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이 바위도 끝이네요!
조금 전 연설 말이에요. 인상이 깊어서 그대로 인용해 봤어요.
시몬은 방금 산에서 내려와, 다시는 정상에 오를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기지개를 켰다.
"그 바위가 산을 평평하게 만들었을 때, 우린 영웅이라 불리는 의미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얼굴엔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고, 시몬은 진지하게 지휘관의 연설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시지프스는 몸과 마음을 헛된 일에 바칠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바위는 대지를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그는 신과 운명의 벌에게 대항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임무도 시지프스와 같습니다. 운명과 고난으로 가득 찬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에 의해 언제든 뒤집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탈환한 구역이 내일엔 다시 적조에 묻힐 수도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는 오늘의 퍼니싱에 의해 산산이 부서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린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고리 속에서 맞서 싸우고, 우리의 존재 가치를 쟁취할 것입니다."
"그 바위가 산을 평평하게 만들었을 때, 우린 영웅이라 불리는 의미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전 영웅 같은 게 되고 싶지 않아요. 영웅이 되면 다음 단계는 죽어서 교과서에 실리는 거잖아요.
진실을 말하는 지휘관님의 말을 듣는 게 영웅이 되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 같아요.
과거와 미래가 어떻든 그건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차라리 그들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게 나아요. 진실을 알아야 사람들이 진지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전에 지휘관님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어요. 이건 굉장히 중요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시몬은 블랙 램 소대의 대기실로 돌아갔고, 지휘관은 다시 한번 백로 소대의 대기실 앞에 멈춰 섰다.
며칠 전 이 문을 처음 두드린 건 시몬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 며칠의 경험이 묘한 꿈처럼 반복되는 생활 궤도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작고 부서지기 쉬운 꿈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백로 소대의 문을 연 밤비나타는 예전처럼 당혹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밤비나타는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던 아기 고양이처럼 얌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밤비나타의 하늘색 눈동자에는 희미한 빛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다른 곳에서 그녀의 맑은 눈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밤비나타는 지휘관님의 이름, 모습 그리고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어요.
밤비나타는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휘관님에 대한 인상은 있어요.
그 빛은 그동안 꿈에선 볼 수 없었던 거였고, 그 빛 속에선 시간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비치고 있었다.
밤비나타는 지휘관님의 이름을 통해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하지만 밤비나타는 일기가 있다는 걸 기억해 냈고, 지휘관님의 일을 찾을 수 있었어요.
여기에 지휘관님이 내일 그러니까 오늘에 밤비나타를 보러 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밤비나타는 계속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밤비나타는 어제 지휘관이 쓴 메모를 지휘관에게 보여줬다. 밤비나타는 그 메모를 어제 일기에 붙여놨었다.
메모의 말은 시간을 초월해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약속으로 새겨져 있었다.
네. [player name] 님.
밤비나타는 요 며칠 동안 작성한 일기를 첫날부터 매일 다시 봤다.
어떻게 보면 밤비나타는 매일 지휘관과 만났던 그날부터 일어난 모든 일을 다시 익히는 셈이었다.
또한 밤비나타는 일기장의 일들을 필터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해 다음번 기억상실을 기다렸다.
때문에 밤비나타는 바네사가 지휘관한테 한 조롱이나 순찰 대원의 일도 다시 경험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밤비나타가 지휘관도 잊어버리기 쉬운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해 내는 것이 모든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는 장점이라면 장점일 것이었다.
도미니카 기념 공원... 전에 주인님도 밤비나타를 데리고 이곳에 온 적이 있어요.
공중 정원 안에서 조용하고 편안한 곳이 이곳 말고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휘관은 밤비나타를 데리고 어제 시몬과 함께 휴식했던 도미니카 기념 공원으로 왔다.
어제의 약속을 지킨 아이들은 오늘도 여기에 모여서 놀고 있었다. 멀리서는 한 부부가 자신의 아이와 함께 장의자에서 피크닉을 하고 있었다.
[player name] 님은 밤비나타를 데리고 왜 이곳에 왔나요? 밤비나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솔직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여기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밤비나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밤비나타는 지휘관님 옆에 같이 있을게요.
밤비나타는 지휘관과 함께 조용히 앉아서 멀리 있는 사람들과 공원의 풍경을 바라봤다.
도미니카 기념 공원은 황금시대 이전의 공원을 복원한 것으로, 기념비를 보는 것 외에도 힐링할 곳이 많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피크닉도 했다.
이름이 기념 공원이지만 사실상 일반 공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공원이 생기를 느끼지 못하고, 묘지 느낌이 든다면 도미니카 자신도 기뻐하지 않을 걸 의회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기념은 무거운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을 전진시키기 위함이다.
그건 후세에 경고하기 위한 각인인 동시에, 후세에 축복하기 위해 맺힌 소원이기도 했다.
지휘관 옆에 있는 밤비나타를 초대할 수 있는 친구로 생각했는지 아이들이 우리 쪽으로 한 여자아이를 보냈다.
안녕. 내 이름은 니아야. 네 이름은 뭐야?
안녕? 어라, 못 들은 건가?
대답을 듣지 못한 여자아이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말을 계속 머뭇거렸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인가요?
밤비나타는 먼 곳을 보던 시선을 옆에 그녀처럼 귀여운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에게로 돌렸다.
우리 저쪽에서 놀고 있는데 혹시 너도 올래?
논다고요? 음...
밤비나타는 자신이 잘못할까 봐 지휘관을 물어보는 눈빛으로 봤다.
답이라고 할 수 없는 대답을 들은 밤비나타는 좀 망설이더니 니아의 초대를 거절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밤비나타는 당신들과 놀 수 없어요.
그래? 알겠어.
하지만 넌 너무 귀여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귀여워요?
밤비나타에게 환하게 웃은 니아는 떠나갈 때, 지휘관을 향해 몰래 귀엽고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밤비나타는 지휘관 때문에 자기와 같이 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player name] 님, 밤비나타가 귀엽대요.
밤비나타를 비난하는 걸까요?
칭찬이요? 하지만 밤비나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니아의 초대도 거절했는데 왜 칭찬을 받은 건가요?
밤비나타는 지휘관에게 진지하게 물어봤다. 그 사이 아이들이 멀리 가버렸다. 관목 숲 위에 떠 있는 풍선만이 그들이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는 걸 알게 해줬다.
그건 지휘관님이 밤비나타가 놀아도 된다고 동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아서 그랬어요.
그리고 밤비나타는 구조체이고, 아이들은 인간이에요.
밤비나타가 구조체로 개조되지 않았다면 저 아이들처럼 즐겁게 살다가 어른이 됐을까?
하지만 지휘관은 그런 추측을 할 수 없었다. 지휘관은 밤비나타의 하늘색 눈동자 뒤에 어떤 과거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시간과 역사는 가정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정의 유혹을 그 누구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네. 밤비나타는 여기서 지휘관님을 기다릴게요.
밤비나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아 계속 먼 곳을 바라봤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곳 근처에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료로 풍선을 나눠주는 로봇이 있었다. 아이들 손에 있는 풍선도 아마 이 로봇한테서 받았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무료 풍선이 필요하신가요?
당연하죠. 놀 때 안전에 주의해 주세요.
로봇은 지휘관에게 풍선 한 묶음을 줬다. "몇 개 더"라는 뜻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놀 때 안전에 주의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에게도 나눠 주세요.
풍선 한 묶음을 든 수석이라, 바네사가 이 모습을 봤다면, 1년 내내 지휘관을 비웃었을 것이다.
아이들도 풍선 한 묶음을 들고 공원을 걷고 있는 지휘관을 보고 신기한 듯 뒤를 따랐다.
지휘관이 밤비나타 쪽으로 돌아간 뒤에야, 아이들은 다시 멀리 숨어서 자기들만의 놀이를 시작했다.
음, [player name] 님? 이게 뭔가요?
왜 이렇게 많은 풍선을 가지고 오셨나요?
왜 밤비나타에게 주시나요?
밤비나타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휘관님도 그런 명령을 하지 않았어요.
이상한 논리예요.
지휘관님은 밤비나타가 이 풍선들을 받아주길 원하나요?
구조체이면서, 망각의 순환에 빠져서, 과거의 고난을 잃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더라도 말이다.
밤비나타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없애고 되돌리면, 상상한 가상 시간 속에서의 밤비나타는 저 아이들과 같을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풍선들이 매우 아름다워요.
손에 쥐면 어떤 느낌일까요? 밤비나타는 갖고 싶어요.
한 아이와 한 풍선.
하늘색 풍선이 그녀의 눈에 비치면서,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거품처럼 몽환적으로 보였다.
고마워요. 주인님.
소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