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달 야항선이 보낸 물자와 구룡이 지원해 준 청부의 집계 수량입니다.
지휘관은 남자가 집계한 명세서를 받은 뒤, 서류를 임시 보관하는 수납장에 넣었다.
괜찮습니다. 이웃사촌이지 않습니까?
참, 제 아내가 순찰원 자리에 관심이 많은데...
주둔지에 기계체 여성이 등록을 도와주실 거예요. 그녀를 찾아가시면 돼요.
함영이 목재 선반을 들고 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지휘관이 달려와 함께 벽 모퉁이로 옮겼다.
주둔지의 현재 상황을 통계하자고 제안한 후, 함영은 패하파에게서 빌린 목재로 종이 자료를 보관할 간이 책장을 만들었다.
신호가 불안정한 이 지역에서 추가적인 백업을 갖추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함영이 설계한 지원 신청서 양식을 단말기에서 확인하니, 몇몇 이름이 기입되어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이네요.
정말 죄송해요. 지휘관님.
손님으로 모시고 온 건데…...
제가 제대로 보답해 드릴게요.
제가 지휘관님이 제대로 쉬시는지 감시할 거예요.
목재 책상 위에 있던 정비 부대에서 빌린 건설 매뉴얼을 들어 펼쳤다.
하지만 곧 문가에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멈췄다.
아린?
아린은 문가에 서서 함영에게 수화로 질문했다.
방해되지 않았어. 아린은 여기서 잠시 쉬어도 좋아.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조금 있다가 다시...
수화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한 지휘관은 방금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가의 낮은 수납함으로 가서 솔방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요?
함영은 땅을 관찰하며 흙을 천천히 만졌다.
정오의 햇볕 아래, 셋은 언덕 위에 솔방울 몇 개를 심었다. 언덕에서 주둔지를 내려다보니 아래쪽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키가 삽보다 별로 크지 않은 아린은 물뿌리개를 옆에 놓고 그대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후에는 며칠에 한 번씩 물주면 돼.
나무를 심자고 했을 때 아린은 별로 열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휘관과 함영이 출발하려고하자 아린은 냉큼 따라왔다.
심지어 함영이 돕겠다고 할 때 일을 가로채기까지 했다.
함영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휘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줬다.
지휘관과 함영이 함께 서 있는 이 언덕은 오래된 산장을 내려다보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
이젠 이 나무들이 자라서 "고향"을 볼 수 있게 되겠죠.
오는 길에 죽순 몇 개를 따뒀어요. 오늘 점심은 그걸로 만들어볼까요?
대화를 듣던 소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며칠 후
소녀는 기계체들이 설치한 텐트 주변을 머뭇거리며 맴돌았다. 분주히 오가는 기계체들은 그런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소녀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공중 정원의 지휘관님은 이사 갈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전에 새로 지은 집은 어제 항공 도시에서 온 그 남녀에게 배정했습니다... 아, 인간식 표현으로는 부부겠네요.
알겠습니다. 오늘 제 임무는 부부 한 쌍을 새 집으로 데려가고 주둔지를 소개하는 거겠군요.
참, 당신의 집 지붕은 패하파가 보강 작업을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준비한 배터리에 습기 찰 일은 없겠네요.
보치오니 옆에 있던 기계체가 임무를 반복하며 텐트를 떠났다.
소녀는 보치오니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 선현이시여!
비틀거리며 반걸음 뒤로 물러난 보치오니는 자칫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소녀가 더 놀란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당황했네요. 아린 아가씨.
놀란 기색의 기계체를 본 아린은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광기에 사로잡힌 침식체들과는 달리, 눈앞의 기계체는 매우 공손했다.
윽...
기계체의 둔한 신음이 흘러나오자, 그녀는 정신을 들었다.
보치오니는 자신이 떨어트린 도면을 정리하려다가 되려 테이블 다리에 부딪혀버렸다.
음... 저를 도와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소녀는 그저 서 있기만 했다. 그녀는 여전히 과거 기억과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보치오니는 아린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기계 특유의 뻣뻣함으로 과하게 돌아간 머리를 부자연스럽게 바로잡았다.
소녀는 한숨을 쉬더니, 보치오니 곁으로 걸어가 책상을 함께 정리했다.
정리가 끝난 후, 그녀는 책상 위에서 백지 한 장을 집어 들고 작은 묘목 위에 아치형 구조물을 그렸다.
그러니까, 이게... 아치 헛간입니까? 헛간은 이미 수리가 끝났습니다. 다만 첫 번째 감자 수확은 한 달 후에나 가능합니다. 농경지는 우기가 지나서 개간할 예정입니다.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가로저었다. 그리고 텐트 밖으로 나가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언덕을 가리켰다.
그녀는 묘목 주위를 동그라미로 표시하고, 간단한 선으로 뾰족한 잎이 달린 소나무를 그렸다.
그림을 보니, 당신이 언덕에 소나무를 심었군요.
아치 헛간은 발아를 촉진하는 기능이 있으니, 소나무 묘목을 키우고 싶으신 거겠죠?
아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시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킨 뒤, 눈앞의 기계체를 가리켰다.
도움을 요청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지금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소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보치오니를 바라봤다.
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나무 심기는 다른 일들보다 우선순위가 낮습니다.
……
근무 시간 외를 물어보시는 겁니까?
기계체는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이건 꽤 괜찮은 취미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제 다른 창작 활동에도 영감을 줄 수도 있고요.
아린은 기계체 앞으로 걸어가 진지한 표정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게 인간이 약속을 표현하는 방식이군요.
인간과 다른 손 구조를 가진 보치오니는 "손"으로 소녀의 새끼손가락에 살짝 닿기만 했다.
며칠 후
며칠간 주둔지 인원들의 상황을 파악한 뒤, 함영과 함께 직책 배분을 마쳤다. 이제 주둔지도 안정적인 운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함영은 찻주전자를 들어 천천히 잔에 차를 따랐다.
잔에서 피어오른 옅은 차 향기가 공기 속으로 가득 스며들었다.
세 번째 잔이 이 차의 정수예요.
지휘관님, 여기요.
함영은 찻잔을 지휘관에게 건넸다. 그러자 은은한 차향이 코를 자극하며 퍼졌다.
햇살이 누그러진 어느 오전, 함영은 다기를 꺼내 향긋한 차를 우렸다.
앞선 두 잔으로 입안에 퍼진 차 향은 더욱 깊어졌다. 찻잔 속 차를 단숨에 비우자, 계피 같은 달콤한 여운이 입안 가득 퍼졌다.
금세 피로가 씻겨져 내려갔다.
또 바쁜 오전을 보냈군요.
이 대홍포로 감사의 마음을 전할게요.
지휘관님, 이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하고 싶으신 일을 함께 해보는 게 어때요?
함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를 우리던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고 능숙했으며, 차를 마실 때는 자유분방함이 묻어났다.
함영의 점심 준비를 돕던 아린이 테이블 한쪽을 톡 건드렸다.
(저도 마시고 싶어요.)
어린아이는 차를 마시면 안 돼. 밤에 잠을 못 자니까.
(저 잘 수 있어요.)
지휘관은 최근 급하게 수화를 배운덕에 아린과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창밖으로 제비 한 마리가 낮게 날아와 처마 옆 둥지로 들어갔다.
아린은 창밖 날씨를 한 번 보더니, 아무도 눈치 못 챌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보치오니를 찾으러 잠깐 나갔다 올게요.)
보치오니는 왜?
(비밀이에요!)
함영은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옷장에서 자신의 비옷을 꺼내 아린에게 걸쳐줬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까,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나갔다. 함영은 아린을 보낸 뒤 네 번째 차를 따랐다.
아린이가 예전에는 기계체를 무서워했어요.
함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휘관님이 오신 뒤로, 낯을 덜 가리게 된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지휘관님은 아이들에게 정말 인기 많으시네요.
방금 표정을 봐서는 엄청 재미있는 비밀인 것 같죠?
보치오니도 참 감쪽같네요. 아린과 친구가 된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또 한 잔 비우니, 따뜻한 차가 우기 특유의 습기를 몰아냈다.
자, 시작할까요?
함영은 간단히 찻도구를 정리한 뒤, 알코올 스토브의 불을 낮췄다.
지휘관은 함영과 함께 두 컨테이너를 나란히 붙여놓고, 책장을 벽 쪽으로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좁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임시 "침실"이 완성되었다.
아린을 돌보던 부부는 야간 근무를 맡게 되어, 오늘 밤 아린이는 이곳에 묵기로 했다.
창밖의 먹구름은 여전히 걷히지 않았고, 햇빛이 그 장막을 뚫으려 애쓰는 것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서 단말기의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단말기 화면을 거의 보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지휘관님, 오늘 저녁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전에 남은 산죽도 있고, 포뢰가 보내온 것도...
함영은 주방으로 들어가 재료를 뒤적였다.
그건 안 돼요!
제가 할게요. 지휘관님은 손님이시니까요.
함영은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비쳤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미소가 번지는 그런 감정 같았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함영은 상대방이 이 복잡한 감정이 눈치챌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럼,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화로의 불빛이 실내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을 때, 눈치 없는 봄날의 천둥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이윽고 창밖으로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창틀과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던 빗방울 소리가 조금씩 거세지더니, 어느새 거친 폭우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