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은 남온고성에 머무르면서 마을 주민들과도 점점 친해졌다.
외부인의 발길이 끊긴 남온고성은 외딴섬 같은 마을이 되었고, 공중 정원 일행의 등장은 순식간에 주민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특히 그들이 머문 진료소는 매일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마을에선 그 구조체 의사가 어떤 난치병도 치료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가끔은 끌려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눠야 할 때도 있었지만, 남온에서의 시간은 대체로 평온하게 흘러갔다.
또 다른 평범한 저녁, 둘은 진료소에서 최근의 진료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을의 적은 인구로 환자 수가 많지 않아, 업무는 이전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시간이 늦었네, 어서 가서 쉬게나.
진료소의 소장인 중경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손녀의 부축을 받아 가며 들어왔다.
정말 수고가 많네. 도와주러 온 자네들에게 이렇게 고생만 시키니 미안하구려.
음, 오늘 진료 기록은 정리는 거의 끝났어. 늦었으니 너도 어서 쉬어.
지휘관님.
완이가 조용히 지휘관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할아버지께 주무시라고 했는데, 이쪽에 불이 켜진 것을 보시고 일어나신 거예요.
두 분이 쉬시지 않으면, 할아버지도 안 주무실 거예요.
말하면서 완이는 허벅지를 긁적였다. 뭔가 가려움과 통증이 있어 보였다.
지휘관은 완이의 다리 상태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금속 의족을 하고 있었고, 최근 산속에 비가 많이 와서 그 부위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중경이 지휘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완이는 마을 근처에서 야수의 공격으로 다리를 심하게 다쳤지. 목숨을 구하려면 다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네.
중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퍼니싱이 폭발할 때 완이의 부모를 구하지 못했는데, 이런 일까지 당하게 했으니 모두 내 잘못이네.
할아버지, 그건 오래전 일이에요. 전 기억도 없고, 할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요.
지금 이대로도 전 만족해요.
완이야.
저도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요.
반즈가 깔끔한 필체로 작성된 검진표를 건넸다.
완이를 검진해 봤는데, 후유증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도 전혀 문제가 없어. 그럼 그 수술이 성공적이었다는 거 아닐까?
의술의 발전은 더 많은 이들을 돕기 위한 거지, 족쇄를 채우기 위한 게 아니야. 누구도 완벽할 순 없어.
"건강"이란 건 어떤 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완이는 이제 다 컸고, 의족을 싫어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완이의 말도 들어봐.
중경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문제없다니 다행이구나.
나이가 들어 매일 같은 소리만 하고 있었구나.
할아버지는 걱정이 너무 많으세요!
백발의 노인이 어린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과 감동이 어려 있었다.
잠시 후, 중경의 시선이 다시 두 손님에게로 향했다.
이제 알겠소. 반즈 선생과 지휘관은 계속 내게 조언을 줬던 것이었구려.
진료소를 위해 큰 도움을 주어 정말 고맙네. 마침 모레가 우화절이니 내일부터는 편히 쉬게. 진료소 일은 우리에게 맡기게나.
우화절! 저도 가고 싶어요! 반즈 선생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두 분과 함께 장대 오르기에 참가하면, 아이들에게도 상품을 준다고 옆집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두 분은 사이가 좋으니까 분명 일등 할 거예요!
반즈가 완이의 입에 사탕을 넣어 마저 하려던 말을 끊었다.
재밌게 놀다 오게. 우화절 전후로 마을에 즐길 거리가 많으니 마음 놓고 즐기게나.
할아버지와 손녀는 그들과 잠시 더 우화절 이야기를 나누고 먼저 쉬러 갔다.
……
지휘관이 반즈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반즈의 표정에 지휘관은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어때, 지휘관? 내일 같이 가볼래?
……
하암~
지휘관과 시선이 마주친 반즈가 2초 후에 하품을 했다.
흠,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먼저 쉬고 내일 계속 얘기할까?
너무나 진짜 같은 반즈의 하품에 지휘관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로 피곤한 걸 수도 있었다.
반즈는 정리가 끝난 진료 기록들을 책상 위의 등나무 바구니에 가지런히 넣은 후, 지휘관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 자.
지휘관은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한 밤을 보냈다. 그렇게 아침에 방을 나서며 새의 노래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반즈의 상태도 좋아 보였다.
진료소를 나와 둘러보니 고성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가장자리에는 퍼니싱의 침식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무너진 담장 대부분에 이끼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과 작업용 로봇들이 폐허에서 무너진 담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우화절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모양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시간이 유독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사람들은 소박한 옷차림에도 표정에 여유로움이 넘쳐흘렀고, 대화에서는 불안이나 초조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초목은 다시 푸르게 자라났고, 사람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일구었다. 그렇게 재난은 먼 기억이 되어있었다.
우화절은 이곳의 전통 기념일이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 됨을 기리는 날이지.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던 축제였지만, 퍼니싱의 폭발 이후 몇 년간 이어지지 못했어.
최근 몇 년간 마을 주민들이 전통을 지키고자 애써왔지만, 여러 어려움에 부딪혀 예전만 한 규모를 되찾지 못했어. 하지만 올해는 제법 성대한 것 같아.
마을 광장에 도착하자, 중앙의 기둥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름칠 된 높다란 나무 기둥의 용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화간"이라고 해.
축제 당일에 마을 주민들이 화간에 기름을 바르고, 꼭대기에 꽃 장식을 달아놓을 거야.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제일 먼저 그걸 가져오는 사람이 우승하는 방식이지.
그래서 나 같은 의사를 대기시키는 건가 봐.
재밌을 것 같긴 한데, 누가 실수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좋겠어.
반즈가 눈을 감고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뭐가 떠오르기라도 한 건지 곧이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주민 모두가 이 행사를 기대하고 있어. 완이랑 다른 아이들도 무척 들뜬 것 같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넘어, "마을 전체의 화합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 이 풍습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몰라.
의사의 입장에서는 그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
음, 교외에 설치해둔 임시 주둔지에 거의 다 왔어.
무성한 풀을 헤치며 앞장선 반즈가 미끄러운 흙길을 뒤따라오는 지휘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휘관한테는 험한 길이 아닌 걸 알지만, 그 환각 물질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니 발밑을 조심해.
아니면, 내 손이라도 잡을래?
하지만 말과는 달리, 반즈는 지휘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손을 잡아버렸다.
반즈는 고성의 가장자리에 있는 숲속에 간단한 군용 텐트를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텐트 바깥의 나무 선반에는 이름 모를 풀들을 말리고 있었다.
최근에 산에서 따온 약초들이야. 과학 이사회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마. 또 함부로 먹을까 봐 걱정되네.
반즈가 말린 흑녹색 잎 몇 장을 약봉지에 넣었다.
며칠 전부터 진료소의 고서를 보면서, 해독과 안정 효과가 있는 약초들을 채집하고 있었어. 이 약초들이 제일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
좀 있다가 내가 달여줄게.
만약을 대비하자는 거지.
구조체가 "휴대용" 주머니에서 접이식 포트를 꺼내, 옆 개울에서 물을 떠와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쌉싸래한 향이 숲의 바람을 타고 코끝에 닿았다. 그러자 반즈가 우려낸 약재를 정성스레 거른 뒤, 또 어디선가 꺼낸 작은 도자기 그릇에 조심스레 따랐다.
자, 마셔. 온도도 딱 적당해.
반즈가 도자기 그릇을 건네자 지휘관은 향을 맡아보더니, 짧은 망설임 끝에 결국 그릇을 받았다.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고, 그 이상한 맛은 좀처럼 입안에서 가시지 않았다.
반즈가 어딘가에서 각설탕을 꺼내 지휘관에게 건넸다.
너무 쓰면 이걸 먹어. 더 주고 싶어도 약효가 떨어질 수 있으니 이 정도만 줄게.
지휘관과 반즈가 간이 텐트 밖으로 나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공기 중엔 아직도 쓴 약의 향이 감돌았지만, 평온함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햇빛 아래서 눈을 감고 있는 반즈는 더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휴, 세상과 동떨어져서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평온한 삶을 사는 것 같네.
음, 아직 조금 부족해.
퍼니싱과 침식체만 없으면 더 좋을 텐데.
움직이지 마.
어느새 눈을 뜬 반즈가 순식간에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휘관의 뒤편을 향해 두 번 연속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뒤편에서 침식체의 괴성이 들려왔고, 다시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숲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이제 됐어.
지휘관이 망설임 없이 반즈의 뒤에 나타난 또 다른 침식체를 처치했다.
고마워. 이곳은 이상한 자기장 때문에 전자 장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그래서 행동할 때 더 조심해야 해.
맞아. 남온고성 외곽에 나타나는 침식체들을 처리하게 내 임무야.
뒷산은 상황이 복잡한 데다, 이 구역의 침식체들도 움직임을 예측하기 어려워. 게다가 진료소 일도 신경 써야 하고, 우화절마저 다가오고 있어.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남온에 남게 된 거야.
몇 마리 안 남았어.
그날 네가 과학 이사회 사람들이랑 산속을 몇 바퀴나 돌아다녔잖아. 덕분에 침식체들이 너희한테 끌려서 한곳에 모여있더라고.
어떻게 보면 도움이 됐지.
반즈가 일어나서 장비를 점검했다.
내일이 우화절이니까, 남아있는 "불안정 요소"들을 모두 처리하고 올게.
주변의 여과 장치도 한 번 더 정비해야겠어.
약재 정리를 마친 둘은 산길을 따라 이동하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침식체들을 "소탕"해 나갔다.
이곳은 퍼니싱 중도 재난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최근 몇 년간 모여든 침식체들은 그저 "잡졸"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수가 많아지면, 처리하는 데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
탕.
인간이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겨 소형 침식체의 코어를 정확히 관통했다. 침식체는 짧은 비명을 몇 번 내지르더니, 힘없이 그루터기에 쓰러졌다.
수고했어. 침식체는 모두 처리한 것 같네.
저쪽에 있는 간이 여과 장치도 점검했는데 문제없어. 제작자의 실력이 엄청난 것 같더라고. 거기에 내가 작은 업그레이드도 해뒀어.
반즈가 총구를 불어 연기를 흩트렸다. 그렇게 침식체들은 둘의 발밑에 무력하게 쓰러졌고, 더 이상의 위협은 되지 않았다.
휴... 축제 중에 침식체들이 쳐들어오는 건 나도 정말 피하고 싶어. 안 그러면 한동안은 잠도 편히 못 잘 거야.
반즈가 묘사한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자, 지휘관 눈앞의 사물들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응? 왜 그래?
빠르게 지휘관의 상태를 눈치챈 반즈가 그에게 달려갔다.
지휘관은 눈앞의 하얀 구조체가 두 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왜 그래? 방금 먹은 약이 효과가 없었어?
[player name]?!
지휘관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익숙한 느낌과 함께, 의식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밀려오는 졸음에 무너지려던 그때, 따뜻한 품이 지휘관을 감싸안았다.
사고와 감각이 모두 어둠에 삼켜졌다. 지휘관은 그렇게 달콤한 꿈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