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Affection / 리·초각·그중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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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초각·그중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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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정원에서 "임무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리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지휘관을 위해 사람을 죽이겠다고 아우성치지도 않았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리... 정말 괜찮은 걸까?

보고서와 파일과의 "씨름"을 마치고 한가해진 저녁, 마음 한구석엔 늘 걱정이 남아 있었다.

문제없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괜찮아요.

실내의 목소리는 조금 침울한 것 같았지만, 부상당하거나 다른 문제가 생긴 건 아닌 것 같았다.

휴식실 내부. 리는 침울한 얼굴로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를 읽었다.

같은 노트에 다른 필체가 있었다. 첫 페이지부터 뒤로 넘기면 넘길수록 둥근 필체에서 점차 날카로워졌다.

엉망이군.

다시 노트 첫 페이지로 넘긴 리가 자질구레한 기록 문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둥글고 앳된 필체가 노트에 항의했다.

총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을 때, 실수로 지휘관님 귀에 찰과상을 냈어.

그래도 지휘관님을 습격하는 침식체는 성공적으로 처치했어.

침식체가 이런 괴물이었다니, 무서워.

유치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유의 진한 여운이 다시 미각 모듈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구조체는 이런 영양소가 함유된 복합 콜로이드 용액을 섭취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니...

...

한 페이지를 넘기자 좀 더 날카로운 필체가 나타났다. 그 시기엔 머레이의 증세와 생계 때문에 필체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침식체, 퍼니싱, 적조, 이중합의 탑... 앞으로 이런 어둠을 마주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달았다.

지휘관이 이 무기에 이렇게 익숙할 줄은 몰랐다.

그 페이지의 끝에는 아이스크림과 무기가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 뒤에 그려진 긴 흔적은 그날 던진 의자의 포물선 같았다.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킬러는 실수할 리가 없었다.

단지... "목표 인물"을 본 찰나, 몸의 본능이 리가 정밀하게 계산한 포물선 궤도를 막은 것이었다.

지휘관님을 맞히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이렇게 위험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겁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응급 간호실을 신청하는 건데...

책상 앞에는 임무 수행으로 인해 오랫동안 관리하지 못한 식물의 잎 몇 개가 메말라 있었다. 그중의 잎 하나가 움츠리고 구르더니 생태 시스템에 만든 바람에 따라 노트 위에 떨어졌다.

한 페이지를 더 넘겼다. 두 페이지의 필체는 몹시 흡사했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역시 지휘관님께 이 일을 알리지 말아야 했어. 임무를 수행하는 척하고 빈방에 있었어야 했어.

그레이 레이븐 소대 대원의 임시 파견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님의 구두 동의를 얻어야 해. 게다가 장기 임무는 말할 필요도 없어.

이 기록을 쓸 때, 도대체 뭔 생각을 한 걸까?

하지만 그 시기는 그레이 레이븐에 막 이동했을 때라 동료한테든 지휘관한테든 계속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 뒤의 필체는 지금과 비슷했고, 의식의 바다 검사 데이터와 이번 의식 혼란 증상에 대한 추측이 무질서하게 기록돼 있었다.

아시모프 님의 보고서를 보면 기체 이상 데이터의 오버플로밖에 추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신형 기체는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데이터가 쌓이는 걸까?

몇 번 밤늦게 나왔을 때, 지휘관님 방에 불이 켜진 걸 본 적이 있었다.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지휘관님 옆에는 각종 특화 기체 관련 보고서와 자료가 쌓여 있었다.

지휘관님도 요즘 고생이 많으시네.

뭐라도 남기자. 감사이자, 기념으로.

노트의 마지막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이런 일 가지고... 뭘 기념할 게 있다고.

노트를 덮고 의식의 바다가 차츰 정리되며 기억이 융합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희미했던 조각들이 컬러 영화처럼 의식의 바다에서 생생하게 재생됐다.

색채가 조금씩 기억의 빈자리를 채워갔다. 심지어 오래되고 가느다란 균열도 점차 찬란한 색깔로 물들어 갔다.

리의 휴식실 안에서 책을 사락사락 넘기는 소리가 갑자기 멈추고,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에서 두 바퀴 돌다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손에 작은 줄칼을 들고 있는 리가 무표정하게 지휘관을 바라봤다.

뭐 하시는 거예요?

지나가다니요? 제 방이 필수로 거쳐 가야 하는 통로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는 조금 비켜서 지휘관에게 들어와서 얘기하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리의 휴식실은 여전히 깔끔했고, 책상 위에 펼쳐 놓은 노트가 눈에 띄었다.

일기가 아니라 그냥...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자, 리는 드물게 머뭇거렸다.

의식의 바다 혼란 증상 연구를 보조하기 위해 문제가 생겼을 때 관련 증상을 기록한 거예요.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건가요?

아시모프의 추측에 따라, 의식의 바다 조각 정리 진도를 계산했을 때, 지금쯤이면 의식의 바다 정리는 거의 끝났을 것이었다.

혹시나 리의 의식이 다시 교체되어서 이 일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만일을 대비해, 지휘관은 방문에 메모장을 붙였다.

지휘관님의 지나치게 신중하고 수상한 상태를 보니, 휴식실에서 절 토벌할 계획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네요.

책상 위에 반듯하게 붙어 있는 메모장을 본 리는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래도 지휘관님의 초대이니... 오늘 저녁 늦지 않게 도착할게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춘 리가 손에 들고 있던 줄칼을 내려놓고 지휘관을 바라봤다.

제가 최근에 말썽을 많이 일으켰죠?

이런 이상한 의식의 바다 혼란 증상에 전...

이 증상을 치료할 수도 없고 정리할 수도 없게 된다면요?

영원히 이런 간헐적인 기억상실 상태이고, 간헐적으로 의식 혼란 증상이 나타난다면요?

간헐적으로 의식 혼란 증상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구조체의 기본 전투 능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침식체를 정화하는 교환상이 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의식의 바다 정리 진척은 곧 끝날 것 같아요. 방금 제가 말한 "치유 불가"는 가설일 뿐,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크흠... 그리고 요 며칠 귀찮게 한 것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드리려고 해요.

갖고 싶은 게 있으세요? 총기 정비 도구나 새로운 시간 알림 로봇 같은 건 어떠세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리의 성격상 또 한동안 혼자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무슨 노트요?

의식의 바다 혼란 증상을 기록한 노트를 조금 더 연구해 본다면, 현재 리의 기체에 대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알겠어요.

지휘관의 대답이 예상 밖이라 그런지, 리는 경직된 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다른 일이 있으신가요?

저녁에 봬요.

리는 어색한 기색을 보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을 때 역시나 손가락으로 살짝 막아 문 닫는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평소와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