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백로 소대의 대기실 문 앞에 멈춰 섰을 때 지휘관이 머릿속에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나가는 길에 들러보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백로 소대의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불과 1시간 전의 화면을 열심히 떠올리려고 했지만, 기억은 하늘색 모습의 실루엣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검사요? 뭘... 요?
어제... 명령... 대기요.
다른 건 없어요.
밤비나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는... 거요? 바... 네사...
바네... 주인님. 맞아요. 바네사 주인님.
어제와 마찬가지로 밤비나타는 바네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어제와 비슷해서 그런지 차이가 두드러졌다. 지휘관의 인상에선 어제 밤비나타와 바네사를 이야기했을 때가 오늘보다 반응이 더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단어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도 아니었다.
다시 잊어버렸던 기억들이 다시 뭉쳐서 밤비나타의 눈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됐다. 그리고 그림자가 드리워진 공허의 두 눈이 문밖의 빛을 빌어 지휘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지휘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
바네사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그녀의 책망을 듣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밤비나타의 증상을 말해주자, 바네사가 보기 드물게 침묵하고 있었다.
언어 능력이 손상되는 건 예상했어. 기체 검사도 그것 때문에 예약한 거야.
쳇, 네가 생각보다 좀 더 똑똑한 줄 알았는데.
계속 이렇게 똑똑하고 영리하면, 여기에 세계를 구하는 천재가 한 명 늘겠지?
바네사가 말을 마치자, 통신기 건너편에서 갑자기 강렬한 전류 잡음이 들려온 뒤에 이어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네사의 목소리가 다시 정상으로 회복됐을 때, 그녀의 소리가 많이 작아졌다는 걸 느꼈다. 의도적으로 소리를 낮춘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힘들어.
그리고 마음대로 내 대기실에 들어간 일은 다음에 다시 문책하지.
밤비나타?
방금 전부터 기대 찬 눈빛으로, 지휘관 손에 있는 통신기를 바라보던 밤비나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바네사의 목소리에 성큼 다가왔다.
바네사... 주인님, 밤비나타... 여기 있어요.
이렇게까지 심해진 건가...
야, 너, 밤비나타한테 무슨 짓 한 건 아냐?
그래. 너.
그러면 다행이고.
바네사 주인님...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관계... 좋아요.
친구... 인가요?
아니야!
거의 동시에 지휘관과 바네사는 통신기를 향해 거침없이 부정의 답변을 내뱉었다.
밤비나타는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다는 걸 의식했는지 조용히 문 쪽으로 물러난 뒤 말하지 않았다.
크흠, 됐어. 지금은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밤비나타, 널 비난한 거 아니야.
거기, "착한 수석"?
너... 밤비나타... 검사... 기다...
…………
한바탕 시끄러운 잡음이 들려온 뒤, 통신이 중단됐다.
이것이 바네사가 말했던 "지금은 힘들어"인 것 같았다. 바네사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착한... 수석.
밤비나타가 느닷없이 지휘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바네사가 했던 "비꼼"의 말을 반복했다.
검사... 주인님이 말했어요. 지휘관님이... 밤비나타, 검사요.
밤비나타는 바네사가 지휘관과 함께 기체 검사를 진행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이해한 건 같았다.
……
밤비나타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지휘관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지만, 손에 힘을 주지는 않았다. 나비 한 마리가 지휘관의 몸에 조용히 내려앉은 것 같았다.
착한 수석...
착한... [player name].
그렇게 백로 소대에서 생명의 별 진료실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밤비나타에게 지휘관을 부를 때, 바네사가 사용했던 조롱과 비꼼의 단어를 말하지 말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생명의 별 의사 목소리를 듣고 의식이 현재로 돌아오기 전까지 1시간 전 기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직 의사가 무영등 아래서 손가락 굵기의 튜브를 하나씩 밤비나타의 몸에 꽂았다. 밤비나타는 조용히 병상에 누워 신체에 각종 탐사침과 전선이 꽂히는 걸 기다렸다.
음, 다 됐어요. 그럼 시작할게요.
새끼손가락 굵기의 섬뜩한 빛을 내는 탐사침 하나가 밤비나타의 뒤통수에 연결되자, 감고 있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하늘색 동공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몸도 따라서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주인님... 밤비나타... 아파요.
주인님... 주인님?
밤비나타의 목구멍에서 끊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가볍게 경련하던 주먹도 폈다 쥐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신경망에 직접 자극을 가해야 해서 밤비나타의 지각 시스템을 완전히 끌 수 없어요. 하지만 그녀의 기능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어요.
분명 아플 거예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게 효과 있는 유일한 치료 방법이거든요.
당직 의사는 고개를 젓고 돌아선 뒤, 계속 기기를 조작했다.
주인님... 여기...
밤비나타는 자신을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을 계속 반복했지만, 떨리는 몸은 전혀 안정되지 않았다.
지휘관의 마음속에서 어떤 규칙이 생긴 것처럼, 자신을 비판하면서 재촉했고, 그중 다른 일부분과 대항하고 있었다.
통증으로 인해 경련하고 있는 밤비나타의 손을 잡고 나서야, 지휘관은 그녀의 아픔이 차가운 손끝을 통해 자기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누구든 이런 고난을 당연하게 견뎌야 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휘관은 밤비나타의 고통을 달래주고 싶었고, 그건 자신의 양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밤비나타를 위해 고통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란 걸 깨달았다.
주인님? 주인님...
누군가가 자기 곁에 있는 걸 아는 듯 밤비나타의 중얼거리는 말투가 좀 안정됐다.
지금 말을 걸어봤자, 밤비나타는 들을 수 없어요.
지금 밤비나타가 말하고 있는 건 의식의 바다 깊은 곳의 잠재의식과 같아서 대부분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밤비나타의 상황이 진정된 것을 보고 의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지휘관 옆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일에 몰두하던 날카로운 눈빛도 부드러워졌다.
구조체 치료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런 의식의 바다 문제예요. 그러니 밤비나타도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모르셨나요? 이 기체의 의식의 바다 모형과 기체 모델은 오래된 거예요.
밤비나타가 기억이 상실되고 실어증에 걸리는 건 모두 그녀의 의식의 바다와 관련이 있어요.
의사는 부상당한 기체의 감호 단말기를 지휘관 앞으로 내밀었다. 그 위에는 다양한 색깔의 가는 선들이 뒤엉켜 혼란스럽고 불규칙한 파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뒤쪽은 일정한 리듬을 나타내고 있었다.
밤비나타의 의식의 바다 전기 신호예요. 그녀의 사고 활동이 매우 활발해짐과 동시에 매우 혼란스럽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죠.
이것도 보세요.
의사가 단말기의 다른 화면을 가리켰다. 위에는 심전도와 같은 꺾은 선이 있었지만, 방금 기록 데이터보다 규칙적이었다.
이건 밤비나타의 의식의 바다 활동 주기예요. 보통은 0에 가까운 수치가 되지 않아요.
하지만 최근 밤비나타의 활동 주기는 이렇게 24시간마다 의식의 바다가 0에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어요.
빈 데이터에 덮어쓴 의식의 바다가 이런 수치를 나타내요. 그것도 순수한 공백 데이터로요.
밤비나타의 의식의 바다는 24시간마다 이런 새로운 데이터에 덮이게 돼요. 그러니 그동안의 기억도 자연스럽게 덮이겠죠. 실어증도 이런 덮어쓰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치료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지, 밤비나타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중얼거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증으로 인한 경련은 여전히 지속됐다.
그건 잘 몰라요. 적어도 이 기체는 처음 검사하러 왔을 때부터 이런 문제가 있었어요.
기체 진료는 3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요. 계속 이곳에 있지 않아도 되니 가서 쉬셔도 돼요.
……
그래요. 누군가가 함께 있다면 밤비나타도 마음이 편해질 거예요.
그렇게 30분이 지났을 무렵, 의사가 밤비나타 몸에 꽂았던 튜브를 하나씩 뽑기 시작하자, 지휘관은 저린 손을 놓았다.
기본 인식 테스트를 진행하고, 밤비나타의 언어 능력이 거의 회복했음을 확인한 뒤, 의사는 밤비나타의 진단 보고서를 지휘관에게 내밀었다.
자세한 사항은 보고서에 적었어요. 가셔도 돼요. 전 다른 환자의 진료를 해야 해서요.
의사의 재촉에 진료실을 나와 붐비는 홀을 지난 뒤, 생명의 별 맞은편 거리로 돌아왔다.
생명의 별 가로수길은 해 질 무렵이 됐어도 공중 정원의 다른 거리보다 번화했다. 이런 분주함에 알맞은 기호를 붙이듯 에덴 하늘의 인공 태양을 오후 6시의 노을에 맞게 충실히 연출하게 했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키 차이 나는 두 개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왔던 길바닥에 조용히 붙어있었다.
밤비나타는 여전히 지휘관의 곁에서 묵묵히 걷고 있었다. 진료 검사부터 지금까지 의사의 인지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 외에 그녀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가 더 정확할 것 같다.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손에서 생체공학 코팅의 촉감이 전해졌다.
지휘관의 손을 완전히 잡을 수 없었는지, 밤비나타는 지휘관의 손가락을 살짝 잡았다.
기체를 정비할 때, 지휘관님이 밤비나타의 손을 잡아줬어요.
그래서 지금 밤비나타가 지휘관님의 손을 잡았어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밤비나타의 눈은 여전히 전방의 도로를 보고 있었다.
기체 검사할 때, 바네사 주인님도 밤비나타의 손을 잡아줘요.
그래서 밤비나타도 그 후에 주인님의 손을 잡아줘요.
밤비나타가 의사에게 갈 때면 항상 주인님은 밤비나타를 직접 데리고 갔어요.
주인님은 가끔 의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오늘 [player name](이)가 의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요.
밤비나타가 아플 때면 바네사 주인님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하지만 밤비나타는 매번 아팠어요. 밤비나타는 주인님이 어떻게 밤비나타가 아플 때를 알 수 있는지 잘 몰라요.
아플 때면 바네사 주인님이 밤비나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줘요.
밤비나타는 평온하게 이야기했다. 전에 비하면 지금의 밤비나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린 아이 같았다. 지휘관이 질문한 것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뭔가가 떠오르면 그대로 말해줬다.
지휘관의 상상 속 바네사는 자기 대원을 도구로 생각해서, 다른 사람 앞에서 다정하게 대하는 걸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바네사를 언급할 때, 밤비나타의 말투는 한결 천진난만하고 부드러웠다.
아니요. 밤비나타는 이 일들이 기억나지 않아요.
주인님의 외장 기억 모듈이 없었다면 밤비나타는 이런 기억이 없었을 거예요.
주인님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밤비나타는 이런 일들에 대해 인상이 남아있었어요.
평소엔... 주인님의 외장 기억 모듈이 없어서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주인님은 가끔 밤비나타의 손을 잡거나 밤비나타를 안아주기도 해요.
[player name] 님이 밤비나타의 손을 잡아주고, 의사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그래서 밤비나타는 바네사 주인님도 그렇게 했었다는 걸 기억할 수 있었어요.
외장 기억 모듈. 생명의 별 검사 보고서에도 이런 단어가 있었다.
지휘관이 의사에게 물었을 때, 외장 기억 모듈은 뇌과학 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산물이며, 공중 정원에서 다른 외장 기억 모듈은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바네사는 이렇게 귀중한 장치를 밤비나타에게 줬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장치가 바네사처럼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바네사와 밤비나타의 관계는 지휘관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 같았다.
아마도 지휘관 자신이 아직 밤비나타와 바네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거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잘 알지 못한다"라는 말에는 다른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대방이 지휘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휘관은 영원히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