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Affection / 베라·작망·그중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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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작망·그중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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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빛이 번쩍인 뒤, 눈앞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소박한 마을도, 어두운 마왕의 성도 없었다.

세계관 자체가 뒤틀린 것처럼, 눈앞에 조그마한 방이 나타났고, 침대 머리맡의 달력을 보니,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퍼니싱이 폭발하기 전의 시간대로 온 것이다.

??

여긴, 배드엔딩이야.

등 뒤에서 문득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돌리자,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곁에 서 있었다. 빨간 머리를 가진... 순한 아이였다.

내가 잘못했어.

빨간 머리 소녀는 품에 안고 있던 강아지 인형을 바닥에 던져버렸고, 지휘관의 존재는 무시한 채, 조용히 그 소박한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귀를 꼭 막았다.

너도 어서 숨어, 들키면 혼나니까.

???

그 재수 없는 애를 데려오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결국 문제가 생겼어! 당장 내보내!

우리 언니의 아이라고! 이젠 가족도 없어! 어디로 가라는 건데? 설마 고아원으로 보내라고?!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건가?! 어디로 가든 상관없으니, 당장 저 아이를 내쫓으라고!

쨍그랑——

컵과 접시가 연달아 깨지는 소리가 터졌고, 곧이어 누군가 바닥에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주먹이 사람 몸에 박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들려? 바로 이런 거야.

이모는 날 데려갈 수 없어. 내가 엄마 아빠의 돈을 죄다 그 남자에게 주었지만, 이모는 날 데려갈 수 없어.

그는 떨리는 몸으로 무릎을 꿇고, 하얗게 바랜 작은 이불을 들춰보려 했지만, 그 안의 아이는 이불을 고치처럼 삼고,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건 잘못된 길이었어.

이불 안의 아이는 갑자기 힘을 풀었고, 지휘관은 반동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퉁!

지휘관은 창백한 병실 속으로 떨어졌고,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이 손바닥을 찔러 그곳에서 【??】이 흘러나왔다.

가장 먼저 귀에 들려온 건, 목소리가 쉰 노인이 터뜨린 웃음소리였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보라고... 인간의 야망은 결국 이런 결말을 부르는 거야.

네 날카로움도, 이 비극적인 결말 앞에선 무기력하게 부서질 수밖에 없지. 바로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헤인스!!

퍽!

몇 초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헤인스는 칼로 베라의 하얀 셔츠를 찔렀고, 칼끝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와 헤인스와 지휘관의 얼굴에 튀었고, 곧 들이닥친 눈바람에 식어갔다.

...

이번에 헤인스의 칼날은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광기에 휩싸인 듯, 자신을 옮기려던 베라에게 칼끝을 겨누었다.

컥...

지휘관은 달려들어 베라의 가슴에 난 상처를 막아보려 했지만, 피는 여전히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눈이 너무나도 두텁게 쏟아졌고, 베라의 곁에는 새하얀 애도의 꽃과도 같은 눈이 쌓였다. 핏물은 희석되어, 분홍빛 얼음으로 얼어붙었다.

그녀가 말했었지, 이건 배드 엔딩이라고, 이것도 역시 <b>이 베라</b>의 이야기거든.

아... 네 말이 맞았어. 배드 엔딩의 그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지, 이렇게 말이야...

펑!

총알 한 발이 문을 뚫고 들어와, 정확히 헤인스의 관자놀이를 꿰뚫었고, 그는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핏방울과 누런 뇌수가 인간의 몸에 튀었다.

그러나 헤인스는 눈을 감지 않았고, 넘어지는 순간까지 위태로운 베라를 바라보았는데, 마치 그녀의 배드 엔딩을 꼭 지켜보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무장한 병사들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베라를 준비된 병상 위로 급히 실어갔다.

그 칼이 심장을 관통했어! 밖의 미쳐버린 기계체들이 아직도 사람을 공격하고 있어! 지금 조건으로는 도저히 구조하기 힘들다고!

아니... 아니야! 방법이 있어! 당신들도 그걸 알고 있잖아! 제발... 그녀에게 그 수단을 써보자고…!

구조체 개조!

밖의 세계가 진짜인지, 아니면 이 ‘배드엔딩’이야말로 진짜인지, 더 이상 분간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고, 그 누구도 구석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휘관은 임시로 급하게 조립된 수술대 옆에 멍하니 서서, 구조체 개조의 전 과정을 지켜봐야만 했다.

2160년, 베라는 조금 더 일찍 개조를 받게 되었다.

그다음은 무엇일까?

이후의 운명은 그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매번 유사한 후회만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지상군 시절, ‘구태의연한 얼굴’ 앞에서 괴려는 스스로 팔을 뜯어냈다.

쿠로노에 가입한 이후, 동료였던 ‘허밍버드’는 그녀의 왼쪽 눈의 시각 모듈을 뚫어버렸다.

쿠로노를 떠나, 비요 기체로 교체한 뒤에도 불운의 굴레는 끝나지 않았다.

비요는 로이드의 눈부신 거짓을 끝장냈지만, 오히려 그 찬란함에 충성하던 이들에 의해 이렇게 불렸다—

"붉은 머리 사신"

그래. 이렇게 역겨운 장면들로, 이야기를 되돌릴 수 없는 ‘배드 엔딩’으로 끌고 가기엔 부족하지.

하지만 ‘배드 엔딩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우리가 먼저 짚어야 할 훨씬 중요한 지점이 있어.

그건 바로... 이야기의 결말을 ‘배드 엔딩’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조건이지, 대체 어떤 조건일까?

이제까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너도 답을 알고 있잖아. 솔직히 인정해도 돼.

촤아아——

거대한 파도가 마왕 베라의 ‘의식의 바다’로 밀려들며, 그곳에 남겨졌던 두 사람을 더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끌고 갔다.

바로 너였어, 지휘관.

파도에 휩쓸린 뒤 드러난 건... 승격자와의 전투가 끝난 "옥상"이었다.

그날 아침의 희미한 햇살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인간의 피부를 찢었고, 베라는 이를 악물고 있었으며, 그녀의 입가로 순환액이 흐르고 있었다.

인간의 피와 구조체의 순환액은 그 자리에서 뒤섞였고, 그 순간 아무런 구별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현실을 똑똑히 마주했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베라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일어날 거야?

베라

지금 이 지경인데 아직도 그럴듯한 말이나 하고... 통제 불능이 된 구조체 따위, 남겨둘 이유가 있어?

차라리 일찍 연결을 끊었다면, 이런 고생은 안 했겠지... 너도 많이 아프지? 꼴 좋네...

지휘관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베라의 입가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녀의 입술 가장자리에서 흐르던 핏물이, 그 심하게 상처 입은 손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고, 떨리는 손으로, 베라의 두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숨결이 오르내릴 때마다 그의 가슴팍에서도 붉은 피가 실개천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베라

...!

베라

내가...

가자... 널 데리고 떠날 거야!!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작망 기체의 폭주는 끔찍한 손실을 불러왔다. 그녀는 임시 임무에 투입됐던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결국 "삼키고" 말았다.

베라

난... 네가 살아남기 바랐던 건데...

베라

하...

내 잘못이야.

이게 바로 이야기의 전환점이었어, 내가 너에게 재앙까지 안겨버렸던 거라고.

그 이후 이야기는 지루할 정도로 뻔해. 굳이 곱씹지 않아도 돼, 그냥 내가 직접 말해줄게.

베라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실행 부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어—"로이드"라 자칭한 승격자를 상대한 후, 작망 기체가 폭주했고... 난 공중 정원의 가장 중요한 지휘관 중 한 명을 죽였어.

베라

그레이 레이븐 쪽에 무슨 사고가 생긴 것 같았는데, 더 자세한 건 나도 알 수 없었어. 쿠로노와 공중 정원 의회 사이에서 계속 저울질만 하다가, 나에게 내릴 처분을 결정하지 못했거든.

베라

나는 오랫동안 심판을 기다렸고, 케르베로스 대원은 전부 교체됐어. 다른 부대의 익숙한 얼굴들도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지.

나중에야 알았어. 공중정원은 새로운 재앙을 막기 위해 너무 바빠서, 나한테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단 걸.

그때 우리는 유전자 저장소 안의 이상한 이합생물을 막지 못했어. 재앙은 바닷물처럼 퍼져나갔고... 너를 동경하던 그 ‘이브’가 선봉에 섰지.

그 이합생물들은 곧 연약한 인간들을 완전히 대체했어.

베라

말하자면, 재앙은 세상을 무차별하게 무너뜨렸고, ‘신세계’엔 더는 인간이 기어올라 피신할 나무조차 없었지.

베라

그리고 나중엔… 상황이 너무 급박해져서 내 과오쯤은 그냥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 됐지. 결국 그들은 날 풀어줬고, 작망 기체를 마음껏 쓰게 했어. 전투에 참여해서 적을 최대한 많이 죽일 수 있다면 충분했던 거야.

베라

근데, 그럴 기회 따윈 없었지... 하하.

베라

케르베로스의 옛 대원들은 전원 전사했고, 머레이도 죽었어.

넌 이미 그 전에 세상을 떠났고... 마지막 몇 년 동안, 내가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사라졌어.

베라는 차분히 그 이름들을 읊었다. 명단에 빽빽하게 기록된 것은 전부 희생자들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 생긴 '원숭이들', 그리니까 그 이합 생물들 말이야.

베라는 이에 코웃음을 쳤다.

쳇, 이합 생물들은 자신들의 모체인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본떠서 여태 갈망했던 인간 모습으로 진화했고, 만신창이가 된 이 지구에서 "정착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지.

가끔 그놈들이 진지하게 네가 가졌던 감정을 흉내 내는 걸 보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역겹게 변했는지 절실하게 느꼈어.

내가 분노하고, 증오하고, 원망했기 때문에 난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거야.

난 세상의 외진 구석에서 기나긴 세월을 싸웠고, 내 몸을 불태우는 건 멈출 줄 모르는 증오였지.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오늘에 이르렀어.

그게 바로 "마왕"이 탄생한 이유야... 난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구조체고, 불행하게도 마지막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

인류의 모든 문명은 모두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몸에 담겨 있어.

마왕의 의식의 바다 속에서, "인간"이자 "용사"인 그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설마 이게 아무렇게 작성한 삼류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전혀 그렇지 않아. 이건 운명의 작가가 미쳐서, 너만을 위해 쓴 어둠의 동화라고.

베라는 손을 뻗어, 검게 물든 손끝으로 '용사'의 미간을 가볍게 짚었다.

이형 생물들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인류 시대'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온갖 수단을 썼어. 그러다 마침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지.

그들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운명의 아이'라고 하며, 온갖 황당한 설정을 덕지덕지 붙였지...

그리고 결국, "마왕"의 성으로 보낸 거야.

그들은 잘 알고 있거든. 네가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최고의 검"이란걸.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렇게 "의식 연결"을 모방하는 것도, 내가 퍼니싱에 몸을 담은 결과에 불과하지.

그래. "그림자", "장미의 저주"... 전부 날 죽이기 위한 최종 통보였어. 다만 그 최종 통보가 오기 전까지, 내가 몇백 년을 버텨낸 거고.

아니, 그 둘은 아닌데. 몰라보겠어? 시끄럽게 구는 그 두 녀석을 본떠서 만든 인형인데.

하루하루가 너무 지루한데, 이런 재미라도 찾아봐야지, 안 그래?

쉿.

베라는 손가락으로 용사의 입술을 살짝 막으며, 자신의 몸에 퍼지고 있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너랑 계속 수다 떨다간, 진짜 퍼니싱에 몸을 담글 것 같아. 아무리 <b>너</b>의 인형이라 하지만... 결국은 내 기분이 최우선인걸.

게다가 널 감시하고 있는 놈이 슬슬 조급해진 모양이군.

시스템

경고, 경고, 경고, 목표 추적 이상 발생.

시스템의 경고음이 적절한 타이밍에 용사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다 들려줬으니, 장난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자, 꼬마 인형.

지금 네 마을로 돌아가 용사의 여정을 계속하는 건 어때?

마왕은 자신의 손을 용사의 가슴에 얹은 뒤, 살짝 밀어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