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구세기의 쇄빙선(破冰船)이었다. 철판으로 만들어진 선체에는 얼룩덜룩한 흔적이 가득했다.
버려진 건물들이 항구의 양쪽에 우뚝 서 있었다. 그건 과거 사람들이 남극을 정복하려고 시도했을 때, 남긴 또 다른 실패의 흔적들이다.
크고 작은 임시 텐트가 해만 위에 널려져 있었고 바닥과 선체에는 수십 개의 리프팅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방한복을 입은 구조체들이 각종 도구와 기기를 들고, 텐트와 배 사이를 오가며, 이 배를 복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황금시대의 극지 쇄빙선인가요?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요?
네. 저희는 이 쇄빙선이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남극에 남아 있는 대부분 인원을 출동시켰어요. 그리고 탐사 부대 외,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정비 부대와 지원 부대의 대부분 대원들도 투입시켰어요.
보름 전, 저희 선봉 탐사 부대의 대원이 근처 해만에서 황금시대의 독(船坞)과 항구, 그리고 버려진 쇄빙선을 발견했어요.
이곳을 발견한 대원은 이 배가 과거 대서양 경제 공동체에 소속된 쇄빙선이라고 판단을 내렸죠. 아쉽게도 항구에서 그 어떤 생존자의 흔적도 찾지 못했답니다.
배 내부에서 퍼니싱 잔해가 감지되지는 않았지만, 부패한 지 오래된 인간의 시신 수십 구를 발견했어요. 혈흔과 바닥에 널브러진 총기와 탄피를 보면,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어요.
과거 이 잊힌 항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저희 눈앞에 놓인 건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이 쇄빙선이 재가동된다면, 남극에서 관측 가능한 범위는 대폭으로 확장될 수 있거든요! 심지어 과거 황금시대의 규모를 따라잡을 수도 있어요!
게다가 이 쇄빙선의 손상 평가를 연구해 본 결과, 저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인적 물적 자원만으로도 복원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손만 뻗으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라고 해도 무방하죠.
상황을 설명하는 대원의 눈에서는 뜨거운 빛이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
대원들의 열정을 가까이에서 느낀 비앙카는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제 기억이 틀림없다면, 며칠 전 정비 부대가 이 배의 통신 시설을 보수하다 실수로 그 안에 남겨진 메시지를 송부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전송되지 않은 그 메시지는 아마 저희가 통신 채널을 조정할 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공중 정원의 수신기로 전송된 것 같아요.
그 메시지의 세부 내용은 저희도 모르거든요. 하지만 두 분께서 이곳에 온 걸 보면, 저희 추측이 정확한 것 같네요.
시신, 탄흔, 폭력 충돌, 이 세상의 한구석에 멈춘 이 배가 어떤 종말을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저희도 공중 정원과 바로 긴급 연락을 시도했어요. 하지만 이 배의 통신 시설을 가동할 때, 전자파 교란이 있어 저희 시설도 일시적으로 다운됐던 거 같아요.
시간을 들여 통신 채널을 다시 조정하려고 했지만, 때마침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계속 사용하던 장파 통신으로는 공중 정원과 연결할 수 없었어요.
오늘 폭설이 멈춘 이후, 최근 보름 동안의 활동 진척을 공중 정원으로 전송했고, 이 쇄빙선을 발견했다는 것도 보고했어요.
두 분께서 방금 쳐들어왔을 때, 저희는 공중 정원에 상황 보고를 막 마치고, 잠시 게으름 피우려던 때였던 거죠.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이건...
탐사 부대의 말을 듣고, 비앙카는 말문이 막혔다.
마침 지휘관과 비앙카의 휴대용 통신 장치가 울렸다.
지휘관은 탐사 부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비앙카와 함께 차에서 내려, 아무도 없는 공터를 찾았다. 그리고 공중 정원과 정보 관련 소통을 시작했다.
후...
지휘 센터와의 통신을 끝낸 후,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어처구니없어서 그런지, 비앙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모든 상황을 공중 정원과 확인한 결과, 소대장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다만... 그 메시지에 담긴 세부 내용은 과거 대서양 경제 공동체 관련 정보라서, 윗분들께서는 공유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네요.
"과거"에서 온 통신 하나만으로 지휘 센터는 정화 부대의 에이스를 파견했다. 어쩌면 이미 사라진 대서양 경제 공동체에도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휘관 자신도 개입할 권리가 없어서,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들로 봐선 너무 많이 아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예상보다는 좋은 결과인걸요.
지휘관님이 계셔서 참 다행이에요.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그들의 태도와 상황으로 판단해 보면, 그들이 "배신" 하거나 "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전 여전히 함정이 아닐까 하는 경각심을 유지했어요... 정화 부대의 일원으로써 "육감"에 의존해 행동할 수 없었거든요.
지휘관님이 곁에 계시지 않았다면... 이번 사건은 충돌 없이 끝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유일하게 피해 입은 건, 비앙카가 다짜고짜 부순 과학 기지의 대문이었다. 물론, 지금 그걸 언급해서 훈훈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었다.
지휘관과 비앙카는 약속이나 한 듯,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해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지휘 센터와 통신하는 동안에도 쇄빙선 주위에 주둔하던 구조체들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탐사 부대와 접한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지만, 지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니, 그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단 한순간, 단 1분, 단 1초라도 더 빨랐으면 좋겠다.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은 쇄빙선이 다시 바다로 나가는 순간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아니죠.
지휘 센터의 명령이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지휘관님과 저는 한평생이 지나도 이 지구에
이렇게 은밀한 "전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겠죠.
황금시대에 남극으로 여행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어요.
엄밀히 따지면, 이곳의 풍경과 흡사한 곳은 없죠.
지휘 센터에서 휴가를 주면, 그레이 레이븐 소대 대원들과 함께 남극 여행을 즐기세요. 지휘관님의 요청이라면, 위에서도 허락할 거예요.
저요?
일정 문제를 제쳐도...
전 정화 부대의 일원이라 규정상 집행 부대의 지휘관님과 사적인 교제를 자제해야 합니다.
이번 임무는 특수 상황이고, 후속 지휘관님과 접촉할 기회는 더 줄어들 겁니다.
저기요~ 두 분~
방금 지휘관과 동행했던 탐사 부대 대원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됐어요? 공중 정원과 확인은 하셨나요?
헛걸음시키게 해서 죄송해요. 아...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네요.
괜찮아요. 당신들의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하죠.
저희에게 왕복 자원을 준비해 준 후방 지원 부문에게 죄송하지만, 그래도 이번 사건에서 "정화 부대"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아서 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연속으로 수송기를 사용해서 자원 낭비를 초래한 건... 나중에 제가 복귀한 후, 서류 작업을 제대로 작성할게요.
그래서 말인데요... 저희가 뭘 좀 부탁해도 될까요?
탐사 부대 대원은 손바닥을 비비며, 기대를 담은 눈길로 지휘관과 비앙카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오래된 모델이다 보니, 지난 며칠 동안의 눈보라로 인해, 쇄빙선에서 점검 및 수리 업무를 진행하던 몇몇 대원들의 기체에 손상이 좀 생겼거든요.
쇄빙선 복원에 모든 자원을 사용했기 때문에, 저희 탐사 부대의 부품 비축량이 빠듯한 상황이에요. 그래서 대원들의 기체를 복원하려면, 보름 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마침 최근이 남극의 생명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라서, 쇄빙선 수리 이외에 저희 본직 임무인 관측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부담이 커졌어요.
시간이 되신다면, 조금만 도와주시겠어요?
그 말은... 임시로 탐사 부대의 외부 지원을 요청하는 건가요?
예상했던 임무 완료 시간보다 훨씬 일찍 마무리가 되면서,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려면, 추가로 긴급 수송 지원을 신청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탐사 부대의 요청을 수락한다면, 수송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지휘관님?
비앙카가 망설이고 있을 때, 통신 장치를 키고 조금 전 탐사 부대 대원의 요청을 지휘 센터에 전달했다.
잠시 후, 지휘 센터에서는 신청을 허락했다. 그렇게 지휘관과 비앙카는 다음 탐사 부대 물자를 운송하는 수송기를 타고, 공중 정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풍부한 전문 지식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어요.
그래도 괜찮다면, 지휘관님과 제가 기꺼이 도와드릴게요.
정말요? 그냥 한번 물어본 건데! 두 분이 계시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지휘관님도 참... 심술궂을 때가 있네요.
비앙카는 팔짱을 낀 채로 보기 드물게도 지휘관을 놀렸다.
참! 마침 잘 됐어요. 저희랑 함께 승선해 보시는 건 어때요?
곧 출항할 예정이거든요.
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배의 손상은 그리 심하지 않아요. 게다가 다들 밤낮없이 노력한 끝에 방금 정비 부대에서 재가동할 수 있다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아직 정식으로 출항시킬 정도는 아니지만요. 오늘은 시항만 할 거라 항행 경로도 짧게 설정했어요. 그래도 기념할 만한 일이죠. 모처럼 남극에 오셨는데, 저희와 이 순간을 함께 하시겠어요?
네. 가요. 지휘관님.
그럼. 실례할게요.
쇄빙선은 빙해 위에서 천천히 나아갔다.
탐사 부대의 대장과 이야기를 마치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비앙카는 뱃머리에 홀로 서서 조용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탑승했던 구룡 야항선에 비하면, 이 쇄빙선은 한 척의 외로운 배였다.
하지만 이곳의 풍경은 그 어떤 수단으로도 다른 장소에 복제할 수 없는 절경이었다.
지휘관님.
지휘관이 옆으로 온 걸 눈치챈 비앙카는 몸을 살짝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랜턴호?
소박하면서도 깊은 뜻이 담겼네요. 남극에 주둔하고 있는 탐사 부대는 이 세계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랜턴"을 든 자들이니, 잘 어울리는 이름인 것...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앙카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비앙카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봤다.
랜턴 모양의 근원 추적 장치는 남극에 온 후로 줄곧 조용했다.
사실 이걸 랜턴이라고 하기엔... 근데 왜 그랬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상징 의미가 있는 일인 만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전 탐사 부대의 의도를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결정이라면, 저도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
정화 부대의 평소 태도를 봤으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얼마 전, 비앙카는 해양 박물관에서 발생한 대규모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중 정원 내부에서도 비앙카를 볼 때, 정화 부대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영웅"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가요?
전 기념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이 길을 선택한 이상, 누군가에게 기억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믿기지 않네요.
막상 이럴 때가 되면, 뭔가 깊은 감회가 밀려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비앙카의 눈빛은 계속해서 전방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냥 아주 단순한... 기쁨을 느꼈어요.
품에서 장비를 꺼냈다.
이건 탐사 때 사용하는 전자 카메라인가요?
일반 카메라와 많이 다른 거 같은데, 혹시 사용법을 아세요?
지휘관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비앙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배는 새로운 해역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시야의 끝에는 거대한 빙산이 짙푸른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빙산 주위에 옅은 얼음안개가 떠다녔는데 보일 듯 말 듯한 신기루처럼 보였다.
이것은 새로 발견된 빙산이었다. 이 쇄빙선이 없었다면, 탐사 부대는 몇 년이 지나야 이 빙산을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탐사 부대의 모두가 지휘관과 비앙카에게 이 소중한 순간을 선물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랜턴호의 첫 항해에서 발굴할 수 있는 남극의 수많은 미지의 비밀 중 하나를 기록할 기회였다.
"수면 위에 드러난 건 빙산의 8분의 1밖에 안 된다."라는 과거 어느 유명한 작가가 내놓은 이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됐다.
그래도 막상 직접 보게 되니,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면 위에 드러난 8분의 1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수면 아래의 8분의 7은 대체 어떤 광경일까?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금발 구조체를 바라봤다.
얼음으로 만든 듯한 비앙카의 눈동자에는 이미 같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유빙과 해류에 가려진 풍경을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네.
간결하고 힘찬 대답이었다. 비앙카는 망설이지 않고 지휘관에게로 몸을 살짝 밀착시켰다.
카메라를 들어 올린 순간, 둘의 손바닥이 겹쳐졌다.
이중의 압력을 가하자 플래시가 한 번 깜박거렸다.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다.
오늘 이 순간은 결코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었다.
마치 미래에 일어날 광경들이 눈앞에서 거꾸로 재생하는 것 같았다.
그 환상적인 빙산을 담은 카메라에는 지휘관과 비앙카의 모습도 함께 비쳐졌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서 있는 비앙카는 언젠가 지휘관과 함께
지구의 종말에 잠긴 이 궁극의 신비를 보러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