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본 수송차 운전기사는 문득 과거의 그 시절을 떠올렸다.
에드워드 님은 그 기념관 안에서 한참을 머무르셨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그 며칠간 얼굴에서 시름이 떠나질 않으셨지.
테디베어가 손가락을 움츠러들고, 미간을 찌푸리며 등을 돌렸지만,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 물리학자가 뭘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기념관에서 나온 뒤로 에드워드 님은 더 이상 낙담하지 않으셨어. 그리고 한마디 남기셨지...
이 위대한 과학자는 천성이 온화하여 절대 무모한 모험을 하지 않았지. 그는 자신이 물리학에서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며 한 그루의 큰 나무처럼 양분을 흡수해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을 키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시대를 가르는 이정표를 세웠고, 후대들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지.
나는 신의 축복을 받은 천재도 아니고, 대단한 야망이나 이상을 가진 자도 아니야. 다른 이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저 더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더 잘하려고 노력할 뿐이야.
지금의 안정적인 삶을 깨고 싶지 않아. 그냥 한가롭게 내 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하지만 거대한 변화의 파도가 코앞까지 밀려왔고... 나 또한, 내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문을 열어주고 싶어졌어. 그리고 내가 가지 않으면, 또 누가 그들 앞에 서겠나.
당시 생활은 이미 팍팍했고, 나도 막 아버지가 된 참이라, 솔직히 버티기 힘들었어.
하지만... 노르만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별다른 재능이 없더라도, 난 그 큰 나무가 되어야만 했지.
해낼 수도 없는 일을... 왜 굳이 억지로 하려는 거지?
음?
진짜 바보 같아.
수송차 운전기사는 무언가 깨달은 듯, 테디베어의 머리색과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설마...
계속해서 짐이나 실어.
소녀는 몸을 돌려 떠났고, 인간은 수송 소대에 미처 설명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테디베어의 뒤를 쫓았다.
테디베어는 멀리 가지 않고 10-43번 창고 앞으로 돌아와, 이제는 유명한 물리학자 플랑크의 모습이라 알아보기 힘든 그라피티 아래에 멈춰 섰다.
그 사람을 떠올리지 않은 지 오래됐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아버지였고, 속이기도 참 쉬운 사람이었지.
늘 영민하던 그녀의 얼굴에 어딘가 체념한 듯한 미소가 서서히 떠올랐다.
정말 바보 같았어. 그땐 그냥 어린아이였는데, 내가 뭘 가장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겠어. 난 그저 모든 일을 잘 해내는 데 능숙했을 뿐이야.
올라갔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고, 소녀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난 너무 어려서,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
사람들이 나를 노르만 가문의 영광이니, 미래니, 천재라고 불러도, 내가 정말 신경 쓴 건 아버지와 할아버지 눈에 담긴 칭찬과 자랑스러움뿐이었어.
하지만 그때는 그 칭찬이 담긴 눈빛이 뭐가 다른지 전혀 구분하지 못했어.
인간의 따뜻한 시선이 보이지 않는 포옹처럼 조용히 구조체 소녀의 어깨를 감쌌다.
아버지와 음악을 듣는 것보다, 가끔은 할아버지 곁에 서서 내가 언젠가 이어가고 빛내야 할 "노르만 가의 영광"에 대해 듣는 게 더 좋았어.
그 영광이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가기 전까지는 그랬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재능은 자랑스러운 영광이었고, 사랑받는 이유였어. 근데 죽음이란 건 참 정직한 친구더라. 자신도 모른 척하던 가식과 자기기만을 단번에 벗겨내 주니까.
노르만 가에서 재능은 이용 가치가 있는 도구이자, 주목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족쇄였어.
아주 오랫동안, 난 이 타고난 재능을 미치도록 혐오했지. 이 재능 때문에 내가 늘 이용당하고 상처받았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 재능을 끝내 떨쳐낼 수 없었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야.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족은 따뜻한 안식처이자 힘의 원천이겠지만...
테디베어는 "노르만"이라는 이름을 입술 사이에 머금고, 몇 번이나 곱씹은 끝에 조용히 삼켰다.
세상에는 쓰고 삼키기 힘든 일들이 참 많아. 그런 일들을 견디고 넘길 수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도 결국은 어른이 될 수 있지
테디베어의 마음이 어느새 지휘관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마음에는 화려하게 꾸며진 듯한 상처들이 가득했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덕분에 오히려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 되어 있었다.
멋진 오픈카는 짐들로 빈틈없이 채워진 채 조용히 길가에 멈춰 있었다.
수송차 운전기사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테디베어에게 다가와, 에드워드 노르만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 사진, 아가씨께서 간직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동안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했잖아, 소중한 추억일 테니 그냥 가져. 내 기억 데이터 속 그분 얼굴이 그 사진보다 더 선명해.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할 필요 없어.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제 생각에, 에드워드 님도 이 사진이 따님 곁에 있기를 바라셨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때의 사원증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에겐 아주 소중한 추억이에요.
물론이죠. 제게는 소중한 기념품이거든요.
노르만 그룹에서 일하던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안정되고 순탄했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이 그리워서, 차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졌을 때, 예전에는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던 레오나르도 님이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일거리를 마련해주셨어요.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저는 앞으로의 삶이 더 나아질 거라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인간은 예상했던 감사 인사를 듣고 조용히 테디베어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인간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아챈 테디베어는 체념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아니야. 당신은 원래부터 소중한 사람이었고, 늘 성실하게 살아왔으니까 운명도 당신을 도왔던 거야.
이제 임무 마치러 가. 보육 구역 사람들도 이 약품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에드워드 노르만이 언제나 당신 곁에 머물 수 있게 해줘. 세상을 자유롭게 누비며,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게 해줘. 분명 그분도 그런 삶을 바랐을 거야.
수송차 운전기사는 망설이며 인간을 한번 쳐다보더니, 결국 사진을 가지고 떠났다.
방금 나 위로하려고 한 거야?
설마 내가 아직도 이런 일 때문에 슬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지휘관. 난 이미 받아들였어.
결국 나는 평생 내 재능에 의지해 살아야 해. 가족을 지키든, 동료들과 함께 싸우든, 내게 가장 든든한 힘은 결국 그 재능이니까.
나 자신과 싸우지 않은 지도 꽤 됐어. 이 고집만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이제 내 재능과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그게 어른이 됐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고맙긴 하네. 적어도... "노르만"이라는 성이 누군가를 진짜로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앞으로도 늘 냉정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모두를 잘 챙기면서, 나 자신도 너무 몰아붙이지 않으려고 해.
그러면 아버지도 더는 걱정하지 않으시겠지.
그 꼬마 크리스티나는 어떻게 한 걸음 한 걸음... 지금의 테디베어가 된 걸까?
오빠와 동생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방황과 두려움은 누구에게 털어놨을까?
그 길고 어두웠던 시간 동안 쏟아냈던 수많은 질문과 몸부림은, 언제부터 더 이상 테디베어를 울리지 않게 된 걸까?
이제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같지만, 정말로 지금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됐을까?
정말 잘 자랐다. 이제는 마음의 상처도 모두 아물었겠지?
엉뚱한 장난꾸러기, 호기심 많은 취미 부자, 츤데레 테디베어...
테디베어라는 이름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크리스티나. 진짜 너는, 괜찮은 거니?
소녀는 살짝 놀란 듯하더니, 곁에 있는 인간의 어깨에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나 지금 아주 즐거워, 지휘관.
소녀는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지휘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난 지금의 삶이 정말 좋아.
짐을 실은 수송차들이 보육 구역을 떠나자, 바퀴 소리에 놀란 비둘기들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퍼덕이는 날갯짓이 공기를 가르며, 자유가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듯 생기 넘치는 울림을 남겼다.
그 순간, 테디베어는 마침내 그가 자유롭게 떠났음을 느꼈다.
흰 비둘기네.
저 날갯짓 소리... 아주 근사한 샘플인걸! 당장 녹음해서 내 신곡에 써먹어야겠어.
결국 이 노래를 음악 축제에서 선보일 순 없게 됐네. 그래도 공중 정원 가서 좀 더 손보면, 헛수고는 아니겠지.
테디베어는 평소처럼 딴지를 걸지 않고, 인간의 팔짱을 끼며 아쉬움을 감췄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만회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 자기 위안일 뿐이었다.
전해액을 테디베어의 손에 쥐여주고, 몸을 돌려 관제 센터로 향했다.
묵직한 망치가 의식의 바다 깊은 곳을 다시 한번 강타했다. 테디베어는 저도 모르게 인간의 손을 붙잡아,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다.
하지만 뻗었던 손은 허망하게 허공을 갈랐다. 황급히 인간의 손목이라도 붙잡으려 했지만, 테디베어는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속절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타다닥...
시야가 어지럽게 일그러지더니, 디어베어가 요란하게 군고를 두드리며 나타났다. 디어베어는 턱을 괸 채 인간이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방금 음악 축제를 쿨하게 포기하던데? 우리답지 않게 왜 그래?
시끄러워...
그러니까, 넌 애초에 가기 싫었던 거야. 지난번엔 우주 항에서 일부러 감시 카메라를 박살 내고, 이번엔 망설임 없이 운송 장비를 내주고...
넌 이 전해액이나 한 모금 얻어 마시려고 나타난 거잖아. 됐으니까 얼른 마시고 사라져.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디어베어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이 기체가 가장 사랑하는 체리 맛 전해액을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다 느껴지거든. 너 지금 불안해하고 있잖아. 왜 그래? 지휘관이 해결책을 찾으러 갔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난 그저 네 의식이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일 뿐이라는 걸. 원래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야.
애초에 답도 모르는데, 속이긴 뭘 속여?
둘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전해액 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디어베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관제 센터 내부는 예상했던 대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태풍으로 인해 수많은 수송 임무가 재조정되면서, 가용할 수 있는 수송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모든 수송 임무를 꼼꼼히 검토한 끝에, 인간의 머릿속에 하나의 계획이 그려졌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인간은 관제 센터에서 소개해 준 베테랑 수송 소대 대장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이 수송 임무 경로들을 이용해서 컨스텔레이션까지 가시려고요? 어디 한번 보죠...
꽤 먼 길을 돌아가야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 그런데 이 노선은 태풍의 영향권 안에 있군요. 혹시 일정이 많이 촉박하신 편입니까? 돌발 변수가 생기면 예정보다 지체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시죠. 제가 저희 수송팀에서 사용하는 노선도를 하나 찾아드리겠습니다. 공식 문서는 아니고 저희끼리만 공유하는 자료라, 잡다한 정보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마주칠 도로 상황에 대한 기록만큼은 훨씬 실용적일 겁니다.
천만에요. 저희가 보육 구역에서 지휘관님의 운송 장비를 징발했던 입장이니,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어 오히려 저희가 기쁩니다.
마음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비로소 사라졌다. 물거품이 될 뻔했던 여행이 인간의 꺾이지 않는 고집 덕분에 다시금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 소식에 테디베어의 눈이 반짝일 것을 생각하니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수송차는 끝없이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달렸다. 길게 이어진 도로는 마치 다음 목적지를 향해 풀어놓은 구불구불한 회색 리본 같았다.
잠깐만, 그러니까 우리 계획이... 먼저 이 수송차를 몰고 83호 보육 구역에 가서 물자를 내려주고, 거기서 배분이 끝나면 다시 물자를 싣고 85호 보육 구역으로 가서... 내리라고? 남은 길을 걸어서 가야 한다는 거야?
테디베어는 수송 소대가 건네준 노선도를 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콧소리 때문에 답답하게 들렸다.
그녀는 다시 앞자리에 앉은 인간들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운송 임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해, 그는 더 편리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뒷좌석에 거꾸로 걸터앉아 있던 테디베어가 한숨을 쉬더니, 얌전히 자세를 바로 했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고 까딱거리던 다리도 순순히 좌석 아래로 내렸다.
이제 됐어?
흥, 난 구조체거든? 설령 네가 운전하다 차를 도랑에 처박는다고 해도 난 멀쩡할걸. 어쩌면 내가 널 구해줘야 할지도 모르지.
인간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번 여행 내내 테디베어가 평소보다 유난히 들떠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으음... 어!?
아니나 다를까, 테디베어는 곧바로 무산되었던 그 여름밤의 계획을 떠올리고 운전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찰랑이는 분홍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인간의 어깨 위로 스르르 흘러내렸다.
훨씬 이전, 아쉽게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컨스텔레이션 여름밤 여행에서도 둘은 원래 씨 솔트 피싱 빌리지에 들를 계획을 세웠었다.
설마... 그때 우리가 가려던 그 씨 솔트 피싱 빌리지 말이야?
아... 뭐, 나쁘지 않네. 어차피 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거니까. 난 상관없어.
자기를 위해 일부러 준비했다는 걸 눈치챈 테디베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슬쩍 뒷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노선도를 뒤적거렸다.
근데 이 노선도에는 왜 이렇게 풍경 사진이 많아? 도로, 언덕, 노을 사진까지... 구도도 제법인데? 요즘은 수송차 운전하려면 사진도 잘 찍어야 하나?
괜히 한마디 툭 던지고, 소녀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인간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치 경쾌한 리듬에 몸을 맡긴 것처럼, 테디베어는 남몰래 몸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래! 내가 아주 재밌는 사진 포즈들을 잔뜩 준비해 주지.
겉으론 태연한 척 말했지만, 좌석 위에 놓인 소녀의 손가락은 이미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경쾌하게 박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인간의 입가에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 창밖의 풍경은 미련 하나 없이 차창 뒤로 빠르게 사라졌다.
끝없이 펼쳐진 길 위를 질주하고 있으니, 꼭 정해진 질서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람 좀 쐬고 올게.
손을 뻗어 선루프를 열자, 싱그러운 풀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왔다. 테디베어는 익숙하고도 능숙한 몸짓으로 운송 장비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로 쏟아지는 햇살과 몸을 감싸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테디베어는 난생 처음으로 온몸의 감각이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단말기를 켜보니, 운전 중인 인간이 어느새 샘플을 보내왔다.
흰 비둘기 날갯짓 소리가 녹아든 노래에 영감이 샘솟듯 피어올랐다. 이내 그 영감은 구조체의 입가에서 경쾌한 음표로 흘러나왔다.
(흥얼흥얼...)
테디베어의 콧노래가 열린 차창을 통해 차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인간의 손가락 역시 그녀의 리듬에 맞춰 운전대 위를 가볍게 두드렸고, 조용히 그 노랫소리를 녹음했다.
창밖의 풍경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득히 뒤로 멀어졌다. 테디베어는 노래에 맞춰 신나게 다리를 흔들었고, 어느새 운전석 쪽 지붕에 옆으로 걸터앉아 있었다.
잠깐, 놀랐잖아!
마치 화들짝 놀란 작은 물고기처럼, 구조체 소녀는 창가에서 흔들던 다리를 재빨리 거둬들였다.
뭘 조심하라는 거야? 혹시 너?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 환하고 도발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운전석 창밖에 나타났다.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결국 안전 운행을 위해, 인간은 차를 천천히 멈췄다.
쏟아지는 햇살이 창가에 매달린 소녀의 몸에 눈부신 금빛 테두리를 둘렀다. 그녀의 분홍색 머리카락은 중력을 거스른 채, 어지럽게 땅으로 쏟아지는 대신 비단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흩날렸다.
물론 구조체인 테디베어에게 물리적으로 위험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들떠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녀를 보니, 인간은 좀 걱정이 됐다.
인간은 진지한 눈으로 테디베어를 쳐다봤다.
...
마치 뜨겁게 달궈진 부싯돌 하나가 예고도 없이 의식의 바다 한가운데로 던져진 듯했다. 그 진심 어린 눈빛과 마주친 순간, 잠잠했던 모든 생각이 격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타다닥...
너 또 시작이냐? 어어어? 근데 왜 우리가 운송 장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건데?
디어베어는 처음으로 머리를 아래로 한 채 등장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됐다.
테디베어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 없이 흩날릴 때, 두 번째 인격은 사슴 모자가 떨어지지 않게 누르고 있었다. 옆의 군고는 이미 디어베어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고 있었다.
잠깐만, 우리 지금 있는 곳이 지구가 맞긴 한 거야? 뉴턴을 좀 존중해 주면 안 돼? 왜 넌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머리카락이 아래로 안 쏠리냐고!
{226|153|170}~
아니, 헤어스타일이 왜 이렇게 완벽하게 고정되어 있는 건데? 지금 바람 한 점도 안 부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효과가 나는 거지? 뉴턴이 없어도 물리 법칙은 아직 살아 있잖아...
거꾸로 매달리면 머리카락이 귀신처럼 축 늘어져야...
거꾸로 매달린 귀신? 취향 진짜 구리다.
테디베어는 늘 그렇듯 또 다른 자신의 미적 감각을 비웃었지만, 디어베어가 안 보이는 인간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현실로 돌아온 테디베어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머리카락도 결국 이 기체를 이루는 복합 재료 중 하나야. 연산 능력만 있으면 제어하는 건 어렵지 않아. 다만 평소엔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을 뿐이지.
테디베어는 순간 멈칫했다. 자신을 향한 인간의 걱정 어린 눈빛과 마주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지붕 위에 바로 앉았다.
세차게 들끓던 의식의 바다가 서서히 잔잔해졌다.
이렇게까지 정밀하게 연산 능력을 분배하는 건, 엄청나게 대단한 기술이라고...
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테디베어는 시선을 떨군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심해에서 스며든 은밀한 불안감이 마음을 잠식하려다, 이내 거칠게 억눌렸다.
자유롭던 바람은 이미 사라졌고, 오랫동안 몸을 얽매던 규칙이 다시 나타났다.
(절대 해선 안 될 짓을 한 것 같아.)
(정말 싫다...)
그 시끄러운 인형이 사라지고 나니, 지붕 위는 유난히 고요했다.
역시, 가장 감당하기 힘든 공포는 원래는 숨겨져 있어야 할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드러날 때 찾아오는 거야...
설마... 내가 저 사람 앞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연산 능력까지 써서 머리카락 방향을 조절했던 걸까?
테디베어는 이마를 문질렀다.
내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건가... 이런 감정, 정말 무서워.
구조체는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를 살며시 눌렀다.
등 뒤 선루프에서 소리가 나더니, 운송 장비 안에 있던 인간이 체리 맛 전해액 한 캔을 들고 올라왔다.
또 삐진 듯한 테디베어를 불렀지만, 돌아온 것은 고집스러운 뒤통수뿐이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그 정도 연산 능력 제어는 나한테 식은 죽 먹기야. 그냥 평소 하는 워밍업 같은 거라고.
지휘관은 테디베어가 어떤 존재여야만 한다고 정의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부담 없이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일어나는 작은 "일탈"을 위해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테디베어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테디베어는 고개를 돌렸다.
인간은 웃으면서 손에 든 끈 두 개를 테디베어에게 흔들어 보였다.
테디베어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인간은 그녀 뒤에 앉아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정리했다. 두 갈래로 나누고, 제복 술 장식 끈으로 끝을 예쁘게 묶어주었다.
구조체 소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테디베어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 그녀의 뒤에 앉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테디베어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두 갈래로 나누었다. 그리고 유니폼에서 뗀 술 장식으로 끝을 묶어주었다.
바람이 그녀의 옆머리카락을 스치자, 테디베어는 그 동작의 특별함을 깨달은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인간은 그녀의 뒤에 앉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소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두 갈래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유니폼에서 빼낸 술 장식으로 끝을 묶어주었다.
(원래... 이래도 되는 거였나?)
그 흔들리던 긴 머리는, 한 사람의 이해 덕분에 진정한 안식을 찾았다.
난...
마치 위험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성이 속수무책으로 그 혼란 앞에 굴복하라는 압박을 받는 것 같았다.
거의 다운될 뻔했던 테디베어의 머릿속이 그 한마디에 순간 맑아졌다.
지·휘·관? 지금, 나 귀찮다고 돌려서 말하는 거야?
"무시무시한" 곰 인형이 득달같이 달려들자, 말실수를 자각한 인간은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테디베어는 기세등등하게 인간의 등에 올라타, 가엾은 인간을 닦달하며 온갖 "불평등 조약"을 받아냈다.
둘의 웃음소리가 퍼지는 동안에도, 테디베어는 마음속에 퍼지는 희미한 불안을 떨쳐낼 수 없었다.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견고하고 질서 있던 세계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경계 안의 세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경계 밖은 알 수도, 정의할 수도, 닿을 수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