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가 다시 텐트에 방문했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고 어색한 자세로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었다. 평소 그녀의 언행과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어, [player name], 일찍 일어났네?
내가 들어온 걸 본 베라는 마침 머리를 묶고 있던 손을 풀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자연스레 흘러내렸다.
기운이 넘치는 걸 보니 어렵게 얻은 휴가를 계속 침대 위에서 보내고 싶은가 봐?
베라 말대로 대형 침식체를 제거한 뒤로 이곳의 위협도 많이 줄어들었다. 정비 부대와 집행 부대의 인력도 충분해졌고 그 덕에 임무가 끝나기 전 오랜만에 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휴가 첫 번째 날에 난 베라의 텐트로 향했고, 마침 잠을 자려는 그녀와 마주쳤다.
아, 그리고.
베라가 커다란 꽃다발을 던졌고, 이에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앞으로 이런 거 주지 마.
들꽃 꽃다발이었다. 사실 이건 여기 주민들이 준 선물이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상처를 회복하고 있을 때 침대 머리맡을 가득 채웠었고, 그중에는 구조체가 준 선물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선물은 내가 아닌 베라를 위한 것이었다.
난 그저 베라가 없는 틈을 타 몰래 꽃다발을 그녀 자리에 놓고 갔을 뿐이었다.
말했었지. 이 사람들을 구하고 이들을 도와 적을 물리친 이유는 단지 상부에서 내린 임무이기 때문이라고.
그 사람들이 퍼니싱이나 다른 이유로 죽었다고 해도 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부검을 진행할 거야. 시체를 침식체보다 더 잘게 깨부술 거라고.
그러니까 나한테 이런 거 주지 마.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나는 대답과 동시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살짝 던졌다.
난 베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들고 있던 꽃다발을 살짝 던졌다.
예상대로 꽃잎이 하늘에서 흩어지면서 꽃줄기와 함께 떨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랑 장난하는 거야? 죽다 살아나더니 머리가 어찌 되기라도 한 거야? 왜 이렇게 유치해?
임무도 곧 끝날 테고 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안 쓰려고.
처음에는 귀찮은 일을 덜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런 모습으로 연기했었는데. 하, 넌 보육 구역에 있는 자식들보다 훨씬 더 귀찮아.
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 그동안 널 보러 오는 사람들 전부 내가 쫓아버렸으니까. 지금 나가면 나에 대해 불만이 많을 거야.
내가 떠나고 만약 네가 죽어버리면, 그 책임을 나한테 있는 거잖아. 니콜라가 알면 화병으로 죽어버릴지도 몰라.
풉, 그런데 그것도 나름 재미있겠네. 그냥 지금 죽는 건 어때?
……
내가 말을 하는 순간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베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비록 구조체는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고 위 통증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상한 맛이 나는 10가지 독창적인 요리를 먹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좀 더 누워있는 게 좋겠네.
하, 오늘은 기분도 좋으니까 재밌는 건 남겨두고 다음에 즐겨야겠어.
목숨은 건졌으니 얼른 꺼져. 가서 휴가나 즐기라고.
내가? 내가 왜? 내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침식체를 보듯이 날 쳐다볼 텐데. 그리고 지휘관이 대단하다고 말하겠지? 재밌긴 할 것 같은데 됐어.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나보다 더 심각한 악취미를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
순간 베라의 눈썹이 어색하게 올라갔고 독설만 내뱉던 입도 잠깐 멈추었다.
지금 복수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한 순간일 뿐이었다. 1초가 흐르고 아니 1초가 흐르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평소와 같은 차가운 표정을 회복했다.
내가 어떤 대접을 받든 딱히 상관없어. 이미 익숙해졌고 굳이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player name]. 너 이 자식, 잘도 그런 짓을 하다니.
복수를 하려는 거야? 그냥 괴롭히고 싶은 거야? 아니면——
베라의 말투는 살짝 누그러졌지만 곧 다시 위협적으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제 너도 내가 무서워진 거야?
그녀는 며칠 동안 텐트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기창을 들었다.
기창의 뾰족한 끝이 날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창의 방향에 따라 난 아직 채 낫지 않은 육체를 이끌고 기창이 만든 틈새를 향해 이동했다.
위로 한 번, 밑으로 두 번 그리고 중간 공격. 예전이었다면 그녀의 창에 의해 계속 물러났겠지만 이제 익숙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난 상대방이 어떻게 공격할지 진작 예상하고 있었다. 마치 가시가 달린 장미와 오랫동안 춤을 춘 파트너처럼 난 이미 장미의 가시를 피해 그것의 공격에 협조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 상태였다.
기창의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에 창 손잡이를 잡았다.
으응?
내가 기창을 잡는 순간 그 아름다운 얼굴에 보기 드문 놀라움이 비쳤다.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어? 나쁘지 않네?
그렇다. 여러차례 합동 전투를 거쳐 난 베라가 싸우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그녀는 거칠고 능동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해도 협조도 바라지 않는 것과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사실 그녀의 작전 방식은 결코 엉망진창, 제멋대로가 아니었다.
장미 위에는 가시가 달려있지만 빈틈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다면 언젠가 꽃줄기에 닿을 수 있다.
아? 그래?
베라는 흠칫하다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기창을 홱 잡아당긴 순간 내 몸 전체가 그녀에게 쏠렸다.
그럼 이런 것도 예상했어?
내가 쓰러지는 방향에 따라 움직이던 베라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보니…… 이해한다 해도 예상치 못한 가시에 찔릴 가능성은 충분한 것 같았다.
전에 여기서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위로했었지? 그때 참 프로답게 잘 한다고 생각했어.
어디 네가 얼마나 프로다운지 확인해 볼까?
손목을 잡은 베라의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가고 손목뼈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좋은 소리야. 조금 더 높게 소리쳐 봐.
이것 봐. 지금도 비명을 지르고 있잖아.
아프지? 힘을 세게 방출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기체의 특징이야. 장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실수로 물건도 많이 부쉈어.
솔직히 지금도 힘 조절이 잘 안 돼. 조금만 방심하면 팔이 부러질 거라고. 이 침대에서 3개월은 더 누워있어야 할지도 몰라. 물론 공중 정원에도 널 구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어.
어때? 아파? 구조체들이 날 볼 때마다 느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고통일 거야.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차라리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
베라는 말없이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손목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언니! 언니!
팔이 끊어지려는 그때 날 구한 건 앳된 목소리였다. 전에 텐트에서 봤던 그 여자아이가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왜?
베라는 여전히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아니,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사신 언니, 얼, 얼른 와요. 우리 할머니가 줄 선물이 있대요.
사신이라는 호칭에 베라의 팔목에 힘이 살짝 풀렸다.
쯧.
그리고 베라는 질색하며 내 손을 풀어주고 여자아이를 따라 텐트를 나섰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오늘은 보기 드물게 맑은 날씨였다. 보육 구역에 도착하고 나서 며칠 내내 흐린 날씨였고 햇살을 맞이한 건 오늘 이 처음이었다. 눈부시고 따뜻했지만 전혀 자극적이지 않았다.
언니가 절 구해주셨는데 감사 인사도 못 해서요……
[player name]님에게 들었어요. 언니 별명이 사신이라면서요. 맞죠?
우리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사신은 타인의 생사를 관리하는 신이라고. 언니가 죽음을 저한테 주지 않은 덕분에 제가 죽지 않을 수 있었어요. 언, 언니, 고마워요……
큰 병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허약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미소는 아이가 품에 안고 있는 들꽃과 잘 어울렸다.
베라는 아무 말 없이 잔뜩 굳은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보이지 않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조합 덕분에 주위에 있는 구조체와 청소부들도 모두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몰래 대화를 나누는 두 구조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전설 속의 사신이었어……
[player name]님이 말씀하기 전에도 그런 게 아닐까 의심하긴 했었어요. 그런데 그런 말 하는 거 무섭지 않아요?
전에 들었던 소문도 무시무시하고 실물도 다가가기 어려운 스타일이네요.
하지만…… 목숨 걸고 [player name]님을 구하려는 걸 보니까 무섭다기 보다 경외심이 들었어요. 아마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항상 저런 모습이었겠죠.
잘 생각해 보면 베라가 죽인 상대들은 전부 임무로 지정된 사람들뿐이었어요…… 의사이자 전사인 베라가 우리 편이라는 게 싫어할 일만은 아닌 것 같네요.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거리는 꽤 떨어졌지만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라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여자아이를 따라 걸어갔다. 아이는 땅에 흩어진 꽃잎을 정리하고 있는 노부인 앞에 멈춰 섰다.
아이한테서 들었습니다. 그쪽이 공중 정원 사람들이 말하는 "사신"인가요?
하하하, 참 재밌는 별명이군요. 저도 젊었을 때는 찬란한 블랙 달리아라고 불렸었지요.
풉……
착각일까? 베라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순간 베라 특유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하, 그것 봐요. 별명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답니다. 아니, 애초에 본인의 진짜 모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가능성도 있어요. 별명으로 그 사람 자체를 정의할 순 없죠.
맞아요. 별명이라면 저희가 새 걸로 많이 지어드릴 수 있는걸요……
음, 언니가 사신이면 전…… 빵 천사라고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보육 구역에 오기 전에 빵을 좋아했었거든요……
그럼 전 빵 천사, [player name]님은 부활의 신으로 부르면 되겠네요……
음, 정말 부활의 신이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사신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안 그럼 사신이 얼마나 외롭겠어요……
윽,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신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안 그럼 사신이 얼마나 외롭겠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언니 이것 좀 보세요. 저랑 할머니가 사신 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에요. 물론 부활의 신 [player name]님 선물도 있어요……
여자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화환을 들었다.
보육 구역 주변의 들꽃을 엮어서 만든 화환이었다. 그 위에는 작은 유리관이 달려있었는데 푸른색이 햇살 아래에서 더 찬란하게 빛났다.
흥……
베라는 손가락으로 화환을 받아 허공에서 몇 바퀴 돌렸다. 그녀는 유리관에 반사된 빛이 그린 곡선을 바라볼 뿐 머리에 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손가락을 뻗었고 화환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자, 머리에 써 봐.
여전히 심플하고 망설임 없는 명령의 말투였다.
바보 같잖아. 너랑 어울리네.
그녀의 요구에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머리에 쓰기로 했다.
하하, 좋아. 아주 좋아.
그걸 누가 알겠어?
하지만 언젠가 나도 화환 말고 다른 걸 선물로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너도 알겠지만 구조체의 비밀은 아직 많아. 그 비밀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무겁다고. 역시 비밀의 무게는 무고한 사람이 지는 게 맞는 것 같아.
맞아. 예를 들면 구조체가 말하는 대로 다 믿는, 아니 믿는 척하는 이상한 지휘관이라든가——
베라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사악하게 웃기 시작했다.
—순간 아무 이유 없이 공포가 밀려왔다. 또 무슨 위험한 거짓말을 할까? 또 어떤 소름 끼치는 짓을 할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당황하는 내 모습을 즐기려는 걸까?
——몇 초가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날 향해 웃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뭐 평소에도 호의를 가지고 웃지는 않았다.
왠지 공포는 서서히 안정감으로 바뀌었다.
만약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되면 대충 들으면 되는 거고 날 놀래키려 한다면 놀랄 준비를 하면 되는 거다.
가시가 달린 장미가 드디어 가시를 거두고 내 손길을 조금씩 받아들이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