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베어·해영·그중 하나
>얇은 시폰 커튼을 통과해 부드러워진 황금빛 아침 햇살 속에서, 먼지들이 목적 없이 맴돌며 나른한 별 무리처럼 반짝였다.
부드럽고 진한 커피 향이 따스한 손길처럼 퍼지고, 편안한 음악이 그 손끝을 따라 흘렀다. 새콤달콤한 체리 향 속에서 막 깨어나는 의식은 자연스레 휴가의 첫 아침 속으로 녹아들었다.
잠깐...
휴일의 나른함에 잠겨 있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인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커피 머신으로 다가갔다. 체리의 상큼함과 원두의 쌉쌀함이 어우러진 커피 한 잔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늘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던 커피 머신이 오늘따라 파격적인 시도를 한 모양이다. 이토록 환상적인 체리 커피를 내려준 것도 모자라, 본업을 잊고 스피커 역할까지 하며 아침 음악을 틀고 있었다.
디스플레이에 보란 듯이 떠 있는 오류 메시지를 보니, 이 작은 휴일의 서프라이즈는 장난기 많은 누군가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코드 몇 줄 너머에 장난기 어린 반짝이는 눈동자가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반듯한 글씨체조차 발랄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이 특별한 풍미의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인간은 초대에 응했다. 커피잔을 실내 바에 내려놓자, 잔 바닥이 테이블에 가볍게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띵...
우주 항에 도착하자, 경쾌하고 맑은 통신 알림음과 함께 테디베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 휴일에도 꼭 그 제복을 입어야겠어?
이른 아침의 우주 항은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서늘한 바람이 정처 없는 여행자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 소녀의 짓궂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비로소 세상의 온기와 생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제복이라면, 마다하지 않을게~
지휘관...
테디베어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쿵... 어디선가 들려온 묵직한 소리가 구조체 소녀의 의식의 바다 깊은 곳을 뒤흔들었다. 테디베어는 순간 멍해졌다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간헐적인 소음과 함께, 귓가의 통신이 급하게 끊겼다.
여길 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분홍 머리 구조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빛을 깜빡이는 감시 카메라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방금 테디베어의 목소리는 분명 저기서 들려왔다.
자~ 웃어봐.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감시 카메라는 이 장면을 그대로 기록했다.
다음 순간, 페인트탄 한 발이 어깨를 스치며 감시 카메라 앞에서 정확히 터졌다. 형형색색의 페인트가 순식간에 불쌍한 카메라를 뒤덮었다.
페인트탄의 사정거리 안에 있던 인간 역시 흩뿌려지는 페인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어머, 미안. 네 제복을 더럽혀 버렸네~
왼쪽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과 함께, 분홍 머리 구조체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에는 "미안함"이라곤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테디베어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새 "제복" 한 벌을 꺼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페인트 건을 가방에 쏙 집어넣으며 태연하게 "증거를 인멸"했다.
옷도 더러워졌겠다, 마침 내가 준비한 휴일 코디로 갈아입으면 되겠네.
응. 전에 컨스텔레이션에서 주문했던 건데, 우리 결국 못 갔잖아? 그래서 내가 찾아왔지.
지난번, 인간은 갑작스러운 임무 때문에 테디베어와 해변 휴가를 함께하지 못했다. 그때 컨스텔레이션 옷 가게에서 테디베어가 디자인한 옷을 한 벌 맞추기로 약속했었다.
내가 디자인한 게 아니면 안 입겠다? 흥~ 그럼 내가 특별히 만들어준 이 "미채복" 꼴로 목적지까지 같이 가시든가.
테디베어가 디자인한 "휴일 코디"로 갈아입은 인간은 소녀 앞에 서서 디자이너의 "검수"를 받았다.
옷깃이 좀 작은가?
분홍 머리 구조체 소녀가 발뒤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옷깃을 매만졌다.
테디베어의 속셈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랜 경험 덕분에 몸이 먼저 자연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감시 카메라의 정면을 피했다.
다음 순간, 페인트탄 한 발이 어깨를 스치며 감시 카메라 앞에서 정확히 터졌다. 형형색색의 페인트가 순식간에 불쌍한 카메라를 뒤덮었다.
들켰네? 넌 왜 그렇게 똑똑한 거야?
왼쪽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과 함께, 분홍 머리 구조체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에는 "미안함"이라곤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인간은 태연하게 몸을 돌려 테디베어에게 양손을 펼쳐 보이며 멀쩡한 옷차림을 보여주었다. 재빨리 물러선 덕분에, 테디베어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그레이 레이븐 제복에는 화려한 페인트가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흥, 너한텐 안 통할 줄 알았어... 똑똑한 사람도 실수는 하는 법인데.
소녀의 시선이 인간의 뺨을 스쳤다.
그쪽 똑똑이 씨도 실수를 하나 했네.
자... 이제 내가 놓친 물고기를 좀 처리해 볼까.
분홍 머리 구조체 소녀가 발뒤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옷깃을 매만졌다.
이윽고 서늘한 손가락 끝이 인간의 뺨에 닿았다. 그곳에 튄 아주 작은 페인트 자국을 중심으로, 소녀는 손끝을 움직여 작은 하트를 그렸다.
...
음... 좀 삐뚤어졌네...
테디베어의 눈은 분홍빛과 보랏빛이 어우러진 오묘한 색이었다. 너무 가까이에서 봐서인지, 그 부드러운 색이 안개처럼 흐릿하게 번지며 소용돌이처럼 깊어 보였다.
그녀의 긴 머리는 원래 기체처럼 양옆에 묶여 있지 않았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깨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아름다운 두 눈의 캔버스가 되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분홍 머리 구조체는 눈을 깜빡이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두고 우주 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 이걸로 너의 음악 축제 한정 메이크업 완성.
맞아. 컨스텔레이션에 있던 그 기계체 밴드 기억나? 걔네가 요즘 미니 음악 축제를 연대. 나도 초대받았어~
"선더 스파크". 인간과 테디베어의 도움으로 대회에서 우승했던 그 기계체 밴드가 어느새 단독 음악 축제를 개최할 만큼 성장한 모양이다.
미리 네 근무표를 확인했어, 휴가 기간이더라?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
인간의 시선이 페인트로 얼룩진 감시 카메라를 무심하게 훑었다.
그걸 또 어떻게 알았대? 너무 나한테만 집중하는 거 아니야, 지휘관?
인간이 떠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걸 눈치챘지만, 테디베어는 순순히 "자백"할 생각이 없었다.
뭐, 알려줘도 상관없어. 내 신곡이 완성됐거든. 음악 축제에서 공개할 건데, 기대해도 좋아. 역대급 작품이니까.
구조체 소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예리하다니까. 걱정 마, 그냥 무해한 페인트야. 사람 시켜서 깨끗하게 치울게.
참 똑똑해서 마음에 들긴 하지, 그걸 나한테 쓰면...
더 재미있고.
테디베어는 한적한 연결 탑승구 앞에 멈춰 서서, 몸을 돌려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그 귀엽고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지휘관, 이건 "납치"야. 앞으로 며칠 동안, 넌 나한테 "납치"당하게 될 거야.
이런 뻔한 장난에 놀랄 리 없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테디베어의 말을 받아쳤다.
그럼 "공범" 씨, 우리 같이 "도망" 치자~
"공범" 친구. 흔적을 감추고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이번엔 컨스텔레이션으로 바로 가는 일반 노선은 이용하지 않을 거야.
어때? 좀 흥미진진해지는 것 같지 않아?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테디베어의 걸음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왜 그렇게 똑똑한 거야...
작은 곰 인형처럼 생긴 소녀는 풀이 죽은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아이 같은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둘은 예비용으로 쓰이는 수송기에 올라탔다.
테디베어는 놀란 표정으로 인간을 바라봤다. 하지만 곧 따뜻한 눈빛에 마음이 흔들려, 고개를 돌리고 가슴을 꼭 움켜쥐었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
내가 이러는 덴 당연히 이유가 있지?그건 바로...
타다닥...
어떤 특수한 현이 튕기듯, 기묘하고 아름다운 파문이 일었다. 분홍 머리 구조체의 귓가에 맑은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미처 뱉어내지 못한 말들은 소리 없이 목구멍 너머로 삼켜졌다.
(설마...)
테디베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식의 바다에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이상 진동이 일었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결국 통제 불능 상태로 추락했다.
소리 없는 추락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테디베어는 이미 의식 공간에 나타나 있었다.
들키고... 저지당하기 위해서...
자~ 웃어봐.
테디베어는 자신의 의식의 바다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마치 앞에서 군고를 두드리는 수상한 인형을 처음 본 것처럼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 전의 임시 조치가 이렇게 빨리 문제를 일으킬 리 없다는 것도 확신했다.
...
의식의 바다 안정도에 이상 파동이 감지되는 마당에 멋대로 돌아다니다니, 네 스타일은 아닌데?
페인트탄 아이디어는 아주 마음에 들어. 보아하니 우리의 자기방어 기제가 꽤 강한가 본데? 의식의 바다에 문제가 생겨도, 이렇게 확실한 단서를 남겨서 길을 안내하려 하잖아.
곧 누군가 우릴 막으러 올 거야.
적어도 카레니나는 엄청 적극적으로 나설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훨씬 활발해졌다"라는 말을 듣던 구조체 소녀는 이 순간, 시끄럽고 괴상한 곰 인형을 침착하게 바라보며 꽤 믿음직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쯧, 누가 너랑 우리야.
오만한 말투, 엄청난 공격성! 사슴 잠옷을 입은 이 곰 인형은 세상에 이렇게 무례한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형의 동그랗고 복슬복슬한 얼굴에 인간처럼 초조한 표정이 떠올랐다.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음, 우린 당연히 우리지. 날 디어베어라고 불러도 돼. 나는...
주저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테디베어는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체리 맛 전해액에 우유를 쏟아부은 음료를 억지로 마신 듯한 표정이었다.
그만! 프로세스 중지. 내 목소리로 그딴 소리 내지 마.
어? 내 목소리가 네 목소리인 거 너도 알면서, 굳이 설명해야 해? 너 사실 다 알고 있잖아!
그 "사이버 독버섯"이 효과가 이렇게 빠를 줄 알았냐고...
테디베어는 나지막이 투덜거리며, 기억 데이터를 오늘 아침보다 더 이른 시간으로 되돌렸다.
정비 부대 실험실
3시간 전
3시간 전, 정비 부대 실험실.
카레니나는 돌아갔어?
복원 캡슐의 프로세스가 끝나자, 테디베어가 눈을 떴다.
응, 대장님은 가셨습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바로 전 실험에서, 조교의 조작 실수로 테디베어가 부상을 입었다.
지금 누구한테 묻는 거야?
아, 그리고 방금 사고는 자세히 기록해서 이틀 안에 보고서 제출해. 걱정 마, 내가 뒤처리를 잘해서 큰 징계는 안 받게 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근데...
테디베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방금 오작동 때, 저를 도와주시면 안 됐어요. 적어도 제 앞을 막아서면 안 됐다고요. 부대장님,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발 그러지 마세요...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
아니에요. 이 실험실에선, 부대장님이 저보다 훨씬 중요하세요. 정비 부대에 저 같은 조교 하나 없어도 문제없지만, 부대장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또 뭐라고.
걱정 마.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 나도 잘 아니까. 확신이 없었다면, 널 구하겠다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을 거야.
방금 방어 프로그램이 내 의식의 바다를 공격하기 전에, 내가 다른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미끼로 던져 넣었어. 그게 그럭저럭 방화벽 역할을 해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게 있었으니까 네 앞을 막아선 거라고. 이제 남은 건 관찰 기록 같은 지루한 잡무뿐인데, 네가 다치면 그게 다 내 일이 되잖아.
내가 그렇게 멍청하진 않거든...
그냥 제 마음 편하게 해주시려고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그만, 그만. 앞으로의 작업에 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니까, 오해하지 마.
알겠습니다... 근데 그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뭐예요? 의식의 바다에 넣어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그냥 심심해서 만든 거야. "사이버 독버섯"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이번 휴가 때 제대로 손 좀 보려고 했었어.
휴가요? 방금 카레니나 대장님께서 가시면서, 이번 실험 사고 때문에 부대장님의 휴가를 취소하라고 하셨는데요...
그걸 왜 이제 말해!
안 되겠어. "휴가 취소" 결재가 내려오기 전에 튀어야겠어.
그럼 원래 계획대로 저랑 파오스로...
갑자기, 구조체의 의식의 바닷속 어떤 특수한 현이 가볍게 튕겼다. 창작자가 "사이버 독버섯"이라 이름 붙인 프로그램이 조용히 작동하며, 기묘하고 아름다운 파문을 일으켰다.
원래 계획대로? 그건 안 되겠는데.
테디베어 부대장님?
분홍 머리 구조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혼돈에 빠진 듯,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평온했던 의식의 바다에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 눈앞이 흐릿해지며 여러 사람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테디베어의 눈동자 색이 한층 깊어진 듯했다.
응? 난 괜찮아.
소녀는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늘 반짝이던 분홍빛과 보랏빛이 섞인 눈동자가 사람을 홀리는 듯 몽롱해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소용돌이처럼 보였다.
사고가 혼돈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난 그냥...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테디베어는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안개처럼 흐릿했던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어떤 숙소의 커피 머신에 순식간에 침입해 커피 맛과 음악을 설정했다.
아주 중요한 일.
상대방이 깨어나자마자 이 '갑작스러우면서도' '테디베어 스타일'로 가득 찬 초대장을 받을 수 있도록, 구조체 소녀는 묶었던 긴 머리를 풀어 몇 번 손질한 뒤, 머리카락이 더 이상 얽히지 않게 풀어놓았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연구 조교는 즉시 그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정말 괜찮으세요? 그 "사이버 독버섯"이라는 게 대체 뭐죠? 일단 의식의 바다부터 검사해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연구 조교는 걱정스럽게 테디베어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가 완전히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다.
부대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 부대장님, 말 좀 해보세요. 무섭단 말이에요... 으...
눈앞에서 흔들리는 손이 마침내 테디베어의 주의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테디베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본 지휘관은 손을 거두었다.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테디베어는 다시 인간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응? 내가 오랫동안 멍 때린 거야?
괜찮아. 방금 네가 했던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이렇게 대놓고 단서를 남겼으니, 카레니나가 펄펄 뛰면서 화를 내고 있겠지?
테디베어는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수송기의 경로와 목적지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의식의 바닷속에서는 이상한 디어베어가 재잘거리고 있었다.
네가 "사이버 독버섯"에 역으로 침입당했다는 건 기억하지? 난 그 영향으로 만들어진 네 시뮬레이션 의식이야.
쉽게 말해서, 네 두 번째 인격이라고 생각하면 돼.
잠깐, 그 표정은 뭐야?
재수 없는 걸 봤을 때, 흔히 짓는 표정이지.
문제의 원인을 파악한 테디베어는 재빨리 이 말썽쟁이 프로그램의 위치를 찾아내, 완전히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소녀는 망설이며 손을 멈췄다.
아침의 실험 사고 때, 방어 프로그램의 공격을 막아내는 미끼 역할을 하느라, 이 "사이버 독버섯"은 이미 기체 자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버린 상태였다.
만약 이대로 무식하게 삭제해 버리면, 의식의 바다가 손상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이번 여행은 물 건너가게 될 터였다.
공중 정원에 남아서 차근차근 분해하더라도, 며칠의 휴가를 고스란히 낭비하게 되어 여행은 취소될 게 뻔했다.
(일단은 참는 수밖에 없겠네...)
테디베어는 "두 번째 인격"을 자처하는 인형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두 번째 인격이라... 곰 탈을 쓴 사슴인지 사슴 탈을 쓴 곰인지... 최소한 사람 꼴은 갖추고 와서 인격 타령을 하든가.
어?
동물 잠옷을 입고 작은 북이나 두들기는 인형 이미지는... 대체 내 머릿속의 어느 회로에서 튀어나온 고대 유물일까?
이 옷은 또 뭐야? 꽃사슴? 시뮬레이션 의식? 네가 시뮬레이션한 게 설마 내 여섯 살 때의 미적 감각은 아니겠지...
디어베어는 한바탕 퍼부어진 폭언에 잠시 얼어붙었다.
벌써 할 말 없어? 잘 들어. 난 지금 너 같은 바이러스 인격 따위 처리할 시간이 없다고.
이건 내가 공들여 준비한 2·인·여·행이라고. 얌·전·히 여기 박혀 있는 게 좋을 거야.
디어베어는 대답 없이, 테디베어를 향해 곰 인형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내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거지. 네 두 번째 인격으로서, 난 널 속일 수 없어. 물론, 너도 날 속일 수 없고.
...
서로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안다면, 방금 그 말들이 내 진심이라는 것도 알겠네.
이건 내가 오랫동안 기대해 온 휴가라고, 만약 너 때문에 망쳐버리면... 두·번·째·인·격, 무슨 말인지 알겠지?
테디베어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자, 디어베어의 모습이 빛바랜 잉크처럼 의식의 바다에서 희미해졌다.
눈앞의 풍경이 점차 선명해졌다. 테디베어는 가상 스크린을 조작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송기의 경로와 목적지 설정은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가볍게 숨을 내쉰 분홍 머리 구조체는 고개를 돌려, 인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준비됐어, 지휘관? 우리의 여행은 이제 시작이야.
미소 때문에 테디베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평소와는 달리, 안개가 드리운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곧 솜털 구름 속으로 녹아들 것만큼 깊었다.
32H 소대 수송차 수리를 완료했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78번 수송 임무 추가. 필요 약품 구비해서, 이쪽에서 처리해 주세요.
수송기의 착륙은 분주한 보육 구역에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않았다. 물자 집산과 환승을 겸하는 것이 분명한 이 거점에서는, 모든 것이 소음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중 정원에서 온 두 명의 이방인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자연스럽게 인파 속으로 녹아들었다.
10-43번 창고... 이쪽인 것 같은데.
응. 널 데리고 컨스텔레이션까지 걸어갈 순 없잖아, 적절한 교통수단을 마련해야지.
레오나르도한테 복고풍 운송 장비를 하나 준비해달라고 했어. 황금시대 미학이 깃든 물건인데, 이 보육 구역 창고에 보관돼 있거든. 어서 따라와, 지휘관.
창고 구역에서 몇 번 모퉁이를 돈 뒤, 테디베어는 거대한 인물 그라피티가 그려진 창고 문 앞에 멈춰 섰다.
홍채 인식이 통과되는 순간, 창고 깊은 곳에서부터 낮은 구동 음이 울려 퍼졌다.
잠에서 깨어난 듯 창고 문이 천천히 위로 말려 올라갔다. 줄무늬 조명이 쏟아지는 컨베이어 벨트가 빛의 강처럼 펼쳐지고, 우아한 바흐 첼로 선율 속에서 운송 장비 한 대가 천천히 실려 나왔다.
요란한 등장이네.
다행히, 오픈카를 본뜬 쿠페형 운송 장비는 그 요란한 등장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우아하고 간결한 선과 산뜻한 색상은 분홍 머리 구조체의 마음에 쏙 든 듯했다.
내가 말했지? 레오나르도가 이런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
테디베어는 만족스럽게 보닛 위의 흰 비둘기 그라피티를 툭툭 치더니, 가볍게 한 손으로 차체를 짚고 뛰어올라 조교석에 안착했다.
이 멋진 동작 직후, 테디베어가 조교석에서 팔을 뻗어 운전석 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문손잡이에 닿지 못한 채 어색하게 멈춰 있었다.
...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난 그렇게 속이 좁은 건 아니니까.
어차피 나중에 두 배로 갚아줄 거지만.
그렇게 말하며, 분홍 머리 구조체 소녀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 운송 장비의 외형은 황금시대 스타일을 본떴지만, 내부 시스템은 노르만 그룹의 최신 기술을 탑재하고 있었다. 수동으로 문을 여는 데 실패하자, 시스템이 자동으로 운전석 문을 열어젖히며 오랫동안 기다린 인간을 맞았다.
테디베어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 인간은, 동행인의 귀엽고 소중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 단순한 자세로 운전석에 앉아, 조심스럽게 핸들을 툭툭 건드렸다.
출발하자고!
타이어가 짧은 마찰음을 내며 도로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몸이 시트에 파묻힐 듯한 가속감과 함께, 창밖 풍경은 색면 추상화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도로는 시야 끝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테디베어는 양손으로 창틀을 짚고 조교석에서 벌떡 일어섰다.
바람이 너무 세서, 안... 들... 려...
소녀의 웃음 섞인 대답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제멋대로 부는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자,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 모습은 마치 인간의 눈동자에서 솟아오른 도도한 깃발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