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은 자신과 밤비나타의 일을 원고에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좌담회의 강연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눈에 새로운 빛을 머금은 아이들에게 피와 불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포기해 버렸다.
다행히 좌담회가 시작되기 십여 분 전, 지휘관이 시몬에게 메모를 써달라고 부탁해서 말 한마디 못 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크흠, 이게 끝났으니 다음 일을 하러 갈 수 있겠네요.
입학식 원고는 잊지 마시고요. 좌담회야 편안한 장소이니 아무렇게나 이야기해도 이어 갈 수 있지만, 입학식은 그럴 수 없으니까요.
시몬과 지휘관은 도미니카 공원의 장의자에 앉아서 잠깐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짧은 오후의 여유 시간만이 지휘관에게 주어진 개인 시간일지도 모른다. 대기실로 돌아가면 내일 입학식 강연 원고가 지휘관의 모든 시간을 빼앗아 갈 예정이었다.
?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비상사태인데, 어떻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으세요?
옛말에 시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시인이 그것을 말로 전달할 뿐이라는 로맨틱한 표현이 있다.
지휘관은 사실 뭘 써야 할지 대략적인 방향은 있었다. 다만 아직 뭔가 부족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건 도움을 드릴 수 없을 거 같아요. 그런 중요한 강연 원고를 제가 현장에서 대신 써드릴 수는 없잖아요.
어찌 됐든 내일이 지나면 다 끝나요.
지친 시몬과 지휘관을 비추는 태양이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의 몸에도 똑같이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인파가 조금씩 줄어들고 아이들은 서로 작별 인사를 건네며, 내일 어떤 시간에 같이 놀자고 약속을 잡았다. 기념품이나 물품을 팔던 자동 상인도 조금씩 떠나기 시작했다.
시몬과 지휘관도 공원을 떠나 집행 부대 구역으로 돌아왔다. 헤어지기 직전까지 시몬은 내일 사용할 강연 원고를 모두 작성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지휘관은 뭔가 확증을 얻으려는 듯 다시 한번 백로 소대의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밤비나타가 아는 분인가요?
밤비나타는 여전히 대기실 문틈으로 문밖에 있는 지휘관을 살펴봤다.
[player name]? 당신이 [player name] 님인가요?
밤비나타는 이 이름을 알고 있어요. 목소리도 익숙한 것 같아요.
밤비나타가 일기를 쓴다는 걸 어떻게 알고 계셨나요?
아... 밤비나타가 일기를 보여 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밤비나타가 갑자기 문에서 손을 내민 뒤, 지휘관의 손을 잡았다.
이건 지휘관님의 느낌이에요. 밤비나타는 이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밤비나타는 갑자기 이런 식으로 지휘관을 잡는 건 안 좋은 행위라는 걸 알게 된 듯, 재빨리 손을 거둔 뒤, 문을 활짝 열었다.
죄, 죄송해요. 밤비나타는 [player name] 님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네. 밤비나타는 당신이 [player name] 님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밤비나타의 기억은 24시간밖에 없어서 지휘관님의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아요.
오직 일기에만 지휘관님에 대한 기록이 있어요. 지휘관님을 찾아간 것, 의사를 만나러 간 것 그리고 착한...
음, [player name] 님.
밤비나타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에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뭔가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는 착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의 배경인 백로 소대 대기실엔 여전히 밤비나타 혼자였다.
그날 지휘관과 밤비나타가 기체 검사를 마친 후, 지휘관이 바네사에게 연락해 봤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학교의 도움으로 친분 있는 교관과 지휘관에게 바네사의 소식을 알아봤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주인님은 밤비나타에게 연락하지 않았어요. 밤비나타도 주인님과 연락되지 않아요.
하지만 밤비나타는 이곳에서 주인님이 돌아오길 기다릴 거예요. 주인님께서 며칠 후에 돌아온다고 했으니까요.
며칠 후는 며칠인가요?
그렇군요.
밤비나타는 멍한 모습으로 대기실의 소파 가장자리로 걸어가 테이블 위에 있는 일기를 안았다. 여윈 밤비나타의 모습이 넓은 대기실에서 더 약하게 보였다.
밤비나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모두 일기에 적으면 돼요.
[player name] 님, 바네사 주인님, 이런 일들은 모두 적으면 돼요.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다.
네?
순간 밤비나타의 얼굴에 경이로움이 역력했지만 금방 기계적으로 가라앉힌 뒤, 처음의 그 무표정 상태로 돌아갔다.
밤비나타는 지휘관님의 요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player name] 님은 바네사 주인님의 친구이니까요. 아니. 친구가 아니에요!
그러니 주인님의 허가를 받아야 해요. 하지만 주인님의 명령은 밤비나타가 지휘관님과 함께 검사하러 가는 거였어요.
그러니 안될 건 없을 거 같아요.
밤비나타의 자아 변론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상태라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밤비나타는 자기 생각과 판단을 일기에 기록하지 않았다. 심지어 밤비나타에게 생각과 판단이 존재하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나중에 밤비나타가 그날에 대해 기록한 걸 읽었을 때, 창백한 기록에서 조금의 색채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
일기, 225호...
전에 일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바네사 주인님, [player name] 님, 병원, 순찰 대원에 대한 이전 기록을 읽었다.
오후 5시 43분 전까지 계속 대기 상태로 있었다.
오후 5시 43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그 사람은 [player name](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목소리도 익숙했다.
밤비나타는 [player name] 님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으므로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 확인하기 위해 [player name] 님의 감촉을 검사했다.
[player name] 님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player name] 님은 바네사 주인님에 관해 물어봤다. [player name] 님은 주인님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밤비나타도 주인님이 보고 싶다.
하지만 밤비나타는 모른다. 주인님께 연락을 드려봤지만, 연락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밤비나타는 주인님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주인님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 기록에도 이렇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해. 며칠 후에 돌아올 거야."
바네사 주인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
주인님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주인님은 며칠 후에 돌아올 거다.
그리고 [player name] 님이 밤비나타에게 주인님의 대기실에서 잠시 쉬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밤비나타는 주인님을 대신해서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전에 주인님이 밤비나타에게 [player name] 님과 함께 병원에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렇다는 건 주인님은 [player name] 님을 믿는다.
밤비나타는 주인님의 판단을 믿는다. 주인님이 [player name] 님을 믿기에 밤비나타도 [player name] 님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판단을 밤비나타가 주인님 대신해도 될까?
혼자 있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은 옳은 걸까?
밤비나타는 판단을 내렸다. [player name] 님에게 주인님이 앉았던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이 일은 주인님에게 혼날 일이지만, 밤비나타는 그래도 기록했다.
밤비나타는 [player name] 님을 믿는 판단을 내렸다.
"우리 모두가 오늘 있었던 일을 일기로 쓴다면 밤비나타는 어떻게 쓸 거야?"
이상한 문제였다. [player name] 님은 기억을 잃지 않는데, 왜 일기를 쓰려고 하는 걸까?
밤비나타는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고, [player name] 님에게 일기를 보여줬다.
"심플하네. 하지만 밤비나타가 쓰는 일기는 과거의 일이 아닌 것 같아."
일이 발생하면 밤비나타는 그것을 기록했다. 기록할 때면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밤비나타는 과거의 일이 지금 일어난 일로 되지 않았기에 과거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는 알 수 없기에 미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player name] 님은 말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네사 주인님도 자주 이랬다.
[player name] 님은 일기 쓰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player name] 님에게 밤비나타처럼 오늘의 일을 기록하냐고 물었다.
"밤비나타는 알고 싶어?"
알고 싶다. 싶지 않다는 상관없었다. [player name] 님이 이 일을 물어봤기 때문에 밤비나타가 이렇게 물어보는 거라고 대답했다.
[player name] 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비나타가 무언가를 잘못 말한 거냐고 물었다.
[player name] 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났다. 밤비나타는 계속 [player name] 님의 옆에 앉아 있었다.
"고마워. 밤비나타."
[player name] 님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됐을 때, [player name] 님이 밤비나타에게 이렇게 말했다.
밤비나타는 한 것이 없는데, 왜 밤비나타한테 고맙다고 말하는지를 물었다.
[player name] 님은 고개를 저으면서 종이에 한 구절을 썼다.
"내일 다시 보러 올게."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player name] 님은 이것이 [player name]의 약속이라고 했다.
그리고 [player name] 님은 떠났다. 대기실에는 또 밤비나타만 남게 됐다.
밤비나타는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기록했기 때문에, 내일의 밤비나타가 이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전 기록엔 밤비나타만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