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PM 난민 주둔지.
네 이름이 뭐였지?
아. 생각났어. 너 아이린이지!
아이린은 저예요. 또 잘못 기억하고 계시네요.
옆에 앉아 있던 라미아가 말했다.
아이린... 메이린... 로린...
중얼거리기 시작한 노인의 말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알아듣기 어려웠다.
시간... 사라졌어... 찾을 수 없어...
인간이 마지막 약물을 노인에게 먹이자, 노인은 서서히 잠들었고, 라미아는 노인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그런 뒤, 라미아는 눈앞의 인간이 치우기 전에 먼저 빈 그릇을 정리했다.
제가 할게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제 일을 당신에게 떠넘겨 괴롭힌다고 말할 거예요.
붕대 너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눈앞의 인간이 뭔가 말하려는 걸 알아챈 라미아가 선수 쳤다.
할아버지를 돌려 눕히는 걸 도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당신이 전부 다 해버리면, 이 일은 한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다고 그들이 생각할 거예요.
그럼, 우린 일을 두 배로 해야 해요. 그러니 너무 적극적으로 일하지 마세요.
붕대 틈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잠시 멈칫했다. 잠시 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 그릇을 들고 임시 주둔지를 빠져나온 둘은 이내 미묘한 변화를 느꼈다.
창고 근처를 순찰하던 두 초병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선은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감시탑 초병도 주둔지 전체를 내려다보는 척하면서 이쪽을 계속 바라봤다.
쓰레기를 분류하던 난민은 손에 있던 쓰레기를 왼손에서 오른손에 넘긴 뒤, 계속해서 놔야 할 자리에 놓지 않고 있었다.
옆에 있는 인간도 붕대가 눈을 가리지 않도록 조정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이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도망 경로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라미아는 옆에 있는 사람이 더 오래 관찰할 수 있도록 걸음을 늦췄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왜 여기 왔는지 계속해서 궁금했지만,
존재감을 줄이려고 애쓰던 라미아의 입장에선 이렇게 시선을 끌어주는 표적이 있다는 건 잘된 일이었다.
(수송차 부대가 오기만 하면 이곳을 영원히 떠날 수 있어.)
(여긴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게 넘겨서 그들을 상대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릇을 돌려준 뒤, 라미아와 지휘관에게 각각 다른 임무가 배정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좀 더 끄는 건데...)
라미아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기 혼자였다면 분명 오후 4시가 될 때까지 꾸물거리다가 텐트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옆에 있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은 다른 계획이 있는지, 배정받은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오늘은 마침 라미아와 지휘관이 파트너가 돼 함께 일하게 됐다. 라미아는 이전에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목적을 캐내기로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그 결심이 무색하게도 다음번으로 계속 미뤄졌다.
(어린아이한테 일 시키는 사람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건가?)
(아. 보수가 없으니, 고용은 아닌 건가?)
라미아가 할당된 일을 마쳤을 땐 해가 이미 진 뒤였다. 하늘에는 현란한 별들이 걸려 있었다.
인공적인 광원은 더 이상 하늘을 밝게 만들 수 없었고, 수만 년 전의 빛이 눈동자에 비쳤다.
공중 정원도 저 안에 있을까?
라미아는 한동안 자기 침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듯, 평소 게으름을 피던 바위 위에 누워있었다.
이때,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익! 무슨 사람이 소리도 없이 걸어요?
깜짝 놀라 일어설 뻔한 본능을 꾹 참은 라미아가 불평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라미아의 캐릭터 설정은 "다리를 잃었지만, 의지가 굳센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여기서 어떤 의학적 기적을 보여주게 된다면, 농땡이 치려는 계획은 무산될 것이었다.
(누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내가 느슨해진 걸까?)
그중에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공중 정원에 가본 적 있어요?
앞에 있는 인간이 단호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라미아는 눈을 굴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렇게 빨리 부정하다니, 어린아이에게 거짓말하는 행위에 죄책감이 없는 걸까?)
(뭐,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긴 하지만.)
가본 적도 없다면서, 어떻게 저 별 무리에 공중 정원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죠?
라미아의 질문에 맞은편 인간은 침묵했다. 그리고 라미아는 아쉽게도 붕대 안에 가려진 상대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이 사람 어린아이한테 거짓말을 잘 못하는 스타일인가?)
왜 말이 없어요? 정말로 가 본 적 있는 거예요?
소심하게 복수하듯 라미아가 다그쳐 물었다.
상대방의 애매모호한 대답을 들은 라미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 목표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도 당신과 같은 외부인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제가 여기를 전세 낸 것도 아니니, 앉고 싶으면 앉으세요.
자신과 일정 거리를 두고 앉은 인간을 본 라미아는 한쪽으로 비켜 줄 생각을 잠시 접었다.
다르다는 얘기는 당신에게도 해당하지 않나요?
왜 땅바닥에 앉아요? 바위 위에도 공간이 남아 있잖아요.
제게... 그런 습관이 있었나요?
(큰일이다. 너무 의도적으로 행동해서 의심을 산 건가?)
늘 그런 사람들과 교류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얼굴이 망가지기 전에는 인기가 많으셨겠네요. 그게 무슨 단어였더라... 사교계의...?
맞아요. 바로 그거요.
(맞아. 알았으면 다른 데로 어서 가.)
라미아는 마음속으로 불평했지만, 입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의 화제에 맞춰 대답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모두에게 미움받는 게 좀 더 쉬울 거예요.
라미아는 의족 다리를 웅크리며 우울하게 말했다.
당신은 직설적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앞에 있는 인간의 시선을 느낀 라미아가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렸다.
저처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통해 평가를 받게 돼요.
창고 관리 담당자는 제가 물건을 옮길 수 없어서 싫어하고, 음식 배급원은 제가 너무 많이 먹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감독관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서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평소에 일부러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라미아에게 눈앞의 인간처럼 먼저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라미아도 투명 인간처럼 사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가면을 쓰고 있는 라미아는 또 다른 가면을 쓴 이 앞에서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말문이 트인 듯, 요 며칠간 겪고 느낀 것을 "아이린"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그리고 눈앞의 인간은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라미아는 지휘관이 성의 없이 듣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 시선은 여전히 라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최고의 응답이었다.
라미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 원인은...
(이런. 너무 많이 말해버렸어. 화제를 돌려야겠다.)
그렇게 조용히만 있지 말고, 당신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때요?
라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공중 정원의 전투 기밀을 털어놓는 거야.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그래도 성공적으로 화제를 돌린 것 같아.)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