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 지 불과 30분 만에, 황금시대 미학의 결정체라 불릴 만한 이 멋진 쿠페가 마치 파업이라도 선언한 듯 길 한복판에 멈춰 섰다.
적막한 도로변에 서니, 옅은 구름과 끝없이 이어진 산맥이 눈앞에 펼쳐졌다. 간간이 들려오는 땡그랑거리는 소리는 테디베어가 말썽을 부리는 운송 장비와 씨름하는 소리였다.
방해된다는 이유로 쫓겨난 지휘관은 기꺼이 "천재 엔지니어의 수리소"를 홍보하는 광고판이 되어 그녀의 곁을 지켰다.
테디베어는 앞쪽 엔진룸에 몸을 숙인 채로 있었고, 이곳은 정비 부대의 부대장인 그녀의 무대와도 같았다. 도로 옆에서 들어 올린 보닛 위로, 깃털 모양의 구름을 뚫고 내리쬐는 햇살은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트렁크에서 아이스 체리 맛 전해액을 한 병 꺼냈다.
이 부품에 문제가 생긴 걸까? 흠... 네가 범인이 아니라는 거지? 그럼 지금 나랑 범인 찾기라도 하자는 거야?
입으로는 엉뚱한 상상을 중얼거리면서도, 구조체의 손은 성실하게 파업 중인 운송 장비를 어루만지며 수리를 계속했다.
응?
인간의 목소리에 중얼거림을 멈춘 테디베어가 수리를 멈추고, 보닛에 손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건 갈퀴 권운이라고 해. 높은 하늘의 얼음 결정으로 만들어져서, 작은 꼬리가 달린 깃털처럼 보이는 거지.
테디베어의 뺨과 코끝에는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기름때가, 얼룩진 나무 그림자처럼 그녀의 눈가에 내려앉아 있었다.
따뜻한 공기가 차가운 캔 표면에 부딪혀 자잘한 물방울을 피워냈다. 인간은 체리 맛 전해액을 소녀의 손에 쥐여주고, 캔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을 손끝에 묻혀 그녀의 눈 밑 "그림자"를 닦아주었다.
...
테디베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겹겹의 잔물결이 동공에 일더니, 이내 깊은 보라색 소용돌이로 번져나갔다.
타다닥...
쯧쯧, 얼마나 걸리는 거야? 아직도 못 고쳤어?
창피하다, 창피해.
갑자기 나타난 디어베어는 체리 맛 전해액 한 캔을 들고, 테디베어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인간의 어깨에 올라탔다.
자신의 두 번째 인격이라 자칭하는 인형이 버젓이 의식의 바다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시각 모듈이 침식당해 생긴 환상이란 건 알지만, 눈앞 인간의 안전이 걸린 일이기에 테디베어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뭘 하려는 거야?
못 고치겠지?
하... 설마 나 따라 하는 거야? 그렇게 한다고 기세 있어 보일 줄 알아?
꿀꺽, 꿀꺽...
디어베어가 체리 맛 전해액을 들이켜려던 동작을 멈칫했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왜 기어 나왔어?
허세 부리는 건 이미 테디베어에게 간파당했지만, 디어베어는 용감하게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다.
내 마음을 느껴보라고 했지? 내가 나타나는 건 규칙 때문이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고.
꿀꺽꿀꺽... 자, 그럼 안녕.
디어베어는 인간의 어깨에 앉아 손에 든 체리 맛 전해액 한 캔을 단숨에 비웠다. 그 와중에 비웃음 한마디를 내뱉고는, 색 바랜 그림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
응?
손에 들린 캔이 가벼워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흔들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테디베어는 그 교활한 인형이 나타났던 이유를 깨달았다.
뭐야!
맛은 시뮬레이션 의식 속의 녀석이 봤지만, 정작 전해액 한 캔을 전부 마셔버린 건 자신의 기체였다. 테디베어는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아니, 난... 배불리 마셨어.
(규칙이라... 이런 건가?)
그제야 테디베어는 인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발견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은 못 고쳐.
평소와 달리, 테디베어는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평범한 운송 장비일 뿐인데, 테디베어가 고작 프로그램 문제로 막힐 리는 없을 것이고, 하드웨어의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테디베어는 여전히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참... 맨날 이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무거운 망치가 또다시 의식의 바닷속 깊은 곳을 내리치는 듯했고, 테디베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계획도 글렀네.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빵빵... 테디베어의 말은 요란한 경적에 끊겼다. 낡은 수송차 한 대가 멀리서 비틀거리며 다가와 둘 앞에 멈춰 섰다.
도움이 필요한가? 내가 도와주마.
...
테디베어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맑아졌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여행이었지만, 다행히 "하늘이 도운" 덕에 마침 돌아가던 이 수송차를 얻어 탔고, 일단 보육 구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햇살이 점점 뜨거워졌다. 두 운송 장비 사이의 견인 봉이 단단히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테디베어에게 다가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다음 순간, 아무것도 아니라던 테디베어는 울적한 얼굴로 발밑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자리를 비워뒀으니 얼른 타, 곧 출발해.
둘은 선루프 아래 좌석에 앉았다. 좌석이라기보단 개조해서 고정한 낡은 컨테이너에 가까웠다. 차에 타고 있던 수송 대원들이 노골적인 시선으로 둘을 훑어봤다.
자, 자, 그만들 봐. 노르만 그룹의 손님들이셔.
테디베어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
다시 한번 경계하며 운송 장비 안을 훑어보았다. 화물칸에 다 싣지 못한 자잘한 짐 외에는 먹다 남은 압축 식량, 화물 명세서에 끼워진 낡은 사진, 오래된 사원증 같은 개인 물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아... 예전에 쓰던 물건이지. 그나저나 그 운송 장비도 레오나르도 님이 준비해 준 모양인데? 10-43번 창고에 있었던 운송 장비이고, 내가 관리했었거든.
계속 방치돼 있길래 아무도 안 찾아가는 줄 알았는데, 역시... 이런 귀한 물건은 너무 오래 세워두면 쉽게 고장 난다니까.
...
노르만 그룹에서 날 믿어줘서, 가끔 이렇게 일을 주거든. 지금은 꼴이 이래도, 젊었을 땐 노르만 님 운전기사도 했었어.
또 그 얘기를 하시네요, 대장님. 귀에 딱지가 앉겠어요.
차라리 녹음해 두시지 그랬어요? 인터뷰 프로그램처럼 만들면, 매번 같은 얘기를 안 해도 되잖아요.
아니. 에드워드·노르만, 에드워드 님이시지. 하하하, 내가 젊었을 때 얘기거든.
테디베어의 손가락이 움찔하며, 나비 날개처럼 인간의 새끼손가락을 스쳤다.
그건 좀 과장된 말씀인 것 같네요, 대장님?
뭐가 과장이야? 시찰 활동 때 운전한 것도 운전기사지, 그럼 아니야? 노르만 그룹도 자네들처럼 그렇게 따지진 않았어.
노르만 님은 정말 소탈하신 분이라 저한테 아이랑 잘 지내는 방법도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아~ 네, 네. "딸이 최고지, 착하고 다정하고..." 그 레퍼토리 말씀이죠? 하도 들어서 이젠 다 외웠어요.
깊은숨을 삼킨 테디베어가 손을 들어 선루프 스위치를 눌렀다. 선루프가 다 열리기도 전에, 그녀는 몸을 날려 운송 장비 지붕 위로 올라가 앉았다.
이 작은 소동에도 수송차 운전기사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에드워드 노르만과 나눴던 대화를 몇 번이고 장황하게 되풀이했다. 동료들 표정만 봐도, 이 얘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송차 운전기사가 기억하는 그 젊은 아버지는 늘 딸 이야기를 끊임없이 꺼내곤 했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는 딸이 의심할 여지 없는 천재이고,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딸이 자라서 노래를 잘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고, 어쩌면 노르만 가문 최초의 음악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과학 연구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이미 전문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아버지로서 딸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길 바랐다.
그렇게 똑똑한 딸도 사실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는 아이였지만, 에드워드는 오히려 그걸 일과 휴식의 조화라고 보았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시간을 관리할 줄 아니, 앞으로도 절대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오래된 기억 속, 아버지의 눈에 비친 어린 테디베어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머리 위 선루프는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다가, 언제부턴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어느덧 수송차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차 안에는 마침내 조용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테디베어의 한 손이 선루프의 투명한 유리를 짚고 있었다. 손가락 끝의 인공 피부가 가벼운 압력에 눌려 동그랗게 찌그러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들어 올린 손을 선루프에 갖다 댔다. 차가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그 작은 손바닥과 마주 댔다.
그 행동에 테디베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매우 평온했으며, 지휘관이 상상했던 우울함이나 슬픔은 없었다. 이 각도에서 보니, 오히려 조금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테디베어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선루프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손 앞을 막던 투명한 유리가 점점 사라져 갔지만, 테디베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들어 올린 채 조용히 있었다.
가늘고 외롭게 뻗은 꽃가지처럼, 은밀한 초대 같았다.
자세를 가다듬고 열린 선루프를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가 테디베어의 곁에 앉았다.
수송차가 덜컹거리며 달리자, 시야 속 풍경도 낡은 영화처럼 흔들렸다. 지붕 위의 바람은 생각보다 잔잔했고, 열렸던 선루프는 다시 서서히 닫혔다. 온 세상이 나른하게 일렁이는 듯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귓가에는 테디베어의 조용한 숨소리만 들렸다.
언제부턴가 그 숨소리는 점점 가볍고 느려지더니, 옅은 구름처럼 서서히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푸른 하늘빛이 드러났다.
테디베어는 한쪽 다리를 구부려 양팔로 감싸안고, 턱을 무릎에 얹었다.
그 자세 때문에 뺨이 무릎 위로 볼록하게 올라와, 자줏빛 분홍색 눈 아래에 작은 "언덕"처럼 뭉쳐 있었다.
테디베어는 그렇게 고개를 갸웃하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테디베어의 눈도 옅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웃음기 어린 시선이 빛을 따라 지휘관의 뺨에 와 닿았다.
세상은 이 순간 더없이 조용해졌다.
누구도 더 이상 무언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두 개의 그림자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서서히 가까워졌다.
응.
...
보육 구역은 떠날 때보다 훨씬 더 분주해져 있었다. 이제는 보육 구역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물류 센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테디베어는 고장 난 오픈카 앞에 서서, 체리 맛 전해액을 한 모금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들은 서툰 드러머의 스틱처럼 제멋대로 가슴을 두드려댔다.
심리적 방어선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영향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여정을 포기하고 당장 그것을 포맷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로직은...
어째서인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정보들이 짙은 안개에 가린 듯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단 한 번도 없었던 느낌이었다. 푹, 소리와 함께 구조체 손에 들린 전해액 알루미늄 캔이 찌그러졌고, 흘러나온 액체가 테디베어의 손가락을 적셨다.
타다닥...
방금도 말했잖아. 못 고친다고.
뒤틀린 색채가 내 시야에 서서히 퍼지더니, 디어베어가 작은 군고를 건들거리며 두드리면서 보닛 위에 나타났다. 그 모습에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지휘관한테는 말 못 하겠어? 하드웨어 문제도, 소프트웨어 문제도 아니고, 바로 여기가...
디어베어는 드럼 스틱을 놓고, 허공에서 체리 맛 전해액 한 잔을 들어 올려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바이러스"에 침식됐거든.
겉보기엔 멀쩡해도, 속까지 멀쩡하단 보장은 없잖아?
테디베어는 피식 웃으며, 디어베어가 제 머리를 가리키는 짧은 손을 여유롭게 쳐다봤다.
주인격의 위험한 시선에 디어베어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과장된 몸짓을 거뒀다.
방금 도로에서 눈치챘지? 사고 회로가 막혀서, 간단한 고장조차 손댈 수 없게 된 거 말이야.
테디베어는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손을 보다가, 다시 운송 장비 엔진의 제어 시스템으로 시선을 돌렸다.
딱히 놀랍지도 않아. 어차피 내가 직접 설계한 "바이러스" 프로그램이니,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가 없지.
하지만 지금 네 지능으론...
테디베어는 손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막말"을 내뱉는 인형을 평온하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응? 지금 지능이라고 했어?
날카로운 눈빛이 디어베어를 향해 꽂혔다.
내, 내 말은 지금 네 분석 능력으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조차 못 할 거란 소리야.
그 침입 프로그램의 원리는 단순한 시뮬레이션 복제가 아니거든. 계속해서 우리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끄집어내지. 그러다 보면 넌 그 공포에 이끌려 무의식적으로 환상에 갇히게 될 거야...
평범한 자들은 공포를 직면하지 못하고, 천재들은 그러한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철저히 숨기곤 하지. 자신의 삶에 쉽게 영향을 주지 않게 하려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공포들이 강제로 드러나 햇빛 아래 노출된다면?
재능을 잃고, 무력한 평범한 자가 되어 상황이 악화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을 거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테디베어"가 되는 것, 그게 바로 네가 두려워하는 거 아니야?
디어베어가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으스스한 말투를 썼음에도, 테디베어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녀석을 옆으로 밀어냈다.
연기 연습 좀 더 해야겠네...
그래서, 이게 네가 말한 "규칙"이라는 거야?
테디베어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다시 운송 장비의 엔진룸 안에서 바쁘게 손을 놀렸다.
그럼... 넌 내 특정 시기의 "미적 감각"이나 "인격"이 아니라, 어떤 "공포"가 구체화된 거란 소리네?
난 여섯 살 이후로는 그런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참 불쾌한 말투로 말하고 있. 아무리 네가 나라고 해도, 이건 내가 화낼 만하잖아! 잠깐만, 왜 표정이 점점 더 경멸적으로 변하는 건데?
네 꼴을 보고 경멸하지 않기가 더 어렵지 않겠어? 고작 이런 모습으로 내 재능을 흉내 낸 거라면, 내 재능도 별거 아니었나 보네.
아니, 이젠 하다 하다 자기 자신까지 욕하고 그러네?
삐... 가동 성공.
엉뚱한 두 번째 인격과 유치한 말다툼을 하면서도, 테디베어의 손은 멈추지 않고 수리를 계속했다.
뭐?! 어떻게?
낮은 기계음과 함께 지붕 덮개가 부드럽게 펼쳐지고 접히며, 정확한 궤도를 따라 우아한 곡선을 그려냈다. 앞쪽 엔진이 차분한 저음을 내며 모든 점검이 끝났음을 알렸다.
간단해. 네 정체가 뭐든 간에, 넌 그저 시뮬레이션 의식일 뿐이야. 시뮬레이션은 뭐다? 가짜라는 뜻이지.
하지만 내 재능과 능력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야. 가짜가 진짜를 이기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넌 그저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작은 장난감에 불과해.
이 공포를 받아들이는 건, 네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아주 조금 더 귀찮을 뿐이겠지.
넌 "지혜"의 힘을 너무 얕봤어. 아니, 어쩌면 날 너무 얕본 건가?
이성적인 자제력을 가지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인 후, 그녀가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했던 안개는 자연스럽게 걷혔고, 수리 작업은 다시 가장 단순한 '블록 게임'으로 돌아갔다.
미안하지만 두 번째 인격, 날 놀라게 하려면 좀 더 노력해야 할걸. 내가 이성을 잃지 않는 한, 난 언제나 자신을 구할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테디베어는 몸을 숙여 디어베어의 손에서 체리 맛 전해액 캔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단숨에 마신 뒤, 기분 좋게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 사라져도 좋아.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디어베어의 모습이 물에 번지는 물감처럼 흩어졌다.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익숙한 인간이 체리 맛 전해액 한 상자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의 시선 속에서,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던 소녀는 억지로 유지하던 태연함을 풀고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챙겨줘? 아쉽게도 보상은 준비 못 했지만, 내가 운송 장비는 고쳐 놨어. 그러니까 이번 여정의 유일한 에이스 운전기사로 임명해 줄게. 컨스텔레이션까지 바로 가자!
농담이야, 설마 내가 진짜 너한테 졸음운전을 시키겠어?
올해 9호 태풍이 3일 이내에 본 구역 동남쪽 연해 지역에 상륙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상륙 시 강도는 강한 태풍급 또는 초강력 태풍급으로 예상되오니, 각 수송 소대는 최신 임무 정보를 즉시 확인하시고 경로 조정 여부를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테디베어의 목소리는 보육 구역의 시스템 방송에 묻혔다. 악천후 예보를 들은 테디베어는 눈을 깜빡였다.
걱정 마, 우리가 가는 길은 태풍 영향권 밖이야.
테디베어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전 구역 방송이 다시 한번 갑자기 울렸다.
수송차 고장으로 78번 임무에 대한 지원을 요청합니다. 가용 인력은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기...
그들을 구조해 줬던 수송차 운전기사가 멀리서 달려왔다.
다행이네. 아직 안 떠났군. 어떤 보육 구역에 급성 전염병이 발생해서 약물 지원이 필요해. 마침 우리가 징발됐는데, 지금 동원할 수송차가 없어서 말이지. 혹시 운송 장비는 수리가 끝났나?
상대방의 의도를 바로 알아챈 테디베어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들 수송차는?
가장 낡은 모델이라, 원래 78번 임무에 투입될 수송차보다도 느리거든. 징발되지 않았으면 진작 점검받아야 했을 운송 장비였어.
속도를 생각하면, 도저히 제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어서... 지금 여기 있는 운송 장비 중에선, 아마 레오나르도 님의 이 운송 장비만이 임무를 제때 완수할 수 있을 것 같아.
테디베어는 망설이며 고개를 돌려, 인간의 온화하고도 단호한 시선과 마주쳤다.
지휘관, 우리...
약품 싣고 오자, 운송 장비는 내가 수리했으니, 언제든 써도 돼.
고마워! 바로 모두에게 전달할게.
테디베어 곁으로 다가가 위로하듯 어깨를 토닥였다.
하~ 또 누구의 불운이 옮았나 보네. 역시 전원 제비뽑기에서 열 명 중 하나로 뽑히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답다니까.
네 흑역사는 워낙 드물어서, 특별히 기억 모듈 하나 할당해서 따로 저장할 가치가 있거든~
그래도 그들을 도울 수 있으니, 이것도 행운의 일종이겠지.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겨도, 나랑 같이 가줄 거잖아.
오가는 인파와 소음 속에서 테디베어가 고개를 들어 인간을 바라보는 순간, 세상이 마치 멈춘 듯했다. 비록 여정을 더 이상 이어갈 수는 없었지만, 이 순간의 교감과 이해,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은 어떤 풍경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약품은 전부 확인했습니다. 언제든 실을 수 있습니다.
대장님, 개인 물품도 가져왔습니다. 점검할 때 운송 장비에 잡동사니를 두면 안 된다고 해서... 어...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밟지 않으려 테디베어가 한 걸음 물러서다, 등 뒤 인간의 품에 부딪혔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던 순간, 인간도 그 사진을 똑똑히 보았다.
오래된 사진이었지만, 아주 잘 보관되어 얼룩 하나 없이 색도 전혀 바래지 않았다. 정장을 입은 남자와 젊은 운전기사가 흰 건물 앞에 나란히 서서, 마치 시간을 초월한 누군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
에드워드 노르만. 크리스티나 노르만, 테디베어의 아버지였다.
테디베어는 사진을 주워 수송 대원에게 건넸다.
수송차 운전기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테디베어에게서 사진을 받아서 들었다.
에드워드 님 사진이야. 시찰 행사의 마지막 날에 찍은 건데, 이게 마지막 일정이었지. 한 물리학자 기념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플랑크.
어?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알지?
10-43번 창고 벽에 그려져 있던 인물 그라피티가 기억 데이터 속에서 떠올랐다.
10-43번 창고, 10⁻⁴³초, 플랑크 시간. 인간이 인지하는 최초의 시간 단위... 이 이야기는 레오나르도한테도 해줬었어.
플랑크 시간은 우주 진화의 시작점을 의미한다. 그 척도 아래에서 인간이 이해하는 시공간의 개념이 의미를 잃는다. 그것은 물리적 인지의 절대적인 경계선이다.
경계 안의 세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경계 밖은 알 수도, 정의할 수도, 닿을 수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