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가고, 바람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공기는 점점 메말라갔고, 푸르던 풀잎은 누렇게 시들어갔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했고, 곧 겨울이 찾아올 차례였다.
소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빛을 새로운 생명에게 나누어주고는, 지친 듯 풀밭 위에 쓰러졌다.
작은 까마귀는 초조한 듯 그녀 곁을 빙빙 돌았지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나의 작은 까마귀… 자책하지 마.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충분히 행복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작은 까마귀는 생각했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는 자신에게 아주 커다란 날개가 있어서, 소녀를 품에 안아 거센 바람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 어떤 세계에서는, 소녀와 같은 두 손을 가지고 있어서, 그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 웃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아마 아주 오래전의 일일 수도,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그곳은 이곳처럼 차갑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 같았다.
왜... 난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 거지?
아직… 기다리고 있는 게 있어…
음… 기억이 잘 안 나. 너무, 너무 오래돼서…
소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어쩌면, 그저 낡은 종잇조각들이 걱정돼서, 그리고 다친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을 잃을까 봐 걱정돼서일지도 몰라.
여기 바람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어. 작은 까마귀야, 너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 안 그러면 바람에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작은 까마귀는 소녀의 말투를 흉내 내며 진지한 척 대답했다.
작은 까마귀는 여전히 그녀 곁에 남아, 묵묵히 주위를 맴돌았다.
...바보.
이리 와. 여기로 와... 내가 안아줄게. 그럼, 우리 둘 다 춥지 않을 거야.
-<에덴의 소녀·Ⅳ>-
바람...
이른 아침 치고는 지나치게 상쾌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살랑였다.
[player name] 님, 좋은 아침이에요.
지휘관은 뺨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떴다.
무슨 꿈을 꾸셨어요? 계속 그 꿈속에 머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어요.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고, 리브는 따뜻한 수건으로 지휘관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있었다.
오늘은 제가 해드릴게요. 이 시간에 맞춰서 지휘관님과 함께 해보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기분이 좋아 보이는 리브의 입가에서 잔잔한 흥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 또 누우셨네요.
리브는 재빨리 지휘관의 몸을 끌어안고 타월로 계속해서 뺨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오늘은 늦잠 자시면 안 돼요. 이 시간에 맞춰서 지휘관님과 함께 해보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도착했어요.
리브의 말과 함께 "도착"한 곳은 회색 비행선이 있는 장소였다.
인간은 졸린 눈을 비비며 눈앞의 상황을 기억해 내려 했다.
지휘관은 잠이 덜 깬 상태로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잠이 덜 깬 상태로 지나치게 푸짐한 아침을 먹고
그리고 잠이 덜 깬 상태로 근처 언덕까지 끌려왔다.
이 모든 일의 "주범"은, 바로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고 있는 소녀였다.
바람이 부네요... 느껴지세요?
리브는 고개를 살짝 돌려, 저 멀리 구름의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높게 솟은 풍차 탑이 신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습기와 열기가 옷깃을 감쌌고, 햇살은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눈부셨다. 몽롱한 아름다움 속, 세상은 마치 필름처럼 멈춰 있는듯했다.
그러다 강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 속에 서 있는 소녀는 빛을 머금은 듯 반짝였고, 곧 바람에 실려 하늘 끝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어? 갑자기 왜 그러세요?
지휘관은 "네가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라는 그 한마디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남기신 이 비행선으로, 지휘관님과 함께 바람을 타고 싶었어요.
네, 집이랑 비밀 기지, 그리고 어머니의 책들까지 전부 살펴봤는데, 여전히 못 찾았잖아요.
마을 도서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가도 늦지 않아요.
지금 바람이 딱 좋아요. 둘이 함께 날기엔 정말 완벽한 날씨예요. 조금만 늦으면 바람이 약해져서 날지 못할 수도 있어요!
리브는 지휘관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촉촉한 눈동자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간절함이 비쳤다.
그럼, 가볼까요?
리브가 한 가지 일에 이렇게까지 들뜬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드물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리브는 신난 표정으로 지휘관의 손을 꼭 잡고, "회색 깃털"을 향해 달려갔다.
지휘관과 리브가 나란히 발판을 밟자, 회색 깃털이 언덕 정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상상과는 달리, 비행선은 하늘 높이 솟아오르지 못하고, 겨우 고도를 유지한 채 아슬아슬하게 날고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바다 위까지 나아갔지만,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비행하는 모습에,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가슴 한켠을 스쳤다.
있기는 한데, 아주 조금뿐이에요. 바람이 약해서 지금은 거의 인력으로만 나는 중이에요.
구조체는 인간의 몸보다 더 큰 동력을 가지고 있으니, 긴장 푸세요. 지휘관님, 제가 할게요.
"리브 혼자 힘쓰게 둘 수는 없지." 그 생각 하나로 지휘관은 전력을 다해 발판을 밟았다. 외골격이 뜨겁게 울리며 강렬한 소리와 함께 계속 에너지를 공급했다.
지휘관이 힘을 보태자, 흔들리던 "회색 깃털"이 위로 솟아오르며 점점 더 높이 날기 시작했다.
리브의 말이 맞았다. 외골격을 장착했어도 인간의 힘은 구조체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녀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나았다.
두 발에서 힘을 빼자, 비행선은 오히려 부드럽게 상승하며 고도를 높여갔다.
휴... 상승기류를 만난 것 같아요. 잠시 쉴 수 있겠네요.
오늘 바람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회색 깃털은 바람이 강할수록 더 높이 날 수 있는 기종이거든요.
저도 잘 몰라요… 사실 오늘이 첫 비행이에요.
그래도 이 비행선, 예전에 10급 강풍 속을 통과한 기록이 있다네요.
어머니의 집안은 대대로 파일럿 가문이었어요. 이 비행선도 어머니가 북쪽에서 시집오실 때 함께 가지고 온 거예요.
하지만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이 비행선을 타고 날지는 못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마당에 세워두셨고, 어머니는 시간 날 때마다 올라타 하늘을 바라보시곤 했죠.
어렸을 때, 어머니는 자주 이 비행선 위에서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처럼 이 자리에 앉아 있었죠.
네.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리브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몰래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정작 발판 위에 없었다.
그리고 비행선은 지금 상승기류를 타고 있었기에, 전혀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잔잔하던 기체가 갑자기 크게 흔들리더니 리브가 비틀거리며 좌석에서 넘어졌다. 지휘관은 재빨리 발판을 밟는 동시에 손을 뻗어 리브를 붙잡았다.
읏!
손끝에 닿은 리브의 몸은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전투로 에너지를 소모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마치 탈진한 듯 보였다.
아니요. 그... 그냥 상승기류가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회색 깃털은 소녀의 마음처럼 갈 곳을 잃은 채 비틀거렸고, 지휘관은 필사적으로 방향을 틀어 해안을 향해 조종했다.
쿵... 갑자기 비행선 구석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두꺼운 책 한 권이었다. 무슨 글자가 쓰여 있었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비행선이 비틀거리며 얕은 바닷가에 착륙했다.
황당했던 짧은 비행이 끝난 뒤, 지휘관과 리브는 힘을 합쳐 회색 깃털을 모래사장 위로 밀어냈다.
음... 그럼, 제 기체의 양력을 빌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안 좋은 건 아니지만, 바람을 타고 나는 것과는 조금 달라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리브는 자연의 힘으로 날아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기억하시죠? 회색 깃털은 바람이 강할수록 더 높이 날 수 있는 기종이에요.
맞아요. 회색 깃털은 꾸준히 부는 강풍을 좋아해요.
하지만 오늘은… 갑자기 바람이 멈췄네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휴가 중에 다시는 이런 강풍을 만나기 힘들 거예요.
다음 바람이 불기까지는…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그때쯤이면, 회색 깃털은 다시 날아오르기 힘들지도 몰라요.
회색 깃털이 날지 못하면, 저희는 결국 얻지 못하겠죠....
바람의 신님의 축복 말이에요...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전설에 따르면, 사랑하는 이와 함께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면 바람의 신님께서 축복을 내려 영원히 함께할 수 있대요.
저는... 그 이야기들을 정말로 믿는단 말이에요.
동화 속 이야기는, 분명 세상 어딘가에서 진짜로 일어나고 있을 거예요.
고개를 숙인 리브는 비행 실패의 아쉬움 때문에, 발끝으로 모래를 툭툭 건드리며 발그레해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지휘관은 리브를 위로하려는 듯, 마술사처럼 기내에서 발견한 책을 슬쩍 꺼내 보였다.
이건... 동화책이네요?
예전에 어머니께서 회색 깃털에 앉아 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다가 남기신 것 같아요.
리브는 눈을 반짝이며 책을 받아 들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조금 전까지의 실망했던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약 15분쯤 지났을까, 리브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없어요... 이 책에서도 제가 찾는 동화가 없네요.
비록 없지만, 이 안의 이야기들도 정말 좋아요. 대부분 처음에는 슬프게 시작하다가,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거든요. 아마 작가의 스타일이겠죠.
틸민·샤스트... 리브...
틸민·샤스트·리브, 작가의 이름이에요.
리브가 리브를 위해 쓴 동화책인 걸까?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이 "또 다른 리브"가 바로 그 이야기를 쓴 사람일 거예요.
이 책 속의 내용 하나하나가 이상하리만큼 익숙해요.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도 그렇고… 삽화들 역시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아, 맞아요. 얼마 전, 이 그림과 닮은 화풍을 보고서 그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어요...
리브를 완전히 매료시켰던 그 그림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맞아요. 바로 그 그림이에요! 이제 삽화가만 찾으면...
둘은 숨을 죽인 채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 베르메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