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 살고 싶은 거지?
내가 너한테 이 말을 한 이상,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빛이 보였다.
부드러운 빛이 아닌 눈동자가 콕콕 쑤실 정도로…… 강한 빛이었다.
빛이 흩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형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베라의 얼굴이었다.
어, [player name], 깼어?
동공 상태를 보니 정신은 차린 것 같네. 조금 더 장난을 쳐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이 상황에서도 그걸 묻다니. 회복이 잘 되고 있나 보네.
어디 보자. 사실 넌 이미 죽었어. 여긴 천국이고, 어때?
하하하하, 참 운도 없지. 천국에 천사가 아닌 사신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베라는 웃으며 침대 옆으로 다가와 내 곁에 앉더니 날 힐끗 내려다보았다.
말했잖아? 여긴 천국이라고.
어휴, 표정 참 재미없네. 됐어, 여긴 의료 텐트야. 전에 수십 명이 누워있던 곳이지만 이제 남은 건 너뿐이지.
네가 깨어나기 전에 수십 명에 둘러싸여 있었어. 하지만 내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전부 내보냈지.
그녀의 말에 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제야 내 침대 주위에 발자국이 가득한 걸 발견했다.
발자국 흔적은 침대를 쭉 둘러싼 상태였고 머리맡에는 작은 들꽃 몇 송이가 놓여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침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수십 송이가 더 놓여있었다.
이 보육 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건 관심을 표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세균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베라가 한쪽으로 쫓아버렸지만.
인기가 대단하던데?
안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네 걱정을 많이들 해주네? 하, 공중 정원에서는 보기 드문 "순박한" 사람들이지.
그래?
베라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았다.
그 약을 왜 쓰지 않았던 거야?
갑자기 그녀는 손가락을 내리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 강심제 말이야.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그 주위에는 온통 폐기된 구조체들이었어. 그중에서 꺼낸 약물로 살 수 있었다면 좋은 거래 아니야?
만약 강심제를 사용하기로 선택했다면, 비명을 꽥꽥 지를 만큼 큰 수술을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테고 바보처럼 침대 위에 누워있지도 않았겠지.
하…… 그걸 정말 믿었던 거야?
베라는 고개를 들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얼굴에 장난기가 피어올랐다.
인간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약물이라면, 인간이 직접 가지고 있겠지 구조체의 몸에 숨겨두겠어?
의사들은 바보가 아니야. 그런 약물이 정말 있다면 어느 의사가 이 사실을 숨기겠어? 그런 게 비밀로 유지될 리가 없지.
전장에서 후방 지원을 하는 의사가 '망자의 존엄'을 위해 사람을 구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아마 바로 부대에서 쫓겨날 거야.
하…… 아주 똑똑하네.
맞다. 진작 생각했어야 했다.
인간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약물이라면, 인간이 직접 가지고 있었겠지. 구조체의 몸에 숨겨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전장은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는 곳. 인간을 기사회생 시킬 수 있는 기술이 정말 있다면 진작 소문이 쫙 퍼졌을 것이다. 구조체 기술이 이토록 발전한 지금까지 비밀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역판막 강심제는 그냥 농담일 뿐이야. 너한테 보여줬던 것들도 사실 여기 사는 사람들이 준 작은 선물이지. 단체를 상징하는 장식품인 것 같던데? 하, 액체가 들어간 장신구라니. 꽤 로맨틱하네.
그러게. 왜지?
전장에서 최선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무엇인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길 비는 모습이 멍청하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지.
속임 당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장단 좀 맞추고자 지루한 이야기 좀 들려줬을 뿐이야. 뭐 문제 있어?
으흠, 어떨 것 같아? 고민이 가득한 그 표정을 보니 장난을 친 보람이 있는데? 재미있었어.
하지만 네 반응이 그렇게 재미없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생명이 위급한 순간, 그 약물을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기대했는데 말이야.
하, 난 네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아. 넌 [player name], 공중 정원의 "수석" 지휘관이니까.
베라는 두 손에 힘을 풀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전처럼 그렇게 오버스럽지 않았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보육 구역에서 연기하던 그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내가 뜬금없이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베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곧이어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가 널 살렸겠지.
멍청한 희망을 심어주었으니 내가 구해줘야지.
네가 어디에 있든 수술이 얼마나 복잡하든 수술을 받는 도중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든 난 널 살려낼 거야.
물론 그 약물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함부로 나섰다면, 내가 먼저 널 죽였겠지. 멋대로 구는 자식은 필요 없으니까.
말을 마친 베라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자신의 목에 가로로 선을 그었다.
그녀는 마치 맹세를 하는 의사처럼 단호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고 고고했으며 차마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이것이 바로 베라의 가장 본질적이고 진지한 생각이었다. 아니, 평소에도 그녀는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왔다. 단지 장미처럼 아름다운 마음 주위에 거친 가시가 돋아 다가갈 수 없었을 뿐.
그리고 지금 난 한참을 더듬거리다 가시 밑에 있는 꽃줄기를 건드린 듯한 기분이었다.
왜……? 무서워? 그럼 지금부터 임무가 끝나기 전까지 그냥 여기 누워있어. 또 죽으면 어쩌려고. 그 큰 녀석을 해결한 이상 이제 네가 참견할 일도 없을 테니까.
어차피 이번 임무만 끝나면 넌 다시 평화롭고 사이좋은 소대로 돌아가겠지. 이 비밀은 너처럼 바보 같은 구조체들에게 공유하라고.
아, 실수로 말해 버렸네?
베라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또 그 장난기 넘치는 미소였다. 정말 실수로 말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내 질문을 유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야기를 지어낸 이상 여러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게 당연한 법이지.
네가 그 이야기를 들은 몇 번째 지휘관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하지만 너 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지휘관들 중 살아남은 이는 한 명도 없——진 않고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있어.
하지만 다들 너처럼 반응이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어.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을 만큼.
하…… 그들은 모두 그 이야기에 대해 잊어버리는 것을 선택했지.
내가 무서웠던 건지 말을 듣고 다들 우물쭈물하더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사용하지도 않겠다고 했지.
그 자식들은 계속 이 비밀을 숨기고 있었고, 작전에서 위험한 상황에 마주쳤을 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 그래서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거지. 하, 멍청하긴.
이유라면…… 하하하, 그 자식들 중 여럿이 네 이름을 언급하더라고.
리더십이 아주 뛰어나던데? 네가 저 녀석들의 "깃발"이라고 봐야 하나?
흥, 하긴. 멍청하고 재미없지만 나쁘진 않아.
하지만 재미는 많이 떨어지겠어.
철컥. 침대가 내려가고 상반신이 급격히 아래로 내려갔다. 잠깐 동안 어지럽더니 어두운 불빛에 베라의 그림자가 내 얼굴 위에 드리웠다.
내 재미를 빼앗아갔으니, 너한테서 그만한 재미를 다시 찾아내는 게 맞겠지? 어때, 지휘관들의 멍청한 "깃발"의 생각은?
좋아, 이제 환자는 쉬어야 할 시간이지. 내일 일어나기 전까지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해. 함부로 움직이지도 마.
물론 여긴 너한테 쓸 마취제 같은 건 없어.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둬. 존경하는 지휘관님~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머리카락의 촉감과 의료기기의 냄새가 대뇌를 자극했다.
곧이어 어지러움이 느껴지더니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