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PM 난민 주둔지.
얘야. 네 이름이 뭐니?
할아버지. 제 이름은 아이린이에요.
어. 그래. 아이... 뭐라고?
아이린이요.
아. 메이린!
전 아이린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메이린은 이 주둔지에 없어요.
음. 메이린이 아니구나...
그럼, 네 이름은 뭐니?
……
할아버지. 약 드실 시간이에요.
라미아는 손에 들고 있던 약을 노인의 입가에 대고는 강제로 먹였다.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 거야...)
치매 노인에게 냄새 나는 수상한 약물을 먹인 후, 라미아는 드물게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루나의 "선물"을 받은 라미아는 평소의 나태함을 뒤로하고, 의심스러운 장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버려진 실험실, 새로운 지역으로 퍼진 이합 재난 구역, 그리고 수만 마리의 침식체가 모인 해저까지 모두 조사했다. 그런 과정에서 저공비행 하는 흰색 로봇을 보기도 했으며,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루나가 원하는 걸 찾지 못했다. 다리를 되찾은 흥분이 가시고 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어...)
폐허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백발의 승격자가 적색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기 전, 그녀에게 보냈던 경고의 눈빛을 떠올린 라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계속 제대로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알파는 더 이상 내 변명을 들어주지 않을 텐데.)
아이린, 왜 떨고 있어? 추운 거니?
말했잖아요. 전 아이린이 아니... 제 이름을 기억하셨어요?
음... 기억하지, 이름이 아이린이잖아, 다 기억나.
전에는 메이린이었고, 그전에는 로린이었지. 다 기억났어. 기억... 내가 뭘 기억했지?
또다시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노인을 바라본 라미아는 익숙하게 노인을 내버려둔 채, 빈 그릇을 치웠다.
라미아는 침식체의 뇌에서 이 주둔지의 외부인들이 일정 기간마다 비밀 장소로 보내진다는 것과 그 위치를 알게 됐다.
그래서 라미아는 그 지점에 자기가 찾고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어떤 실험장일 수도 있고, 승격자의 비밀 기지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광기는 이미 라미아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중에서도 쿠로노가 가장 광적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이번 수송차가 지연된 것 같은데?)
그 비밀 지점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라미아는 어린아이로 위장해 난민 주둔지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기를 좀 더 위협적이지 않게 보이기 위해, 라미아는 두 다리를 잃고 의족에 의지해 종말 속에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여자아이로 위장했다.
(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까지 마주했단 말이야, 이번엔 제발 성과가 있기를.)
연착한 수송 기사를 마음속으로 저주하며, 라미아는 빈 그릇을 챙겨 천천히 텐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라미아가 위협적이지 않은 외형으로 주둔지 난민들을 기만했던 것처럼, 이 치매 노인도 자기가 모르는 사이, 주둔지의 배후에 외부인들의 경계를 풀게 하는 안정제로 이용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표면적인 선함은 악의의 가장 좋은 위장이었다. 라미아는 이를 여러 번 목격했으며, 또한 여러 차례 이용해 왔었다.
약그릇을 제자리에 놓은 뒤, 라미아는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가던 바위에 가서 멍때릴 예정이었다.
어. 아이린이잖아.
하지만 열정적인 초병이 라미아를 불러 세웠다. 그들은 주둔지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주둔지의 원래 주민 대부분이 베개 아래 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걸 라미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초병 옆에 있는 건 초병의 술친구가 아니라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상대방은 허름한 방풍 망토와 수없이 꿰매서 원래 모양을 알 수 없는 옷차림과 모래가 잔뜩 들어간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난민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새였다.
붕대를 감싸고 있는 얼굴 전체에서 상대방을 무심한 듯 보고 있는 눈만이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붕대 틈 사이로 심한 화상의 흔적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고, 그곳에서 고약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다른 주둔지에서 막 피난 온 거야. 그런데 얼굴이... 어휴...
초병은 동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넌 모르는 게 나을 거다. 조금 본 나도 밤에 악몽 꿀 것 같았으니까.
아이린. 이 사람 데리고 주변 구경 좀 시켜 줘. 그리고 주둔지가 익숙해지면 휴식처로 안내해 줘.
(새로운 피해자인가 보네. 나랑은 상관없지만.)
네. 알겠어요.
재미없다고 생각한 라미아는 초병의 말에 겉으론 복종하는 척했다.
무기를 압수하는 건 이해해 주길 바라. 주둔지 안에 있는 모두가 무기를 내놓았는데, 너만 특별 대우할 순 없으니까.
초병의 말을 들은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까지 자진해서 반납하다니, 그러면 남에게 당할 수밖에 없잖아. 어리석긴.)
그때, 붕대를 감은 이상한 이가 말했다.
산속 샘물이 돌을 두드리듯 명쾌하고 힘찬 예전 목소리가 아닌 쉬고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위장의 달인인 라미아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라미아는 생존 본능에 따라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린.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아, 아무거도 아니에요.
다행히 칼을 든 적색 실루엣도, 분홍 머리의 구조체도, 언덕에서 저격포를 든 청년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광적인 미소를 지으며 기창을 들고 있는 붉은 머리 여자가 보이지 않자, 라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너한테 맡길게. 난 다른 곳에 순찰하러 가야 해서 말이야.
알았어요. 제게 맡겨 주세요.
상대와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온 힘을 다해 거절한다면 도리어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위장에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지만, 상대방의 정체를 간파한 라미아는 점점 더 상대방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초췌한 눈빛 뒤, 보이지 않는 곳에는 모든 것을 꿰뚫는 영혼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눈빛 앞에서 라미아는 자신의 비밀이 모두 드러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미아가 그토록 무서워하며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괴물을 쓰러뜨린 이가 루나였다. 그리고 그 루나를 깨운 사람이 바로 이 지휘관이었다.
라미아도 용기를 내어 누군가와 정면으로 맞선 적이 있었지만, 그 용기로 얻은 것은 처참한 패배뿐이었다. 이 지휘관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
라미아는 결코 용감한 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이 사람은 모종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왜 또 이 사람이야...)
(이 사람만 만나면 좋은 일이 한 번도 없었어.)
그렇다. 이건 미신 혹은 실패에 대한 핑계라고 할 수 있었다.
히익!
마음속으로 갈등하던 라미아는 갑작스러운 기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특유의 괴성을 질렀다.
눈앞의 인간은 여전히 쉰 목소리였지만,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아이를 달래려고 했다.
(이 상황에서도 자기 컨셉을 유지하다니,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빈틈이 없구나...)
(아니지, 난 뭐가 두려운 거야?)
(그레이 레이븐 소대도 없고, 그 미친 붉은 머리 여인도 없는데, 게다가 무기도 없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야.)
(그렇다면,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지금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라미아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인간을 힐끗 쳐다봤다.
(인간 쪽에서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던데, 이 사람을 잡아 루나 아가씨에게 바친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음... 하지만 루나 아가씨는 인간의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어. 그럼, 이 사람도 내가 생각한 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근데 이 사람을 납치해가면 괜히 복잡해질 것 같아, 일단 내 임무부터 제대로 수행해야지.)
라미아는 공중 정원 구조체들에게 추격당하는 모습을 잠깐 상상한 후, 지휘관을 납치하려던 아이디어를 바로 포기했다.
(그나저나 이 인간은 왜 여기에 왔을까? 나와 같은 목적일까? 어쩌면 이 사람 입에서 공중 정원의 정보를 캐낼 수 있을걸?)
(근데... 내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입을 열 수 있을까? 역시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야겠어.)
라미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쓸데없는 짓을 해서 상대와 엮이고 싶지 않은데... 시도를 해보면 더 좋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상대방은 날 알아보지 못한 것 같으니까, 정보를 좀 캐낼 수 있을 거 같아.)
결국 후자가 전자를 이겼다. 알파의 칼날이 더 두려웠던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저기...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앞에 있는 인간은 라미아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을 보며, 라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뒤, 인간을 데리고 휴식 구역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 사람은 대화할 때, 왜 이렇게 진지하게 바라보는 거야!)
(내일... 내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정보를 수집하자.)
라미아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