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오스 군사 학교에서 공중 정원의 대기실로 가는 길은 걸어서 20분 정도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이 거리가 이렇게 길다고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학교의 초대로 연설하러 온 건 이번이 처음인데, 이렇게 친절한 "대접"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나란히 걷고 있던 시몬이 지휘관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지휘관의 표정도 시몬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방금 학교에서 우리에게 건네준 건, 문화 과목에 조예가 깊은 시몬이 난색을 보일 정도로 두툼한 강연 원고와 보고서였다.
전 이번에 처음으로 연설해달라고 초대받았어요.
하지만 지휘관님은 학교의 수석이신데, 이런 보고와 연설엔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졸업 후, 파오스 군사 학교은 매년 졸업식과 입학식 때마다 지휘관에게 연설해달라고 요청했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연설일 뿐, 이렇게 많은 좌담회 및 연구와 보고는 없었다.
전투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지휘관의 사상률도 갈수록 높아지는 지금, 지휘관 육성을 담당하는 파오스 학교의 부담도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아직 공중 정원에 머문 지휘관을 한 명이라도 더 잡아서 신입생과 졸업생들을 동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보낸 주제가 강연의 절반을 차지고 있어요. 이건 초보자한테 너무 가혹한 거 같아요.
그리고 요구가 이렇게나 많은 것이 뭔가, 학교에서 이번 강연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 아니 긴장하는 게 더 적합하겠네요.
오늘 교관님들한테 들었는데, 지금까지 파오스 학교에서 졸업한 지휘관 중, 전장에 나가 전투할 수 있는 사람이 40%가 채 안 된다고 해요.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시몬, 바네사 그리고 도요새의 해리조는 모두 지휘관과 동기 졸업생이며, 나머지 40% 중 하나였다.
아직 임무가 남아 있는 크롬은 학교의 초대를 받지 못했고, 해리조도 공중 정원이 아닌 지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바네사가 보이지 않네요?
백로 소대는 아직 조정 중이겠죠?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바네사를 빠뜨렸을 리가 없잖아요.
돌이켜보면 시몬의 말대로 바네사를 못 본 지가 꽤 됐다. 게다가 오전에 학교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바네사의 성격대로라면 이런 행사에 참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임무 중인 건 아닐까? 시몬과 지휘관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블랙 램 소대의 대기실에 도착할 때까지, 시몬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지휘관은 조금 더 걸어가야 그레이 레이븐 대기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공중 정원이 집행 부대에 분배한 대기실은 대부분 비슷했다. 겉만 보면 모두 옅은 회색을 띤 차가운 분위기의 합금 문과 벽 위엔 신분 인증에 사용되는 보안 시스템이 달려 있었다.
소대의 문마다 소대를 나타내는 명패를 걸어 각 소대를 구별했다. 예를 들면, 블랙 램 소대의 명패에는 블랙 램 훈장이 새겨져 있었고, 백로 소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백로 소대의 문 앞을 지날 때, 우연히 입구에 놓은 장의자에 파일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파일 위에서 생명의 별 표식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파일을 주워서 주인에게 돌려주려 했을 때, 이 파일이 생명의 별 검사 예약 통지서라는 걸 알았다.
밤비나타?
이름 하나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기억을 휘저었다. 꼭 과거에서 현재를 향해 총을 쏜 것 같았고, 그 총알에 스쳐 생긴 피의 미지근함이 같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몇 년 전, 지휘관이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연합 전투에 참여했을 때, 지휘관이 모르는 폭격이 한차례 이뤄진 적이 있었다. 그때 지휘관의 총구는 백로 소대에, 백로 소대의 칼날은 그레이 레이븐을 향했다.
다행히 실제 소대 충돌로 폭발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던 순간이 지휘관에게는 연합 전투에 대한 마지막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지휘관의 목을 겨누고 있던 칼날과 밤비나타의 얼굴이 마지막 인상의 일부가 되어 머릿속 깊이 새겨졌다.
폐허에 묻힌 아픔을 떠올리기 전에 지휘관은 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손에 쥐고 있던 통지서에 돌렸다.
통지서에 적힌 검사 시간은 2일 전이었다. 일반적인 검사 안내와 수검 기체가 해야 하는 준비에 대한 당부 외에도 진료실의 위치와 경로가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바네사가 밤비나타를 위해 예약한 기체 검사인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이곳에 흘렸는지 알 수 없었다.
지휘관과 바네사 사이의 모순은 각자 대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말아야 했다. 하물며 구조체의 기체 건강과 관련된 검사라면 더욱 그럴 것이었다.
다른 소대 일이라고 못 본 척한다면, 자신이 경멸하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백로 소대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휴게실에 아무도 없어서 예약 통지서가 문 앞에 있었던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는 생각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눈앞의 문이 천천히 틈을 벌렸고, 문 너머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문 안쪽 그늘 속에 숨어있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어렴풋이 보이는 하늘색으로 목소리 주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밤비나타 맞아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밤비나타는 여전히 문 뒤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걸 들어서인지 밤비나타의 목소리가 많이 또렷해졌다.
지휘관님?
문틈이 조금 더 벌려졌다. 밤비나타는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처럼 파란 두 눈을 크게 뜨고, 문틈으로 밖에 있는 지휘관을 내다봤다.
그레이... 레이븐? 주인님이 아니네요.
지휘관님이 아니네요... 주인님이 아니에요! 당신은... 대체 누구죠?
바네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밤비나타가 조금 벌렸던 문틈을 다시 원래 크기로 되돌렸고, 전보다 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봤다.
밤비나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휘관은 문틈을 통해 밤비나타가 고개를 젓는 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밤비나타는 지휘관을 계속 경계하고 있었지만, 두 눈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밤비나타의 표현을 통해 바네사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네사 주인님!
하지만 밤비나타는... 주인님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주인님은... 여기에 없어요. 주인님을... 기다려야 해요.
밤비나타는 그 짤막한 한마디 말에서 어떠한 진리를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쓸쓸하게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밤비나타는 자기 신체로 버티고 있던 문을 열고 문 뒤의 그늘에서 마침내 나왔다.
공중 정원이 집행 부대를 위해 마련한 대기실의 구성은 대부분 비슷했다. 필요한 기기 및 시설 이외에 나머지는 전투 소대의 스타일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었다.
백로 소대 작전 대기실은 "바네사 스타일"로 배치되어 있었다.
대기실 안에 있는 다양한 기기와 시설은 모두 "효율 최고 원칙"에 따라 각자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여있는 집행 부대의 규격과 다른 테이블이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들게 했다. 그리고 테이블은 그 위에 놓인 다기 세트처럼 비싸 보였다.
테이블 옆, 문 맞은편의 벽에는 짙은 보라색 넥타이와 끈이 여러 개 걸려 있었고, 넥타이 옆에는 짙은 검은색의 안대 하나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집행 부대 규격의 지휘관 공용 무장이 있었다.
밤비나타 말대로 바네사는 이곳에 없었다.
주인님은 여기에 없어요.
밤비나타는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휘관은 조금 망설인 뒤, 주운 검사 통지서를 밤비나타에게 넘기기로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소대 대원을 데리고 기체 검사를 진행할 수 없는 데다 밤비나타는 바네사의 대원이었다.
바네사 주인님... 검사요?
주인님의 검사? 주인님의... 검사요?
밤비나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휘관을 쳐다봤다. 그 눈동자는 푸른 하늘처럼 맑고, 얇은 얼음처럼 투명했다. 이런 기묘한 차가움은 지휘관의 척추를 타고 몸 곳곳으로 전해져 무의식적으로 몸서리를 살짝 치게 했다.
이것도 명령인가요?
밤비나타는 지휘관이 건넨 검사 통지서를 피한 채, 다시 고개를 저었다.
바네사 주인님이 어제 내린 명령은 대기에요.
어제였어요! 바네사 주인님이 여길 떠나기 전에 그렇게 말했어요.
밤비나타는 그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제가 맞아요.
밤비나타의 기억은 어제에 계속 머물러 있었고, 주인이 내린 마지막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밤비나타가 지휘관의 말을 귀담아들을 것 같지 않았다. 멍하니 고개만 숙인 채로 밤비나타는 고개를 들어 지휘관을 보려 하지 않았다.
네.
밤비나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천장 등의 희미한 빛으로 밤비나타의 앳된 얼굴 윤곽만 볼 수 있었다.
밤비나타가 지휘관이 건넨 검사 통지서를 받을 때, 입이 조금 뻐끔거리는 것 같았는데, 그늘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지휘관은 불빛에 가려져 있던 그 모습을 떠날 때까지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시선 속 마지막 모습은 차가운 빛과 시간 속에 새겨진 밤비나타의 실루엣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