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과 리브가 풍차 탑 아래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거친 천둥소리가 낮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먹구름이 서서히 햇빛을 삼키며, 오래간만의 폭우를 예고했다.
베르메르 씨!
바닥에는 물감통이 뒤집혀 있었다. 형형색색의 물감이 흩뿌려진 사이로, 베르메르가 커다란 화판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리브가 재빨리 뛰어가 도움의 손길을 보탰다.
아, 리브… 그리고 그…
맞네요, 맞네요. 리브와 연인분이셨죠.
갑자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일기 예보관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모레 윈치스에 상륙 예정이었던 태풍이 지금 곧 들이닥친다네요.
태풍이요?
네. 꽤 큰 태풍이라고 하니, 두 분 다 얼른 대피하세요. 전 잠시 풍차 탑 아래서 비를 피할게요.
베르메르 씨, 잠깐만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이 동화책, 기억하세요?
리브가 건넨 동화책을 본 베르메르의 분주한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아… 기억나네요. 퍼니싱이 터지기 전, 제가 아직 무명 화가였을 때, 남들이 쓴 글에 삽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이어갔었죠.
그땐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던 때였어요. 그래서 그런 부탁 하나하나가 소중했죠. 그림마다, 그리고 그 이야기마다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에덴의 소녀>라는 이야기도 혹시 기억하시나요?
리브는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어젯밤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었다.
만약 기억하신다면, 그 결말을 알려주세요.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예요. 작은 까마귀와 그 소녀는… 그 뒤로 어떻게 됐나요?
아하하... 글쎄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베르메르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그림 도구를 더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서 비 피할 곳을 찾죠. 이러다간 우리 셋 다 쫄딱 젖겠어요.
그럼, 그 작가에 대해서는 기억하시나요? 제 이름과 같은 "리브"라는 작가예요.
...
혹시 그분이 쓴 다른 책은 없나요? 뭐든 괜찮아요. 아시는 게 있다면… 제발 알려주세요.
그 작가는 단 한 권의 책만 썼어요.
<에덴의 소녀>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이야기예요. 아직 그 동화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요.
그럼, 그 이야기를 알고 계신 거네요.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는 가운데 작은 까마귀와 소녀는 어떻게 됐나요?
만약 이야기의 결말이 완벽하지 않다면요?
거센 바람 속에서 서로를 꼭 껴안은 그 순간에서 이야기가 멈춘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전 그 뒷이야기를 꼭 알아야겠어요.
"이제는 그 결말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어요." 리브는 입술을 꽉 깨물고, 지휘관의 손을 꼭 잡았다.
……풍차 탑 꼭대기, 그 위의 성당에 작가가 남긴 원고가 있어요.
풍차 탑이라면... 바로 옆에 있는 그 풍차 탑 말씀이신가요?
그래요. 그 작가는 자주 그곳에 올라갔었죠. 영감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딸을 위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
!
집으로 돌아왔으니, 안토니아도 기뻐할 거예요.
리브가 아주 어렸을 때, 제가 안아준 적도 있어요.
휘이잉... 거센 바람이 폐허 사이로 몰아치며 나무 아래 낙엽들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말씀하신 그 동화 작가...
당신의 어머니, 안토니아예요.
...
따뜻하면서도 아릿한 슬픔이 밀려와, 거센 바람과 함께 리브의 가녀린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할 말을 잃은 채 비틀거리며 두 걸음 물러섰다.
틸민·샤스트·리브는 그 작가의 필명이에요. 그리고 그 이름에는 의미가 있죠.
Til min kj{195|166}reste Liv...
"나의 가장 사랑하는 리브에게"라는 뜻이에요.
그녀가 쓴 모든 이야기는, 리브에게 바치는 선물이었어요.
리브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풍차 탑을 향해 달려갔다.
높은 탑이 낡은 탓인지, 아니면 복잡하고 벅찬 감정들이 뒤섞인 탓인지, 리브의 세상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풍차 탑 꼭대기의 성당으로 올라가 입구 오른편 캐비닛을 열었다. 위에서 세 번째 서랍을 당기자, 한때 동화책으로 오해받았던 그 원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찬바람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리브는 원고에 적힌 삐뚤삐뚤한 글씨를 바라보며 넋을 잃은 듯 읽기 시작했다.
작은 까마귀는 이 세계를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하늘을 날아다녔다.
하나, 둘... 은빛 눈송이가 작은 까마귀의 날개 위로 내려앉으며 겨울이 찾아왔다.
작은 까마귀가 소녀의 곁으로 돌아왔을 때, 소녀는 차가운 눈밭에 쓰러져 있었다.
"걱정하지 마... 조금 피곤할 뿐이야... "라고 소녀가 작은 까마귀에게 말했다.
소녀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며 점점 투명해져갔다. 이대로 두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잠깐만, 여긴 너무 추워... 여기 있어 줘. 내 곁에 있어 줘... "
...
그렇기 때문에 작은 까마귀는 떠나야 했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소녀와 함께 자신이 왔던 따뜻한 세상으로 돌아가려 했어.
작은 까마귀는 다시 한번 날개를 펼치고,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이, 멀리 날으려고 했어.
위로 올라갈수록 공기는 더 차가워졌고, 높이 올라갈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졌지.
소녀가 선물해 준 아름다운 회색 깃털마저 이제 눈송이에 하얗게 물들어 갔어.
작은 까마귀는 날갯짓을 할 때마다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걸 느꼈어.
그래도 작은 까마귀는 소녀를 데리고 나갈 방법이 그곳에 있을 거라 믿었기에 계속 높이 날았단다.
그렇게 날고 또 날아서 별들 사이에 닿았을 때, 작은 까마귀는 마침내 "대지"의 전모를 보게 되었어.
"어떻게 된 거지?" 작은 까마귀가 주위 별들에게 물었어.
알고 보니 소녀와 함께 있었던 곳은 대지가 아니라, 소녀의 "에덴"이었던 거야. 진짜 대륙 위에 떠 있는 하늘섬이었던 거지.
모든 생명체는 상처를 입으면 그곳으로 와서 치유받고, 회복되면 소녀가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고 있었어.
소녀는 이 세상의 신이자, 모든 생명의 "천사"였어.
하지만 생명 하나를 치료할 때마다, 에덴은 점점 더 높이 떠올라 거센 바람이 부는 하늘 끝에 이르러 겨울처럼 춥게 되었지.
그건 소녀가 치러야 할 대가였어. 혼자 남아, 사랑하는 인간 세계와 점점 멀어지게 되는 운명이었던 거야.
그럼에도 그녀는 미소 지으며 여전히 그 세상을 바라봤어. 사랑하는 모든 존재들을, 그저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던 작은 까마귀는 힘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날갯짓하느라 생명과 힘을 모두 소진해 버렸던 것이다.
그의 몸은 점점 흩어지더니, 결국 종잇조각이 되어 차갑고 거센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
이게... 이야기의 마지막인가요?
베르메르는 고개를 들어, 병상에 누워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병원에 오기 전, 베르메르는 <에덴의 소녀>의 삽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리고 싶었던 건, 햇살 가득한 하늘과 부드럽게 이어진 초원, 그리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였다. 윈치스의 풍경을 참고해 그리려고 했었지만, 하필 그날 거센 바람이 불어 세상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베르메르가 화판을 접고 돌아서려던 순간,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안토니아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연락이었다.
...
기계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삐" 소리가, 마치 안토니아의 생명을 카운트다운하는 것 같았다.
아니요...
창백한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뭐라고요?
베르메르는 귀를 가까이 대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건…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니에요.
...
하지만… 저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어요…
안토니아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을 위로 뻗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수면 위로 떠오르려 했다.
베르메르는 안토니아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게 하면 안토니아를 깊은 바다에서 끌어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베르메르... 여긴 너무 어두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
베르메르... 알려줘요...
무엇을요?
이야기의 결말이 무엇인지 알려줘요...
전... 모르겠어요.
작은 까마귀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줘요...
전... 모르겠어요.
이야기 속 소녀... 제 아이... 리브는...
결국 행복해졌나요?
...모르겠어요.
...
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이건 리브를 모델로 한 이야기예요.
하지만 전 안토니아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어요. 그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저도 알지 못했거든요.
그날 안토니아는 제게 원고를 풍차 탑의 성당, 바로 이곳에 두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건 리브를 위한, 그녀의 마지막 기도였어요.
풍차 탑에서 나오니,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천둥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베르메르와 작별 인사를 마친 리브는 인간 지휘관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의식의 바다가 흔들리며, 짙은 슬픔이 다시금 리브의 눈가를 채워갔다.
리브는 인간의 마인드 표식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그건 등대처럼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리브, 리브."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
어린 시절의 회전목마, 어머니의 힘없는 미소...
부드러운 양털, 칼리오페의 걱정 어린 잔소리...
흐릿한 눈물 너머로, 그 모든 기억이 반짝이는 유리 조각처럼 오색찬란하게 리브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리브는 손을 뻗어 그 작은 수정들을 움켜쥐고 품에 꼭 안으려 했다.
그때 거센 바람이 불어와 어머니의 뒷모습, 그레이 레이븐의 제복, 희미하게 빛나는 등대 모두를...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휩쓸어갔다.
리브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세상에 이제, 그녀 혼자만 남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