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났을 때, 비앙카는 곁에 없었다.
텐트에서 나와보니, 창문 앞에 서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희미한 하얀 빛이 유리를 뚫고 들어와 밖을 보는 비앙카의 옆모습을 비췄다.
비앙카는 손으로 창가를 살짝 잡고 있었는데 표정은 홀로 남겨진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지휘관의 움직임이 공기 속의 정적을 깨뜨리자, 먼 곳을 바라보던 비앙카는 시선을 거두고, 지휘관을 향해 돌아섰다.
일어나셨어요? 지휘관님. 좋은 아침이에요.
눈보라가 그쳤어요.
비앙카는 지휘관이 창밖의 경치를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줬다.
푸르른 하늘은 캔버스에 수채를 퍼부은 듯, 층차가 선명했고 색상 또한 뚜렷했다.
하얀 대지는 지평선의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끝없는 하얀색과 차가운 파란색. 이 두 가지 색으로만 세상의 모든 모습이 구성된 것 같았다.
날씨가 이렇게 빨리 맑아질 줄은 몰랐는데, 우리 일정에 큰 차질은 없을 것 같아요.
텐트에 있는 주방 기구와 냉동 식재료로 간단하게 아침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차 안에서 식사를 하셔야 될 것 같아요.
다시 창밖을 내다보니, 어제 눈에 빠졌던 탐사차가 지금은 과학 기지 밖의 공터에 잘 주차되어 있었다.
제가 지휘관님이 깨어나시기 전에, 시간을 좀 들여서 탐사차를 건져왔어요.
한두 시간 정도 걸리긴 했는데, 구조체한테 이런 건 일도 아니죠.
그제야 비앙카의 머리카락에 눈송이가 조금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탐사차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인 것 같았다.
지휘관님?
……
앗, 죄송해요. 의관정제를 깜빡했네요.
그런 생각도 했었죠.
하지만 지휘관님께서 편안히 주무시는 것을 보니, 차마 깨울 수 없었어요.
어젯밤 지휘관님은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하셨어요. 다음 임무를 고려해서라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해요.
이런 일은 구조체인 제가 하는 게 맞아요. 지휘관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에너지를 쓰셔야죠.
지금은 "우리 둘"이니까요.
그럼, 출발하시죠.
텐트를 거둔 뒤, 탐사차를 재가동시켰다.
비앙카가 직접 요리해 준 옥수수 수프가 담긴 찻잔을 들고 시선을 주위 순백색 설야로 돌렸다.
눈보라에 가려졌던 남극의 풍경이 이제야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북극 항로 연합이 차지하고 있는 북극권과 달리, 이곳은 진정한 무인 지역이었다.
사람의 흔적, 혼란과 퍼니싱은 찾아볼 수 없었고 전쟁도 없었다.
그제야 인간과 퍼니싱의 전쟁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지구 표면에 이렇게 고즈넉한 광경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하얀색 구역을 지나도 눈앞에는 여전히 하얀색이었다.
지휘관님. 여기 커피도 있어요, 인스턴트긴 하지만.
한 손으로 보온병을 집어 든 비앙카는 곁눈질로 지휘관을 보면서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보온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커피 특유의 짙은 향기가 풍겼다.
어쩌면 황홀한 사이에 스쳐 지나가는 기이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끝없는 흰색이 유발한 착시일지도 모른다.
왠지 일시적으로 이 끝없는 설원 위의 여정이 계속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휘관님, 준비해 주세요. 사전 설정한 목적지까지 1킬로미터도 남지 않았어요.
남극의 풍경에 푹 빠졌다가 비앙카의 목소리에 이끌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찻잔에 담긴 마지막 옥수수 수프를 다 마신 지휘관은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불필요한 감정을 모두 정리했다.
미지 환경에 대한 신선함이 일시적으로 주의를 끌었지만,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극지 탐사 부대가 주둔했던 과학 기지가 어렴풋이 보이자, 지휘관은 비앙카에게 탐사차를 눈 덮인 바위 그늘 뒤에 세우라고 지시했다.
네.
비앙카는 차에서 내릴 때, 운전석에서 현재 기체에 매칭된 지팡이검도 같이 빼냈다.
아무 말 없이, 눈빛과 최소한의 손짓으로 전술 선택을 교류한 뒤, 지휘관은 비앙카의 뒤를 따라 과학 기지로 다가갔다.
지난밤에 머물렀던 과학 기지와 외관이 흡사했지만, 외부로 새어 나오는 불빛과 작동 중인 환풍기로 봤을 때, 이 과학 기지는 누군가가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과학 기지의 대문 근처에 도착할 때까진 매복의 징조가 전혀 없었다.
문밖에 도착했을 때부터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조금 엿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혁명"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혁명"?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이상한 직감을 비앙카에게 전달하기도 전에, 비앙카는 그윽한 빛을 휘감고 있던 지팡이검을 두 번 휘둘렀다. 그러자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이 폭발 에너지에 의해 갈라지면서 날아갔다.
모두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비앙카는 정화 부대에서의 오래된 수행 경험을 바탕으로 목소리를 통해 건물 안에 있는 인원수를 판단한 후, 무력으로 과학 기지의 모든 이들을 제압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점의 크기는 반대... 헉!!! 이게 무슨 일이야?
로비에 앉아 있던 탐사 부대 대원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들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짝이 폭파함과 동시에 강풍을 일구게 됐고, 그로 인해 부대 대원들이 탁자 위에 깔아놓은 카드 더미도 흩어져 날아가 버렸다.
비명을 지른 대원은 손에 스페이드 7 네 장을 쥔 채, 갑자기 문을 부수고 쳐들어온 비앙카와 지휘관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임무 브리핑에서 언급됐던 배신과 실종 징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생각지도 못한 전개 때문에, 비앙카의 표정도 탐사 부대 대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고도로 긴장했던 탓에, 지금은 신체조차 굳어진 것 같았다.
당신들은... 공중 정원에서 나온 분들인가요?
전 공중 정원의 정화 부대 대장 비앙카예요. 이곳에 온 목적은...
……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졌다. 무방비 상태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탐사 부대 대원들을 면전에 두고, 비앙카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비앙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지휘관이 나서길 바라는 듯했다.
지휘관님, 이 부분은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정화 부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세상과 단절된 구조체들도 정화 부대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앙카와 눈빛을 교환하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배, 배신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흰 이곳에 오랫동안 주둔해 왔어요. 게다가 저흰 과학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구조체라, 배신하려고 해도 그럴 능력이 없거든요.
하지만 공중 정원은 남극으로부터 수상한 통신을 받았어요.
통신이요? 앗... 잠깐만요.
설마 그거 아니야?
몇 명의 탐사 부대 대원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목소리를 더 낮추고 소곤거렸다.
그리고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구조체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정중한 표정으로 지휘관에게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저희와 공중 정원의 소통에 약간의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갑니다.
말로 설명하기는 조금 힘들고,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가보시겠어요? 현장에 도착하면 다시 설명해 드리죠.
지휘관님. 어떻게 할까요?
정화 부대의 임무였지만, 비앙카는 지휘권을 지휘관에게 넘겼다. 극지 탐사 부대의 말을 따를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지휘관의 몫이었다.
현장의 태도나 첫인상으로 볼 때, 눈앞의 있는 대원들을 도저히 "배신자"와 연결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현장에 있는 구조체들은 오래전의 초기 모델이었고, 기체에 어떤 제식 무장도 없었다. 수량이 두 배로 늘어난다 해도 최신 특화 기체를 가진 비앙카가 혼자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제안을 수락하는 건 올바른 판단인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비앙카가 파괴한 문을 간단히 정리한 후, 소대장은 대원들을 불러 장비를 정비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그렇게 탐사 부대 일행과 함께 과학 기지 차량 창고로 왔다. 이곳에는 모든 이를 태우기에 충분한 대형 탐사차가 있었다.
이전과 달리, 이번엔 지휘관이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탐사 부대의 대장은 조수석에 앉아 이동 좌표를 설정해 줬다. 이런 자리 배치는 탐사 부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계였다.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적어도 차량 운전대는 지휘관의 손에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의 탐사 부대 대원은 가운데 좌석에 배치됐다. 대원들의 움직임을 편하게 감시하기 위해 비앙카는 뒷좌석에 앉았다.
탐사차는 새로운 길을 따라 주행하고 있었다. 차 안의 인원수는 많아졌지만, 분위기는 비앙카와 단둘이 있을 때 보다 더 적막했다.
정화 부대가 갑자기 쳐들어온 것 때문에 잔뜩 긴장한 듯했다. 대원들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게 되면, 비앙카가 가차 없이 목을 잘라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화 부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느 정도로 무서운지는 모르겠지만, 이로 인해 후속 정보 교환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 지휘관은 생각을 정리한 뒤, 먼저 말을 걸어 차 안의 분위기를 풀려고 시도했다.
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예술 협회에서 고고학 원정대를 결성한 후입니다.
예술 협회 관할이지만, 저희 작업은 예술 협회의 취지와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남극은 인간 문명이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탐사 부대가 하는 일은 지구의 생태 변화와 미지의 생물을 탐사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장기적으로 남극 기후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보면 지구 차기 단계의 전반적 기후 변화 추세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죠. 지구 온난화는 황금시대부터 인간들이 걱정했던 환경 문제였잖아요?
그리고 남극 생물권의 먹이 사슬 시스템을 장악하면, 이곳에서 순환이 가능한 자원 어업(渔业)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어요. 그럼 공중 정원... 나아가서 인류의 물자 부족 문제를 크게 개선할 수 있을 거예요.
어떤 관점에도 봐도 모두 중요한 임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공중 정원의 대부분 자원은 지구를 탈환하는 데 투입됐죠. 그래서 탐사 부대의 활동도 과학 이사회가 아닌 예술 협회가 맡는 거예요.
물론 저희도 알죠, 저희가 맡은 임무는 퍼니싱을 소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는걸. 그러기 때문에 최대한 상부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정밀기기 관련 물자 신청도 가능한 한 적게 하고 있어요. 심지어 대부분 대원의 기체도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 전신 정비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됐어요.
거의 방치 상태라고 할 수 있죠. 하하, 그러다 가끔 공중 정원에서 저희를 잊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말씀하신 이 부분은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공중 정원은 결코 여러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비앙카의 말은 소대장의 서글픈 자조를 끊었다.
당신들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뒤, 지휘 센터에서는 제일 빠른 속도로 저와 지휘관님을 파견해 조사를 진행하게 했습니다.
당신들이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건 사실이지만, 저희가 이곳에 온 목표는 단순한 "숙청"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들이 남극에서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면, 저와 지휘관님은 제일 먼저 당신들을 구조하는 공중 정원의 구조 인원입니다.
하... 그래요?
빈말로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직접 말씀해 주시니 위로가 되네요.
혹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님이신가요?
헤헷, 지휘관님이 기지로 들어오셨을 때부터 알아봤어요.
매달 정기 통신을 할 때마다, 공중 정원에서는 저희에게도 최전선 전장에 대한 브리핑을 보내줬거든요. 그게 저희가 지상 정보를 획득하는 유일한 경로였어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브리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됐고 사진도 잔뜩 나왔어요.
저희는 지구에서 퍼니싱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인간과 퍼니싱의 전쟁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죠.
저희 탐사 부대 모든 대원들은 집행 부대 관련 사건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요. 물론... 그게 다 실화인지 아닌지에 대해 자주 논쟁을 벌이긴 하죠.
공중 정원의 젊은 세대 전설인 지휘관님을 직접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탐사 부대 대원들은 지휘관이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자,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구룡 방어전에도 참여하셨다면서요? 엄청난 장면이라 하던데요, 공중 정원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대부분 세력들이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풀리아 삼림 공원의 전쟁도 매우 참혹했다고 들었어요.
최신 특화 기체는 정말 퍼니싱을 흡수할 수 있나요? 달에서 영점 에너지 엔진 폭주 사건을 해결한 그 카레니나라는 구조체는 어떤 구조체인가요?
너무 오랫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서 그런지, 그들은 지휘관을 통해 브리핑으로만 봤던 작전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탐사 부대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중, 탐사차도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위에 기억할 만한 뚜렷한 표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이 탐사 부대의 주둔 기지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수많은 빙하와 영동 호수를 건넌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그 풍경 뒤에 숨겨진 건, 경이롭고도 예쁜 인공 풍경이었다.
수많은 유빙이 떠 있는 해만에...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