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리타…
탄생의 순간, 세계는 그렇게 마르가리타를 불렀다.
햇살이 어둠을 가르고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눈이 따끔거려 깜빡이는 사이, 여자아이는 몽롱한 정신으로 낯선 세계에 내던져졌다.
미안해. 엄마가 조금만 더 빨리 달렸더라면…
쿨럭!
여자는 아이의 몸 위로 쓰러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품 안의 소중한 존재가 사라질까 봐, 온 힘을 다해 여자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일까?
뚝, 뚝. 여자아이가 의문을 품는 사이, 미지근한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져 얼굴을 적셨다.
...?
기울어가는 석양이 무너진 벽 사이로 희미한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쏟아진 잔해 틈에서 튀어나온 철근 하나가 여자의 옆구리를 뚫고 몸을 관통한 채, 피에 젖은 섬뜩한 광택을 뿜고 있었다.
선혈이 빗물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그날... 엄마가 조금만 더 빨리 달렸더라면...
우리가 헤어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마르가리타...
엄마?
혼탁한 의식이 신경을 찔렀다. 여자아이는 그 낯선 이름을 듣고, 조심스레 입을 열어 물어보았다.
엄마는 온 세계를 뒤졌지만... 결국 널 찾지 못했어.
여자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 착한 우리 딸.
여자는 아이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폐허를 나서면, 한없이 넓고 황폐한 세계와 마주하게 될 거야. 그곳엔 매일 수많은 이별과 슬픔이 이어지고...
가난, 굶주림, 전쟁... 그런 것들이 널 괴롭히고 막막하게 만들 거야. 지칠 때까지 널 갈기갈기 찢어 놓고, 결국 너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돌아볼 수 없게 만들지도 몰라.
또 수많은 사람을 만나겠지. 그들은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이유 없이 널 미워하고, 상처를 입히고, 배신할 거야. 네 순수함을 앗아가고, 아무도 믿지 못하게 만들어서 어릴 적 꿈마저 잊게 하겠지.
널 기다리는 세계는 참으로 잔인하단다... 그래도 엄마는, 조금 이기적일지라도 네가 그 세계에 대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너는 엄마의 사랑을 안고 태어난 아이니까.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이 피와 뒤섞여 소녀의 얼굴 위로 잔잔히 번져 갔다.
엄마도 그런 사랑을 받아봤고, 또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어. 그래서, 이 세계가 처음부터 이렇게 차가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서로를 해치는 걸 멈출 수 있고, 황폐해진 세계를 다시 꽃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건 편견도, 증오도 아니야. 언제나 다른 한 영혼이 내어주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실낱같이 가늘었지만, 그 안에 담긴 따뜻함과 위로는 아이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이곳이 황무지일지라도, 용감하게 이 세계를 사랑하렴.
그들이 마음에 벽을 쌓았더라도, 용감하게 그들을 사랑하렴.
세계에... 언젠가 꽃이 만발할 거라고 믿으며... 가장 용감한 사람이 되어 주렴.
사랑한다... 마르가리타...
여자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소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엄마?
그녀는 세상을 위해 마지막 남은, 가장 이타적인 사랑을 바쳤다. 숨 막히도록 차갑고 얼어붙은 폐허를 떠받친 채, 자신의 품에 있던 생명을 내일로 떠나보냈다.
엄마…
윽!
무겁고도 아득한 기억이 몸 위로 덮쳐왔다. 마르가리타는 미간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시공을 넘어온 어떤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비어 있던 의식을 빠르게 채워 나갔다.
여기는 카헤티 구조대, 침식체 교전 구역 진입, 생존자 발견!
어서! 다들 와서 좀 거들어!
수많은 손길이 뻗어와 눈앞의 어둠을 하나씩 걷어내자, 대지 위에 황금빛 햇살이 쏟아졌다.
이 아이는... 구조체인가?
과량 출혈 위험은 없어. 하지만 이 정도 농도의 퍼니싱 속에서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지?
게다가 기체 번호도 지워져 있어...
한발 늦었습니다. 형제들을 그렇게나 많이 잃었는데, 생존자가 한 명도 없다니...
아니... 적어도 한 명은 구했어.
그레고리는 지친 기색으로 미소 지으며, 폐허 속 여자아이를 천천히 안아 올렸다.
단 한 명이라도 구조할 수 있으면... 우리의 노력과 희생은 헛되지 않은 거야.
마르가리타는 카헤티 사람들이 순수한 선의로 자신을 거둬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네 몸 안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싹"이 자라고 있어. 퍼니싱에 저항하고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긴 하지만... 그건 네 의식의 바다를 잠식해서 기억 모듈을 흐릿하게 만들 거야.
네가 원한다면, 널 평범한 인간 학생으로 위장해 줄 수 있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말이야.
우린 최선을 다해 "싹"을 억제할 거야. 그러니 여기 있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을 무서워할 필요 없어. 연구자로서 약속할게. 카헤티 연구소는 절대 널 해치지 않아.
카헤티 사람들은 황금시대의 여명을 목격했기에, 생명을 경시하는 기술은 우리도 용납할 수 없거든.
마르가리타는 카헤티 사람들이 조건 없는 선의로 자신을 존중해 주었던 것을 보았다.
이 세계에 태어나 마르가리타가 배운 첫 번째 수업은 바로 대가 없는 사랑과 희생이었다.
그렇기에 마르가리타 또한 이 세계에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에헤헤, 이건 야킨카에게 주는 선물, 내가 직접 짠 거야~
좋아! 오늘부터 우린 모두 친구야!
앞으로 잘 부탁해~ 네티아!
싹의 숙주를 바꾸는 건, 이론상으로 어렵진 않아.
적응력이 아주 강해서, 구조체 기체와 연결만 되면 금세 의식의 바다에 기생해서 기능을 유지하거든.
다만... "싹"이 네 안에 너무 오랫동안 기생해 있었어. 우리는 이게 어디서 왔는지도 몰라. 만약 이 "싹"을 꺼내면, 너도 함께 죽을 수 있어.
네… 알고 있어요.
정말 그렇게 할 거니, 마르가리타?
……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해 보고 싶어요.
마르가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저한텐… 가족을 잊어버리는 게 제가 사라지는 것보다 더 무서워요.
문득, 어둠 속에서 익숙한 두 가지 색채가 스쳐 지나가며 마르가리타의 흐린 시야를 밝혔다.
마르가리타... 나야!
마르가리타!!
...!
수많은 세월을 넘어, 요동치는 죽음의 안개를 뚫고 온 두 그림자가 세계 건너편에서 서서히 하나로 모여 형상을 이뤘다.
네티아... 야킨카...
네티아와 야킨카는 분명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고서 이곳으로 돌아와, 마르가리타 앞에 섰을 것이다.
거목은 쓰러졌지만, 붉은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마르가리타는 퍼니싱이 긴 세월 동안 자신의 기체에 재앙의 씨앗을 심어놓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붉은 안개가 그녀를 속박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붉은 안개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체야말로 재난의 진정한 근원이었다.
붉은 안개는 폭발 직전의 순간에 멈춰 섰다.
마르가리타는 자신이 계속 폭주한다면,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만난 친구들이 곧 자신의 손에 죽게 될 거라고 직감했다.
이번 "재회"를 위해, 그녀의 가족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절대 그들을 다치게 해선 안 됐다. 모두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마르가리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빛 한 점 없는 어둠이라면, 내가 첫 번째 빛이 될 거야.
마르가리타는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빛이 있는 방향으로 팔을 뻗었다.
정말 그 선택을 할 건가, "황금 참나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마르가리타는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멈췄다.
붉은 안개로 만들어진 이 감옥은 1초만 머물러도 수천 개의 칼날이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지. 그런데 넌 그 "싹" 하나에 의지해서 무려 20년 넘게 버텼다.
이 불사의 육신은 너의 영원한 감옥이다. 그리고 널 깨워 새로운 삶을 준 건 바로 나다. 널 이 환상의 주인으로 만들어, 고통 없이 모든 죽은 자들과 하나 되게 했지.
침입자를 없애고, 그들의 존엄을 지켜라.
왜 굳이 발버둥 치며 깨어나려 하지? 꿈이 즐겁지 않은 건가?
난 고통을 두려워한 적 없어. 이 꿈은 처음부터 잘못됐어.
마르가리타는 몸의 전율을 억누르고 다친 어깨를 꽉 움켜쥐며, 저 멀리 흔들리는 희미한 빛을 줄곧 응시했다.
내 몸을 이용해... 친구와 가족을 해치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하, 그 오랜 세월 동안 퍼니싱이 네 피부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는데 설령 의식의 바다를 되찾는다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싹이 시간을 얼마나 벌어줄 것 같나? 1초? 2초? 넌 아무것도 하지 못해. 그저 네 친구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절망 속에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다.
네가 겪었던 고난을 생각해 봐라. 고작 소꿉장난 같은 순진한 선택 하나 때문에 20년 동안 형벌을 받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네 앞에 놓인 건 잔혹한 세계뿐이다. 아무도 네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아무도 네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지.
그런데도 깨어나겠다고?
그런 걸 바라고 희생을 선택하려는 게 아니야!
마르가리타는 소리치며 공허한 잡음을 떨쳐냈다.
이 재난이 수천수만 번 반복된다 해도, 내 답은 절대 바뀌지 않아.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들고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카헤티의 모두가... 날 그렇게 조건 없이 사랑해 줬으니까...
마르가리타는 어둡고 축축한 진창 속을 헤쳐 나아갔다. 선혈 같은 붉은 덩굴이 독사처럼 사지를 휘감아 날 선 가시를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고, 살과 피를 찢어 놓으며 그녀가 자신을 되찾는 것을 가로막았다.
네티아와 야킨카가 내일의 세계에서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
온몸이 상처로 뒤덮였지만 사랑 속에서 자라난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나아가 기나긴 기다림을 뒤로 던져 버리고 있는 힘껏 외쳤다.
난 내 보잘것없는 생명이 언젠가 작은 묘목이 되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흔적을 남길 거라고 믿어.
마르가리타가 가시덤불을 밟고 사슬을 끊어내자, 금빛 광휘가 짙은 안개를 갈랐다.
난 믿어.
눈 부신 빛이 쏟아지는 순간, 마르가리타는 팔을 들어 자신의 뜨거운 가슴을 향해 찔렀다.
아름답고 찬란한 내일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고 꽃이 만발할 거야!
긴 밤을 밝히는 섬광이 뿜어져 나오며, 끓어오르는 선혈을 머금은 "싹"이 껍데기를 깨고 나왔다.
네티아... 야킨카...
따스한 햇살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마르가리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세계의 모든 움직임이 조용히 멈추며, 과거 폭발 현장에서 네티아와 교관을 지켰던 때처럼 시간마저 이 순간에 얼어붙은 듯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야.
미안해... 또 너희들 몰래 내 마음대로 해버렸네. 헤헤...
마르가리타는 눈앞에 정지해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킨카, 네티아... 키가 이렇게 컸구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나 보네... 다행이다...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목이 살짝 메어왔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화내지 마. 그리고 슬퍼하지도 마. 난 카헤티의 다른 사람들처럼, 잠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뿐이야.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마.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붉은 안개가 걷히며, 마르가리타의 눈동자 색도 점차 옅어졌다.
아직 너희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듣고 싶은 얘기도 너무 많고...
근데... 이제 좀 피곤하네... 잠시만 눈 감고 잘게...
고마워... 기적처럼 내 삶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
………
산들바람이 불고 불꽃이 눈처럼 흩날렸다. 분명 찰나였지만,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순간, 마르가리타의 마지막 목소리가 시냇물처럼 뇌리로 흘러 들어왔다.
그녀들의 모든 기쁨, 슬픔, 추억이 이 단 1초에 모조리 터져 나왔다.
마르가리타!!
네티아와 야킨카는 손을 뻗어, 본능적으로 달려가 친구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뻣뻣하게 굳은 차가운 감촉뿐이었다.
안... 안 돼. 지혈대, 지혈대!!
야킨카는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져 쓸 만한 물건을 찾으려 했지만, 구급 용품은 이미 앞선 전투에서 전부 소모한 상태였다.
마르가리타…
마르가리타!!
야킨카는 참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마르가리타의 가슴에 난 상처를 두 손으로 막았다.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피범벅이 된 손등을 적셨다.
야킨카...
또 다른 손 하나가 야킨카의 손등을 살며시 눌렀다.
……
네티아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제 겨우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너도 방금 전에... "그것"들을 봤잖아. 목소리도 들었고...
도미니카팀의 재회 자리에서… 마르가리타는… 우리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거야.
그렇지? 마르가리타?...
네티아는 떨리는 손을 뻗어 차가운 뺨을 어루만졌다.
마르가리타가... 마지막에 그랬던 것처럼...
네티아는 목이 메어왔다. 코를 훌쩍이며 입술을 떨던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야킨카를 바라보았다.
!
감정의 둑이 무너지는 순간, 야킨카는 두 팔을 벌려 네티아를 세게 끌어안았다.
………
구름과 안개가 걷히자 찬란한 노을빛이 쏟아져 내려,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두 여자아이를 물들이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수많은 방황 끝에, 세 여자아이는 마침내 다시 만났다.
긴 세월 동안 그녀들은 전력을 다해 서로를 사랑하고 세상과 싸웠다.
삶을 되돌아보면 무언가 변한 것 같기도,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 같기도 했다.
결말이 어떻든, 씁쓸한 종착지에 닿기 전까지 카헤티의 모든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발버둥 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들은 스스로 먹구름을 걷어냈다.
그리고 안개가 걷혔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속에서 "황금 참나무"가 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렸다. 인간 지휘관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하늘 가득 흩날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무너지는 거목 사이로 푸른 섬광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곧, 눈 부신 빛의 궤적이 튀어나와 폭음과 함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지휘관은 몸을 날려 구르며 즉시 무기를 들어 폭풍이 몰아치는 방향을 향해 발포했다.
쯧, 항상 네 녀석이 방해하는군, [player name]!
육중한 철갑이 땅에 떨어지며 파편과 먼지를 일으켰다. 승격자는 지휘관을 무시한 채, 네티아쪽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섬광이 번쩍이면서, 철갑 틈새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뿜어져 나오는 화염과 함께, 존·도는 퍼니싱의 불길을 밟으며 연기 속으로 맹렬히 돌진했다.
싹?!
묵직한 주먹이 맨땅을 강타했다. 그제야 존·도는 세 여자아이가 사라졌고, 그 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 있을 수 있겠어?
응, 괜찮아.
옆으로 피한 네티아와 야킨카는 마르가리타의 몸을 바닥에 조심스레 눕혔다.
연달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빽빽한 탄환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탄환들은 승격자의 장갑에 깊이 박혀 치명적인 균열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지휘관은 고통을 참으며 성큼성큼 뛰어가, 승격자와 네티아 사이를 가로막았다.
...!
네티아는 문득 마르가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그 금빛 묘목이 여전히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싹"의 빛은 이미 눈에 띄게 희미해졌다.
그게 내 몸 안에서 자라면서 의식의 바다를 삼키고, 기억 모듈을 망가뜨린 거래... 그래서 너희 둘을 알아보지 못했던 거야.
네티아는 마르가리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싹"은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를 먹이로 삼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의식의 바다를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시들어가고 있어...
저게 마르가리타를 해친 원흉이야. 부숴버리겠어!
분노에 휩싸인 야킨카는 "싹"을 집어 들어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만약, 이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퍼니싱에 맞설 수 있는 이 작은 묘목이,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싹이 공중에서 금빛으로 반짝였다. 네티아는 몽롱한 가운데 그 안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엿본 듯했다.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수없이 구해준 그것은 인간이 퍼니싱에 맞설 핵심 무기였다.
그것이 세계에 요구한 유일한 대가는, 파멸이 예정된 육신 하나뿐이었다.
만약... 여기에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 있다면?
네티아가 중얼거렸다.
적응력이 아주 강해서, 구조체 기체와 연결만 되면 금세 의식의 바다에 기생해서 기능을 유지하거든.
그리고 언젠가 거대한 나무로 자라서, 그늘 속에서 버텨 온 생명들을 지켜 줄 수 있다면… 그리고, 너를 지켜 줄 수 있다면…
네티아가 갑자기 야킨카의 팔을 붙잡았다.
…네티아?
이건 마르가리타가 과거에서 보내온 불씨야..
이 세계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름 없는 생명들을 지켜 주려면 여전히 이 빛이 필요해.
네티아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싹"을 들어 올려, 날카로운 칼처럼 자신의 가슴을 향해 겨눴다.
미쳤어?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승격자는 다급히 모든 방어를 포기하고, 지휘관의 저지선을 뚫으며 네티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놔! 그 "싹"!
누군가 희생해서 어둠을 밝힐 불씨를 짊어져야 한다면...
내가 그 무게를 짊어지겠어!
네티아가 두 손에 힘을 주어 "싹"을 가슴 깊이 찔러 넣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하더니, 다음 순간 엄청난 정보의 소용돌이가 굉음을 내며 밀려왔다. 그것은 의식의 바다에 쌓인 어둠을 씻어내고, 과거의 공허함을 서서히 채워나갔다.
엄청난 고통과 벅찬 감각이 동시에 의식을 옥죄어왔다. 수없는 파괴와 재생 속에서 네티아는 찢겨나가고 길을 잃을 뻔했지만, 생각의 저편에 있는 마인드 표식이 굳건하게 네티아를 다시 붙잡아주었다.
네티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의 비를 바라보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통이 거듭 몸을 들이받으며 찢어 놓았지만, 손 곁에 닿은 그 온기만은 오히려 더욱 뜨겁게 타오르며 끝까지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네티아!
네티아는 이 고통의 저편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많이 컸구나…
마르가리타.
네티아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거대한 낫을 꽉 쥐었다. 그리고 기합과 함께 엄청난 살의를 휘감은 채, 정면으로 돌진해 오는 승격자를 향해 내리찍었다.
윽!
날 선 칼날이 차가운 섬광을 일으키며 울부짖듯 날아올랐고, 승격자가 치켜든 두 팔을 순식간에 베어 부수며 그의 몸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몸은 뒤편의 암벽에 처박혔고, 수 미터에 이르는 깊은 균열이 갈라졌다.
쿨럭... 저 녀석을... 막아!
승격자가 소리치자, 바닥에 흩어져 있던 쇳조각들이 전광을 튀기며 떠올랐다. 그 조각들은 공중에서 결합되어 하늘을 뒤덮는 수많은 칼날이 되었고, 추격해 오는 네티아를 향해 일제히 쇄도했다.
저건 우리한테 맡겨!
지휘관과 야킨카가 동시에 사격했다. 양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의 폭풍이 공중에서 교차하며 불길 같은 궤적을 그렸고, 네티아의 앞을 가로막던 철제 칼날들을 튕겨 냈다.
연속되는 폭음을 뒤로한 채, 네티아는 높이 도약했다. 낫 날을 크게 휘둘러 하늘 가득 흩날리는 성화를 휘몰아치게 한 뒤, 승격자를 향해 그대로 추락하듯 내려찍었다.
!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타오르는 파편들이 무너져 내렸고, 칼날의 섬광이 그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콰아앙!
쳇... 하하...
형체가 산산이 붕괴되는 순간,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기괴한 비웃음을 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