모든 스텝에는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교감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

말없이 눈빛을 교환한 둘은 조용히 차 뒤편으로 가, 짐칸의 그늘에 숨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치익.

인간은 막 연 차가운 체리 맛 전해액 캔을 테디베어의 뺨에 살짝 갖다 댔고, 소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인간이 조용히 자신의 알루미늄 캔을 테디베어의 전해액 캔에 살짝 부딪치자,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테디베어는 두 손으로 캔을 감싸 쥔 채 음료를 홀짝였다.

소녀가 전해액을 삼킬 때마다 뺨이 살짝 부풀어 오르고, 그 부드러운 곡선이 마치 미소를 짓는 듯했다. 인간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얼추 시간이 다 됐네.

테디베어는 갑자기 차 뒤편에서 고개를 내밀어 앞쪽의 "무대"를 바라보며 인간의 "기습"을 피했다.

차량 스피커에서 잡음이 들리더니, 몇 번 버벅거리다 이내 완전히 소리를 잃었다.

테디베어는 당황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이내 섬세하고 애틋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드러운 하모닉스는 공기 속을 맴도는 듯 청아하게 번졌고, 맑은 고음은 달빛과 어우러져 실처럼 섬세한 비단결을 짜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테디베어의 행동을 따라 놀라 고개를 내밀어 보니, 어느새 제랄드가 다시 그 낡은 바이올린을 직접 연주하고 있었다.

역시, 좋은 귀는 쓸모가 있다니까. 조율을 다시 하고 나니 훨씬 듣기 좋잖아.

음흠~

소녀는 양손을 깍지 낀 채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계획에 만족스러워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 뒤에 서프라이즈 등장. 쯧... 이런 게 바로 낭만 아니겠어?

네가 말했잖아, 난 실력 있는 엔지니어라고. 당연히 이까짓 인공와우 하나쯤은 고쳐내야지. 안 그러면 너무 창피하잖아? 부품이 없으면... 다른 데서 하나 떼어오면 그만이야. 나한테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테디베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소녀는 나지막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음악에 흠뻑 빠진 듯했다.

간주로 쓰기에 딱 좋은 멜로디인데... 제랄드가 이 부분을 내 노래에 샘플링하는 걸 허락해 줄지 모르겠네.

응,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작품이야.

그날 밤, 바이올린 소리는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음악이 멈추기도 전에 인간은 낮의 피로에 지쳐 곤히 잠들었다.

테디베어는 뺨이 붉어질 때까지 전해액을 연거푸 여러 캔 마셨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인간의 얼굴 위로 가져가, 허공에 익숙한 눈매와 눈썹을 그리듯 더듬었다.

...

타다닥...

꿀꺽꿀꺽...

또다시 불쑥 나타난 디어베어의 모습에, 테디베어는 이제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다.

이거 그냥 전해액이잖아. 어떻게 전해액을 마시면서 고농도 칵테일을 마시는 느낌을 내?

칵테일이 인체에서 분해되는 화학 반응을 시뮬레이션해서 논리 연산으로 구현하는 건 나한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야.

아... 인간들은 기쁘거나 고통스러울 때 취하고 싶어 한다던데, 우린 지금 어느 쪽이야?

둘 다이기도, 아니기도 해.

어차피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거잖아. 추태를 감출 핑계라도 있어야지.

쯧, 우린 분명 일류 과학자였는데, 며칠 만에 삼류 시인이 다 됐네.

정말 무섭다니까. 호르몬, 도파민, 옥시토신.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됐다... 시인을 위하여.

현실과 가상의 알루미늄 캔이 부딪쳤다.

오늘은 욕을 한 번밖에 안 하네? 왜 그래, 무슨 생각해?

도리스 부인의 세계에선 듣기 싫은 바이올린 소리도, 불완전한 청력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 인생의 책임이나 거창한 이상도 원하면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지.

그녀의 사랑은 화려한 장식이 필요 없어. 모든 불완전함을 낭만으로 받아들이지. 그 보이지 않는 절벽도, 아무렇지 않게 한걸음에 넘어섰어. 정말 쉽게...

그럼 우린 뭐에 갇혀 있는 거야?

왜냐면... "테디베어"인 우리는 선을 넘으면 안 되니까. 멍청해서도 안 되고, 비이성적이어서도 안 되고, 감정에 휘둘려서는 더더욱 안 돼.

지금 세상은 사랑받을 수 있는 테디베어보다, 쓸모 있는 테디베어를 더 필요로 해.

그 사람 앞에서, 나는 호각을 다투는, 실력 있고 유용한 파트너가 되는 게 더 어울려.

그렇게 안 하면 안 돼?

우리 속에 갇힌 곰은 우리를 부수고 도망칠 수 있어. 하지만 노르만 가문에 걸린 곰 머리 박제는, 가장 용맹했던 순간 목이 잘려 명예와 상징으로 높이 걸려 있지.

집 안의 사람들은 수없이 바뀌고, 벽지는 해지고, 난롯불은 꺼졌어. 번영과 영광도 모두 막을 내리고, 다들 떠나갔지... 하지만 그건 여전히 벽에 못 박혀 있었어. 그걸 떠올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

무슨 생각하는데?

난 한 번도 깊게 파고들어 본 적 없어. 지금 도리스와 제랄드의 흰머리를 보는 것처럼...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 공허함이 대체 뭔지, 알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디어베어는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막막했던 얼굴에 깨달음이 번졌다. 그 순간, 테디베어도 문득 알게 되었다.

이제야 알겠어. 그 텅 빈 느낌은… 내 인생을 도둑맞아서였구나.

그 속삭임은 너무나 가벼워서, 마치 한숨 소리 같았다.

괜찮아. 난 내 "도구로서의 쓸모"도 꽤 마음에 들어. 아니, 오히려 기뻐. 광기에 잠식되거나, 맹목적으로 변하거나, 그저 사랑받기 위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이 세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말이야.

내가 노르만 그룹을 떠나고, 그 과거를 봉인했다고 해도... 노르만이 내 머릿속에 새겨 놓은 이 관념과는 아마 평생 싸워야겠지.

그 곰 인형의 눈이, 계속 거기 걸려서 날 보고 있거든. "귀여운" 것보다 "쓸모 있는" 게 더 안전하고, "사랑받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이건 내게 영원한 저주야.

네가 한 말이었나, 아니면 내가 한 말이었나. 낭비는... 일종의 용기라고.

...

난 영원히 사랑받을 순 없겠지만, 아마 영원히 "쓸모" 있을 순 있을 거야.

봐, 결국 난 노르만 가문의 방식대로 살고 있잖아. 진짜 싫다.

"쓸모 있는" 자리는, 비록 조금 부족하고, 거리가 멀긴 해도... 아주 안전하고 오래 갈 수 있거든.

이게 바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최선의 방법인 거야.

그래서 네가 차에서 그 부품을 떼어낸 거야? 이 여정이 끝나기만 하면, 우린 제때 "쓸모 있는" 자리에 멈춰 설 수 있게 되는 거야?

테디베어는 눈을 떴다. 보랏빛 샘물 같던 그 눈은 혼란으로 가득 차, 점점 심연처럼 들여다볼 수 없게 변해가고 있었다.

테디베어, 넌 우리한테 너무 못됐어.

수송차는 다시 한번 화물을 가득 싣고 다음 거점으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도리스는 둘을 보육 구역 경계까지 배웅하며, 테디베어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리를 좇는 자는 자신을 옭아매고, 의문을 푸는 자는 스스로 고통받는 법이죠.

마치 어머니의 다정한 당부처럼, 도리스는 손가락으로 테디베어의 이마를 가볍게 건드렸다.

"디어"든 "도리스"든,어떤 이름, 어떤 신분이든, 스스로 선택하고 정의할 수 있어요.

과거의 경험이 나를 정의하는 게 아니에요. 나의 선택이 바로 나인 거죠.

너무 자신을 힘들게 하지 말아요, 알았죠?

양떼구름이 푸른 하늘을 목장처럼 한가롭게 떠다녔다. 구름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한층 더 부드럽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평온한 날씨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