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보육 구역 외각으로 도착했고, 구조체와 로봇들이 남긴 기계 부품들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휴, 이번 임무는 전투 횟수가 유난히 많네. 귀찮아.
뭐, 전투 횟수가 많아질수록 부상을 입을 사람들이 줄어드니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
어머, 존경하는 지휘관님. 질문이 뭘까요?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만약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특별 병실에 처넣을 테니까 알아서 해.
저번에 뒤처리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럼 "사전 작업"이나 하라고.
어머,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
뭐, 어쨌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은 상황 정리에 능하잖아.
당연히 안 되지. 존경하는 지휘관님~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내 뒤에 있는 베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어쩔 수 없이 베라의 말대로 계속 앞에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삐——!
그때, 전방에서 침식체 한 마리가 돌진해 왔다. 근처에 다른 목표가 없어서 나를 향해 온 것 같았고, 베라는 내 뒤에서 보고 있었다.
삐삐---!
침식체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오며 다가왔지만 베라의 기창은 여전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삐삐삐——!
침식체는 날 향해 달려들었다. 침식체의 무기가 내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삐……
곧이어 내 겨드랑이 사이를 관통한 기창에 의해 멀리 튕겨나갔다.
좋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미끼로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않고 쓸데없는 짓도 하지 않고. 아주 잘했어.
하, 그럼 멈추지 말고 계속 움직여.
이번 침식체들은 고급 사고 모듈이 장착되지 않아 별다른 전략 없이 그저 단순하게 인간을 공격할 뿐이었다. 난 베라가 침식체들을 처리하길 기다리다 그 뒤를 따라갔다.
저번과 달리 위급한 상황이 여러 번 연출되었지만 그때마다 베라는 기습을 해오는 침식체들을 정확하게 공격했고 그 덕에 위기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이든 하려고 하면 베라는 기창으로 날 치며 달콤한 미소와 함께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어이.
잠깐 멈춰봐.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고 있을 때 베라가 갑자기 날 불러 세웠다.
자, 이거 받아.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순간 베라가 나에게 작은 권총을 하나 건넸다.
퍼니싱 농도가 갑자기 높아졌어. 침식체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지. 더 이상 놀아주는 건 안 되겠네.
이 총 받아. 그리고 죽지 말고 살아남아.
고개를 돌리니 베라의 말대로 수많은 침식체들이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수에 비해 내가 든 권총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응은 무슨. 너 스스로를 지킬 실력은 될 거 아니야.
그와 동시에 베라는 기창을 휘둘러 사방에서 몰려오는 침식체들을 날려버렸다. 동작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멋졌지만 끊임없이 달려오는 침식체들을 상대하다 보니 나를 지킬 여유가 없는 건 분명해 보였다.
인간인 나 혼자서 베라가 상대하는 강한 침식체를 처리해야 한다고? 이건……
난 총을 들고 장전한 뒤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중심을 바로잡고 심호흡을 했다.
사격.
하!
내가 발사한 총알을 따라 베라는 기창을 휘둘렀고, 엄청난 힘으로 침식체들을 절단했다.
하, 예상했던 바야.
베라를 향해 달려들던 침식체는 내 총소리에 이끌려 바로 공격 목표를 바꾸었다. 공격 강도가 살짝 줄어든 몇 초 동안 베라의 창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측면에서 다가오는 로봇을 파괴했다.
다음에는 좀 더 정확하게 조준하도록 해.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나마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을 들어 베라가 있는 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곳이 훈련장이었다면 베라의 말을 엄한 꾸중 정도로 받아들였겠지만 이곳은 전장이다. 아마 베라도 더 이상 날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건 긴급 사격 명령이었다.
근접 사격이라 그런지 다행히 이번에는 베라의 등 뒤에서 기습을 해오는 침식체를 맞출 수 있었다.
뭐 나쁘지 않네. 이 정도면 합격이야.
귀찮은 것들이 아직 10마리 정도 더 남았어. 그쪽이 알아서 처리해.
말할 기운도 있고 아직 힘이 남아도나 보네. 몇 마리 더 넘겨줄까?
좋아.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야. 1시 방향에서 다가오는 침식체는 그쪽이 처리해.
난 아무 말 없이 격발했고 베라는 바로 앞으로 다가가 총알이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기창을 휘둘렀다.
내가 미끼가 된 덕분에 주위에 꽤 많은 침식체가 몰려들었고, 그들은 마치 붉은 바다를 이루는 듯했다.
그녀의 기창은 마치 신화 속 홍해를 가르는 신의 지팡이처럼 붉은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모든 시작점은 바로 내가 쏘는 총알이었다.
총알은 소형 발신기형 침식체에 명중했다. 그 발신기가 바로 주변의 침식체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깃발처럼 방향을 제시해 주는 존재가 사라지니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침식체들 중 절반은 방향감각을 잃고 허둥댔고 곧 상황은 정리될 것처럼 보였다.
삐삐---!
하지만 이번 기습으로 인해 베라와 나는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엄폐가 사라지자 주위에서 바로 새로운 적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방금 전 협공으로 베라의 작전 방식에 대해 대충 인지한 덕분인지, 지난번처럼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난 깊이 숨을 들이쉬고 사격과 동시에 베라를 향해 다가갔다.
전장에서 그녀는 마치 야만스러운 무용수와도 같았다. 그녀와 함께 싸우려면 나 또한 무용수가 되어 그녀의 곁으로 움직여야 했다.
침식체들을 제압하며 베라가 있는 곳까지 조금씩 후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등에 베라의 기창이 닿았다.
이제 적이 내 뒤를 기습해올 일도 없어졌고, 나 또한 적들이 베라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안정감은 마치 잘 맞는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곧 베라는 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많은 침식체가 몰려있는 곳으로 향했다.
……
베라와의 춤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총을 잡은 손이 시큰해질 때쯤에야 침식체들을 전부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
베라는 나와 꽤 떨어진 곳에 있어서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그 확신 가득한 말투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저 멀리 서 있던 베라는 따로 대답은 하지 않았고, 허리를 숙여 폐허 속에서 한참을 움직였다. 답은 이미 나와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려던 그때 멀리서 미약한 움직임을 보이는 소형 로봇이 내 주의를 끌었다.
방향을 바꾼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금속 부품들을 밟고 다가가 조준한 뒤 격발했다.
단 한 발, 정확한 사격 덕에 발신기를 장착한 침식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고개를 돌려 베라에게 다가가려던 그때 왠지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전방을 향해 걸어가던 나는 순간 휘청거렸다.
중심을 바로잡은 후,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바닥에는 온통 폐기된 부품들뿐이라 가만히 서있거나 이동할 때도 장애물에 부딪혀 몸이 흔들거리곤 했다.
그래서 이 비정상적인 진동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빠르게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거대한 침식체 위에 서있는 것이었다.
[player name]!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베라의 반응속도는 나보다 훨씬 더 빨랐다. 내가 상황을 인지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침식체 곁으로 다가왔다.
침식체가 폐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작은 움직임 하나였지만 제대로 자세를 잡기 힘들었고, 이에 중심을 낮추어 겨우 자세를 유지했다. 침식체의 높이는 10m 정도로 보였으며 그 위에 엎드린 내가 뛰어내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높이였다.
먼저 침식체를 처치할 것인지, 아니면 나부터 구조할 것인지. 빨리 판단을 해서 베라에게 지시를 내려야 했다——
삐삐---!
하지만 침식체의 움직임은 내가 결단을 내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발신기의 신호를 받아 나와 베라의 존재를 인식했는지 대형 침식체는 바로 자신의 몸통을 거세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미친 듯이 흔들리는 거구에 의해 힘없이 튕겨 나갔다.
착지할 준비해!
모든 지휘관들은 고공에서 추락 시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자세에 대해 훈련을 받는데, 이는 구조체의 협력이 필요했다. 베라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바로 추락 완충 자세를 잡았다.
훈련으로 인한 본능적인 반응에 따라 난 호흡을 멈추고 이성을 유지한 채 조금씩 착지 자세를 갖추었다.
위이잉——
하지만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침식체의 로봇 팔을 나를 힘차게 내리쳤다.
그렇다. 훈련 시간에 추락 도중 침식체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에 대한 대응법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강력한 공격으로 인한 통증보다 중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순간 회색 땅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건지 회색 하늘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리저리 회전하며 추락하는 바람에 팔이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쿵. 쿵. 거대한 침식체가 발걸음을 옮기며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산맥을 휘젓기 시작했다.
쯧.
날아오는 기계 부품들에 베라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철판 너머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콰직. 철판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더니 틈 사이로 뾰족한 기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베라였다. 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전부 잔인하게 부숴버리고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너무 촉박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지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지면에는 끊어진 강철 막대가 꽂혀있었고, 이 막대의 날카로운 끝부분은 마치 죽음을 바라보는 눈빛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