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의 특별한 상황을 감안하여 최근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게 지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임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모처럼의 여유 시간이었지만 루시아는 다시 훈련실로 들어갔고, 리브는 생명의 별에 지원하러 갔다. 그리고 지휘관은 번잡한 보고서를 계속 작성했다.
특화 기체에 의식 혼란 증상이 나타난 이후, 암암리에서 얌전하지 못한 움직임과 시선이 느껴졌다. 리가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서 휴식할 수 있게끔 보고서와 관련 자료를 한 무더기 작성했지만... 아직 확인해야 할 자료가 많이 남았다.
<구조체 정비 통지서 최신 개정판>, <공중 정원 최신 전투 훈련 지침서> 그리고...
<특화 기체 적합 설명 제5판>
정말 두꺼웠지만 빠짐없이 다 봤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이후로 리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구조체는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막상 방 안에만 있으면 답답할 거라 생각했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리한테 가려고 일어섰을 때, 언제부터 뒤에 있었는지 모르는 구조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중 정원 엘리트 소대의 지휘관님이 이렇게 쉽게 놀라도 되는 건가요?
참 취약한 인간이네요.
자신이 구조체라는 설정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 같았다. 캐비닛 구석에 선 리의 푸른 눈동자에는 어색하고 앳된 기색이 담겨 있었다.
30분 정도 서 있었을 뿐이에요.
의도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선 리가 이미 처리된 파일철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특화 기체의 의식의 바다 혼란 증상에 대한 관찰 보고요? 이렇게 두껍게 작성해야 하나요?
혹시... 저와 관련된 건가요?
지휘관님의 서류 업무는 정말 복잡하네요.
지휘관님께 사과하러 왔어요.
어제 모든 파일을 다 읽었어요. 그리고 일부 상황의 진실성도 확인했고요.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섣불리 공격한 건... 신분이 어떻게 됐든,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왠지 요 이틀 사이에 사과를 엄청 많이 들은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의 리는 특별한 상황이라 그 누구도 이런 일로 원한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어떻든, 전 약속을 어기고 지휘관님께 상처를 입힌 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보상으로 임무 하나를 완성해 드릴게요.
지휘관이 아연실색하는 걸 보고, 리는 그걸 단순한 경악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여겼고,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제가 지휘관님을 도와 "목표" 하나를 처리해 드릴게요.
"쓰레기통에 있는 쓰레기를 대신 버릴게요"라는 말을 쉽게 내뱉듯이 가볍게 말했다. 리의 푸른 생체공학 동공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지정할 목표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다른...
뭐가 없다는 건가요? 지정할 특별 목표가 없다는 건가요?
지휘관의 이런 대답에 리는 조금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개인적인 의뢰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목표를 정하는 프로세스에 대해 잘 몰라요.
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치 "목표 확정 프로세스"를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리에게 할 일을 찾아줘야 할 것 같았다.
참, "소대 임무"와 같은 일상 업무가 있지 않았나요?
말속에 감춰진 의심을 듣자, 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또한 "지금의 리" 얼굴에선 거의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리는 총알이 없는 무기를 뽑은 다음, 손가락 사이로 부품들이 빠르게 떨어졌다. 손가락이 날렵하게 움직이자, 총기는 순식간에 하나하나의 완전한 부품으로 분해됐다.
지휘관의 망설임을 느끼자, 리는 금속 부품들을 뒤섞고 눈을 감은 채 촉각만으로 능숙하게 무기를 조립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무기가 곧바로 다시 온전한 상태로 리의 손에 나타났다.
기본 조작일 뿐이에요.
아직 현재의 구조체 신체에 익숙해진 건 아니지만, 제 기본 전투 능력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요.
리의 에너지를 어디서 어떻게 소모할지 생각해 뒀다. 지휘관은 임무 단말기에서 몇 번 터치하는 척하더니 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공중 정원 군사 기지의 복도. 인공 태양이 열심히 열을 방출하며 생태 시스템이 정오가 됐음을 알렸다.
윽...
아무런 준비 없던 리의 눈에 라이트가 비쳤다. 구조체는 더 이상 눈을 감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적응하지 못한 리가 어색하게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눈을 질끈 감은 리가 황급히 손을 올려 눈 부신 빛을 가리려고 했다.
공중 정원은 초광속 우주 이민함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생태 시스템 유지를 위해 작동된 인공 태양은 지칠 줄 모르는 듯 머리 위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높은 천막 투영이 인공 태양도 진짜 태양처럼 느끼게 해줬다.
……
지구 표면에서 태양을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정작 어두워야 할 우주에서 인공 태양을 봤네요.
제 업무와 잘 맞는 것 같아요.
아시면서 물어보시는 건가요?
파일에 낱낱이 적혀 있는데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아니면 낮에 활동하는 킬러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돈 때문에 하는 것뿐이에요. 머레이의 치료에 큰돈이 필요해서 머레이의 병이 악화하기 전에 돈을 모아...
머레이가 햇빛 아래에서 뛰어다닐 수만 있다면, 전 계속 어둠 속에 남아도 상관없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갑자기 이 화제로 돌리자 리는 자신도 모르게 경직됐다.
파일에 따르면 머레이는 선천적으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리의 작업 패턴을 보면 머레이와 자주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오랫동안 머레이를 보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머레이의 병은 괜찮나요?
머레이를 아시나요? 아, 머레이도 공중 정원에 있죠!
구조체 개조 동의서 뒷면 계약에 개조 전제 조건이 머레이를 공중 정원으로 보내는 거라고 적혀있었어요.
공중 정원에 머레이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있었겠죠.
그럼, 머레이는...
리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평소 겉으론 티 내지 않지만 역시 머레이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거 같았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머레이를 걱정하면서도 리는 "임무 수행" 상태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단말기가 가리키는 위치에 도착했다.
여긴 어딘가요?
문 위에 걸린 표시는 이곳이 케르베로스 소대 대기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 시간 때에 머레이가 이곳에 있는지는 지휘관도 잘 알지 못했다.
네?
지휘관님 말씀은 머레이도... 지휘관이 되었단 건가요?
리는 무의식적으로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무엇을 보게 될지 두려운 듯 바로 움츠러들었다.
쯧, 누군가 했네. 오랜만이야. 사랑하는 그·레·이·레·이·븐·의 지·휘·관~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베라가 가늘게 뜬 눈으로 문밖의 리와 지휘관을 위험하게 훑어봤다.
베라의 시선 압박에 리는 문 쪽에서 천천히 뒤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시선으로 지휘관에게 그녀가 누구인지를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이상함을 느낀 베라가 의심스러운 듯 리를 훑어봤다. 리는 재빨리 입꼬리를 평소와 다름없다는 것처럼 위장했다.
무슨 일이야? 최근엔 그레이 레이븐 협력 임무를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기지 반 바퀴를 돌았는데 "지나가던 길"이다?
베라의 의심을 사자,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가, 뒤에서 투명 인간인척하는 리와 부딪힐 뻔했다.
우리의 지휘관을 찾는 거라면...
이런, 공교롭게도 여기에 없네.
지휘관 같은 건 결정적인 순간에 유용하게 쓸 수만 있으면 되지. 굳이 시시각각 옆에 묶어둘 필요는 없잖아.
평소 한가할 때도 딱 붙어 다니는 건 너희 그레이 레이븐밖에 없을걸?
소대 대원이라면 평소에도 당연히 함께 어울려야죠. 전투 때만 연락이 닿는 지휘관이라면 전투 중에 어떻게 서로의 뒤를 맡길 수 있겠어요?
기억 속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 리는 베라에게 거침없이 반박했다.
갑자기 의식이 돌아온 건가? 이런 의아한 마음으로 리를 바라봤지만, 그의 눈에는 확고함과 믿음만 보였다.
풉, 동일한 목표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베라는 화제를 멈추고 팔짱을 꼈다.
머레이가 기지 쪽에 오는 일은 극히 드물어. 여기 와서 찾기보다는 직접 단말기에 메시지를 남기지 그래.
아니면...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건가?
어떻게 해서든 리의 현재 상황을 베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럴싸한 이유로 적당히 둘러대고 그녀의 추궁에서 탈출해,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다.
베라가 실제 상황을 알게 된다면... 아마 평생 놀림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그때는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킬러라도 협력이 필요하거든요. 이 문제 때문에 그때...
주머니에 넣은 손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고, 리는 시선을 돌려 화제를 이어 나가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의 제가 지휘관님을 이렇게 지켜준다는 건, 지휘관님이 바로 제가 상상하던 그런 대장... 그런 지휘관이라는 거겠죠.
어색하게 대장에서 지휘관이라고 부른 리가 무심한 척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머레이가 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눈을 가늘게 뜬 리는 머리 위의 인공 태양을 바라보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기지의 가장자리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공중 정원의 상업 구역에 도착했다.
황금시대의 대형 상업 단지보다는 못하지만, 이 상업 구역은 공중 정원의 발전과 함께 초기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조명은 유려하고 유선형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리는 고개를 돌려 햇빛에 비친 그늘로 호기심을 감추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임무" 구역인가요?
블록... 목표 지점과 인물을 저에게 동기화해 주세요. 임무가 끝나면 지휘관님을 찾아가 합류할게요.
옆에 있던 아이스크림 아저씨에게 돈을 냈고,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높이 쌓인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지휘관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리한테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라고 신호를 보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눈 가리고 아웅하듯 리는 주머니에 숨기고 있던 손을 뒤로 숨겼다.
아무리 인공 라이트라고 하더라도 아이스크림을 실온에 두면 녹기 마련이었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콘의 달콤한 무늬를 따라 조용히 흘러내렸다.
임무 중에 음식을 드시면 안 돼요.
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휴게실에서부터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자, 작은 부품 하나가 그의 손바닥에서 떨어졌다.
구조체의 부드러운 인조 피부 손바닥 위에 작은 부품 모양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 부품은 무기에 들어가는 스프링이었다.
달아요.
리는 이런 달콤한 맛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지휘관 옆에 조용히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한 입 한 입 먹어 치웠다.
오랜만에 이런 맛을 맛보는 데, 싫지는 않은 것 같아요.
리는 손바닥을 꼼꼼히 닦은 다음, 관심 없는 척하면서 손에 쥔 스프링을 바라봤다.
이 부품은...
아이스크림으로 손에 있던 스프링을 잠깐 대체할 수 있었지만, 로봇과 무기에 대한 관심은 전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리는 보기 드물게 망설였다. 무기를 다시 분해해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스프링을 달라고 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금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밝은 천막 아래, 인공 태양은 이곳의 모든 것에 부드러운 빛을 내려줬다. 지휘관은 장의자에 청소용 천을 깔고 휴대용 비상 도구를 꺼내 능숙하게 모든 부품을 분해했다.
휴대한 총기 정비 도구들이 좀 닳았지만, 익숙한 무기를 분해하며 부품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에는 지장이 없었다.
신형 무기의 조립은 기본 무기와 다소 차이가 있었다. 신형 총기는 더욱 정밀한 부품을 사용하여 이러한 부품들을 연결했다.
조립은 더 복잡했지만, 이런 설계는 무기의 살상력과 명중률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기억에 착오가 없었다면... 이 스프링은 이 위치에 넣어야 했다.
스프링을 원래 있어야 할 위치에 끼우자, 무기가 다시 온전하게 복원됐다.
지휘관은 참지 못하고 이전에 리가 했던 말투를 모방하며 질문했다.
단말기 기록을 보면 이건 제 무기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이 무기에 대해 이처럼 익숙한가요?
부드러운 햇살 속에서 눈앞에 의문을 가진 리와 지휘관을 무기고에 앉혀서 여러 무기의 구조를 익히게 하던 리가 점차 하나가 되어갔다.
방금 조립 과정을 모두 기억하셨나요?
파오스에선 전투 응급 같은 과목을 개설하지 않나요?
그럼, 기본 무기 사용, 응급 처치와 치료만 가르치나요?
정말로 긴급한 상황에 닥쳤을 때, 옆에 신형 무기와 정비 부품이 있어도 사용할 줄 모른다면, 응급 처치만으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 힘들 거예요.
저희가 지휘관님이 그런 상황에 빠지는 걸 눈 뜨고 보지는 않을 거지만, 익혀둬서 나쁠 건 없잖아요.
이상한가요? 조건을 많이 낮춘 건데요.
저와 리브가 사용하는 무기의 기본 요소와 조립 방식을 숙지하시라는 것뿐이에요.
협동 작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흥.
까탈스러운 시선으로 옆에 있는 차징 팔콘과 케르베로스의 예비용 무기를 지나친 리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잇지 않았다.
지휘관님은 반드시 다른 무기도 사용할 줄 아셔야 자신을 잘 보호하실 수 있어요.
전장의 상황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저희가 목숨 걸고 지휘관님을 보호하겠지만...
차가운 무기고의 벽이 구조체의 푸른색 동공에 은색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리는 시선을 내리고 구조가 복잡한 무기를 어떻게 분해하고 조립하는지 시범 보이기 시작했다.
지휘관님이 자신을 보호하실 수 있는 수단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