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들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그 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손, 내밀어 봐.
야킨카는 전전긍긍하며 오른손을 내밀었고, 손바닥 위에는 다소 조잡하게 만든 비행선 모형이 놓여 있었다.
저… 창고에서 찾은 재료로 만든 거예요. 그… "미라클호"랑 닮지 않았나요? 곧 두 분이 타고 가실…
야킨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아버지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회로판, 전선, 전구… 또 이런 쓰레기들이군! 내가 경고하지 않았어? 이런 더러운 것들 뒤지지 말라고!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기름 냄새가 진하게 밴 장난감을 내려다보며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네 몸에는 아딜레와 대서양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손은 피아노를 치고 예절을 배우는 데 쓰는 거지, 쓰레기 줍고 고철이나 만지라고 있는 게 아니야!
즈비슈코가 갑자기 손을 꽉 쥐자, 정교한 비행선이 순식간에 부서져 버렸다.
아버지…!
우린 내일이면 떠난다. 6개월 아니 더 길어질 수도 있어. 전 세계의 이목이 우리 가문에 쏠려 있는데, 넌 집 문 앞에서 쓰레기나 줍고 있니?
거울 좀 봐라. 네 꼴을 좀 보라고. 얼굴에는 기름때, 온몸엔 흙먼지... 어디가 귀족의 영애다운 모습이니? 기자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난 노숙자의 아비로 보일 게 아니냐!
전… 그저…
그저 부모님을 너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야킨카는 눈물이 고여 말을 잇지 못했다.
야킨카, 우리는 전 인류를 위한 가장 숭고한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네가 할 일은 단 하나야. 나와 네 어머니가 신경 쓰이게 만들지 마라.
야킨카는 현관 쪽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그림자 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기억해라. 너는 우주군의 딸이다. 밖에서는 모두가 네 신분 때문에 너를 존중하고, 작은 실수쯤은 눈감아 줄 거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릴 실망시키지 말거라.
야킨카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저 작별의 포옹을 원했을 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등을 돌린 채, "미라클호"의 파편을 발로 밟고 짐을 집어 들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그따위 "취미"는 집어치우고 학업과 훈련에 집중해라. 부디 우리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보모가 널 돌볼 테니, 말썽 부리지 말고 잘 있어.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세상에, 또 너니? 왜 매일 남자애들이랑 어울려 싸우기만 하니? 좀 얌전해질 수는 없어?
꼴 좀 봐라.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잖아. 여자애답게 좀 굴어!
싫어요! 걔들이 먼저 다른 애를 괴롭혔다고요!
너… 지금 태도가 그게 뭐야! 당장 나가서 서 있어!
그만하고 조금만 참으세요. 저 아이, 즈비슈코의 딸입니다. 전사자 유가족이잖습니까. 정부에서 나오는 당신 월급에도, 저 아이 몫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어쩌다 이런… 거친 아이를 낳았을까.
야킨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놈의 딸, 딸, 딸! 전 누구의 애완동물도, 장식품도 아니에요! 저도 이름이 있다고요, 야킨카!
그녀는 소리쳤다. 날카로운 눈빛은 칼날처럼 어른들을 꿰뚫고 있었다.
저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세요? 왜 제가 꼭 당신들이 만족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요?!
제 부모님이 완벽하고 위대해 보이세요? 좋아요, 그럼 제가 알려드리죠! 즈비슈코는 매주 한 번씩 토혈하고, 다누샤는 매일 밤 어린 애인 집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장 그만둬!
보세요, 당신들은 그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옳고 그름엔 관심도 없잖아요! 제가 입을 다물면, "야킨카"가 받은 상처는 없던 일이 되나요?!
제 부모는 고결한 영웅이 아니에요! 단 한 번도 제대로 부모 노릇을 한 적 없는, 문제투성이의 인간일 뿐이라고요!
야킨카! 너 지금…
됐습니다, 그만하세요.
장교는 고개를 저으며, 여교사의 말을 끊었다.
야킨카, 부모님이 떠나고 힘든 건 알겠지만…
입 좀 다무세요!!
그녀의 외침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흠칫 놀랐다.
부모, 또 부모 얘기! 왜 매번 그 얘기를 꼭 꺼내는 거죠?
벌주고 싶으세요? 좋아요. 지금 가서 그놈들이 다시는 남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더 패줄 테니까요. 다시는 고자질을 못 하게 아주 죽도록 패줄 거라고요!
야킨카는 몸을 돌려 교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잘 들으세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저는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슬퍼한 적 없어요!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그날 밤부터, 야킨카가 한없이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했던 집안은,
순식간에 모든 사람이 추앙하는 충렬의 가문이면서 인류의 가장 빛나는 별이 되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말했던대로, 사람들은 부모의 이름 때문에 그녀를 존중했고, 그 이름을 이유로 그녀의 모든 실수를 눈감아 주었다.
정작 야킨카는 <color=#CD2626>자기 몸에 흐르는</color> 가족의 <color=#CD2626>그 피가</color>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런 <color=#CD2626>영광</color> 따위는 단 한 번도 <color=#CD2626>원한 적</color>이 없었다.
야킨카가 바란 건 단 하나였다. <color=#FFD700>자기 자신으로</color> 사는 것.
<color=#FFD700>야킨카</color>로 살아가는 것.
누구의 딸이 아닌, <color=#FFD700>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color>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야킨카는 어른들이 자신의 배경을 의식해 억지로 참아주는 척한다면, 차라리 보란 듯이 더 엇나가주기로 했다. 그 얄팍한 인내심이 바닥날 때까지 그들의 한계를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중간고사 날, 그녀는 단말기의 데이터를 조작해 답안을 찾아냈고, 부정행위로 전교 1등을 차지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작은 속임수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킨카, 선생님이 내준 독서 과제를 전부 다 읽은 거야? 이 문제를 맞힌 건 너뿐이네.
솔직히, 네가 국어엔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전에는 선생님이 말이 심했다. 미안해.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네가 못 푼 문제는 선생님이 따로 설명해 줄 게.
야킨카는 자신이 갈망했던 존중과 이해가 이런 식으로 실현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비록 그 영예가 진짜 자신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타인의 칭찬 속에서 영웅의 딸이 아닌 "야킨카"라는 이름을 들었다.
야킨카, 이 모범생 표창기는 이제 네 거다.
여기 네 이름이 적혀 있다. 반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명예지.
그리고 운동 신경도 아주 좋더구나. 저번에 그 제이라는 녀석을 꼼짝 못 하게 제압했다면서? 체육 선생님들도 네 운동 능력을 인정하더라.
요즘 뭐 필요한 건 없나? 공부든, 생활이든 뭐든 말해도 좋다.
장교님이 운영하는 스카이다이빙 클럽에서 항공병을 많이 배출한다고 들었어요. 저도 거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클럽? 네 나이엔 훈련 강도가 버거울 거다. 게다가… 여학생은 아직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럼, 더 좋네요. 제가 첫 번째가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한 번 더 말씀드릴게요. 전 누구의 그림자도 아니고, "누구누구의 딸"도 아니에요.
전 야킨카예요.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어요.
그날 이후, 허위로 시작됐지만 너무도 소중해진 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야킨카는 미친 듯이 날갯짓했다. 사람들이 기대한 높이보다, 더 높이 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책상 앞에서든,
운동장에서든,
야킨카는 자신의 미미한 재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부모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모든 일에서 1등을 차지하려 애썼다.
공부, 운동, 싸움... 그리고 사교 활동까지 모든 방면에 노력했다. 야킨카는 타인의 칭찬을 능숙하게 얻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칭찬에 취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새 학기 첫날, 운동장 한켠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널 친구로 생각했는데, 넌 우리 얼굴도 못 알아보잖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미안해…
야!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몰라서 물어? 쟤 요즘 완전 유명하잖아. 어제는 여기저기 인사하고 다니더니, 오늘은 사람을 모른 척하고 말이야.
정말 미안해… 난…
불쌍한 척하지 마. 어제 내 간식을 다 받아놓고, 일부러 우릴 놀리는 거잖아?
이제 아무도 너하고 친구 안 해. 가자!
……
한 무리 학생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야킨카와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서 있는 소녀뿐이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이마에 붙었고, 소녀는 교복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작은 주름을 만들어 냈다.
야킨카는 한 걸음 다가가다가 우연히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침 안개에 잠긴 제비꽃과 같은 연한 보랏빛을 띤 눈동자에, 망설임과 당혹감이 투명하게 고여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눈빛이었다. 과거 "영웅의 딸"이라는 이유로 가식적인 친절이나 감시를 당할 때마다, 거울 속에서 수없이 마주했던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
문득, 황당하지만 선명한 생각이 야킨카의 뇌리를 스쳤다.
만약 이 세계에,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 아이에게 다가갈 사람이 없다면...
자신이 그 "첫 번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 저기.
늘 혼자였던 영혼은, 가족에게서 받지 못 한 애정을 채우기 위해, 병적으로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야킨카는 미소를 지으며 앞에 선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야킨카, 넌?
처음부터 친해진 건 아니었다. 마르가리타가 직접 금빛 팔찌를 채워 주고 나서야, 사람들 속에서 야킨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야킨카는 인생이라는 트랙을 쉼 없이 달려갔다. 상장은 쌓여 갔고, 명예는 점점 무거워졌으며, 마르가리타와의 깊은 우정도 어느새 미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주말 저녁, 추가 훈련이 끝난 뒤, 야킨카가 숨을 몰아쉬며 늘 가던 낡은 창고 옥상에 도착했을 때, 하늘엔 노을의 끝자락만 남아 있었다.
야—킨—카!
마르가리타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있었고, 옆에는 리본이 묶인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너 진짜 시간 개념이 없다니까. 나, 엄청 오래 기다렸다고!
다음에 또 이러면, 나 혼자서 케이크 다 먹어 버릴 거야. 흥~
…미안.
야킨카는 그녀 옆에 앉아 어깨를 가볍게 부딪쳤다.
케이크… 무슨 맛이야?
숨을 고르며, 땀에 젖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음~먹어 보고 싶어?
…응.
마르가리타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고, 보물을 다루듯 케이크를 두 손에 올렸다.
노릇하게 구워진 겉면은, 어딘가 야킨카의 머리색과 닮아 있었다.
입 벌려봐, 아~
마르가리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석양이 그녀의 손끝을 스치며 작은 은색 스푼 위에서 잠깐 반짝였다.
아—
어느새 야킨카는 이 관계에 깊이 빠져들어, 마르가리타의 모든 것에 신경 쓰게 되면서 오히려 "의존"을 갈구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야킨카는 이 특별하고 유일한 관계가 계속 이어져, 메마른 마음속 틈을 조금씩 채워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전학생이 그녀의 세계에 들어왔다.
누가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래.
교과서를 한 번 훑어볼 때 봤던 게 기억났어.
물론, 그 전학생은 많은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야킨카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벌려 전장의 혼란 속에서 마르가리타를 빼앗아 갔다.
자신이 믿었던 것, 사랑했던 것, 지켜야 한다고 여겼던 전부를 잃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뜨거운 생명들과 제대로 작별할 기회조차 잃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야킨카는 잠 못 이루는 밤마다 네티아의 환영을 몰아내고, 그녀와 얽힌 모든 기억을 지우려 애썼다.
하지만 왜, 다시 마주했을 때…
네티아를... 미워할 수가 없는 걸까?
수년간 쌓아온 모든 감정이 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져 꽉 쥔 손가락 사이로 소리 없이 빠져나가 버렸다.
촤르르륵...
붉은 안개가 생각을 휘감았고, 끝없이 깊은 우주가 조용히 그녀를 덮었다.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땅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끝없는 어둠 속에서 거칠고 흐릿한 형체 하나가 나타나 그녀 옆에 앉았다.
누님, 혹시 알고 있어? 누님은 아직 그날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지 못 했어.
제이? 네가 어떻게…
걱정 마, 누님은 아직 튼튼해서 주마등을 볼 때가 아니니까.
난 제이인 동시에 누님이기도 해. 누님이 구하지 못한 사람들, 누님 안에 남은 상처의 집합체야.
쿵… 쿵…
이 어두운 세계에 갑자기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한 번도 내려놓은 적 없지?
그럴 리가. 그 영감님을 따라 떠난 날부터, 난 여기 있는 모든 걸 이미 다 내려놨어.
사람의 상처는 거짓말을 안 해.
소년이 부드럽게 웃었다.
난 망각자의 일원이 되어 세계를 돌아다녔어. 침식체들을 처치하고, 공중 정원과도 대적했지.
20년 동안, 훨씬 더 참혹한 분쟁에 휘말렸고, 훨씬 더 비통한 이별을 수도 없이 봤어. 난 레인저야. 전장을 누비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그런데 무슨 근거로 카헤티가 평생 날 옭아매는 감옥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누님은 반만 얘기 했어. 수많은 전장으로 향한 다음엔, 뭘 했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구하러 갔어.
그러니까, 그날 하지 못했던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거잖아.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수없이 많은 해를 반복하면서 만족했어? 그 욕망이 조금이라도 채워진 적이 있어?
………
야킨카는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말아 쥐었다.
봐, 상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니까.
쿵… 쿵… 어둠 속 둔탁한 울림이 점점 더 크게 울렸다.
말해 봐, 넌...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인간에게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강한 건, 늘 뜨겁게 뛰는 그 심장/나>이야. 그걸로 자신을 들여다보면, 어떤 흉터도 숨길 수 없어.
그것/심장>은 이미 답을 보여줬어. 그것/나>은 누님이 직접 입으로 말하길 원할 뿐이야.
난…
둔탁한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울리며 빛이 없는 세계를 뒤흔들었다.
난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서 마르가리타를 구하고 싶어.
멀리서 무언가 깨지는 맑은 소리가 울리며, 희미한 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지금의 난 더 빨리 달릴 수 있고, 더 강해졌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그리고, 난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널 더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마르가리타에게 알려 줄 거야.
그녀는 굳어붙은 피딱지를 뜯어내고, 고름진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날로 돌아가서, 미쳐 날뛰는 네티아를 막아 세우고, 뺨을 두 대 세게 때린 다음 큰 소리로 얘기할 거야.
우린 가족이잖아? 왜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해? 잘난 척 좀 그만해! 난 너보다 훨씬 강해!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 짐을 나눠달란 말이야!
나 진짜, 진짜로 네가 싫어! 마르가리타를 빼앗아 간 것도 싫고, 다 신경 쓰고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싫어!
너한테 뭐 하나 지기 싫으면서도, 혹시 네가 뭐라도 놓칠까 봐 전전긍긍했어... 왜 그런 줄 알아?
널 간절히 원했으니까! 나에게 따뜻함과 포용을 가르쳐준 이 집을 그토록 그리워했으니까!
야킨카는 빛 하나 없는 인생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잖아? 수없이 넘어지고, 수없이 일어서고, 온몸이 멍들고 찢겨나가면서도... 그날, 그 순간으로 돌아간 척이라도 해서 너희를 단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보고 싶었을 뿐이야!
방황도 했고, 좌절도 했어. 그래도 버텨냈어! 내가 바라던 대로 믿음직한 어른이 되었는데.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애써봐도, 너희 웃는 얼굴을 다시는 볼 수가 없잖아!
난 빛나는 인생 따위는 필요 없어. 그저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너희와 함께 웃고, 울고, 아무것도 모른 채 너희와 함께 내일을 향해 달리고 싶을 뿐이야!
더... 아름다운... 내일로!!
마르가리타, 네티아… 너희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우린, 여기 있어.
따스한 힘이 시공간을 넘어 야킨카의 팔을 붙잡았다.
——?!
눈앞의 환영이 굉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화들짝 놀라 깨어나 보니 화염이 치솟는 "무덤"으로 돌아와 있었다.
굉음이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니, 자욱한 붉은 안개 사이로 "황금 참나무"가 웅장하게 서 있는 기념비를 뚫고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콰광... 폭발음이 하늘을 뒤흔들었고, 거목의 가지들이 윙윙거리며 요동쳤다. 야킨카는 그제야 강 건너편의 전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네티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아직도 싸우고 있구나.
야킨카는 뼈를 깎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견디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그 익숙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야킨카는 허리춤의 가방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간직해온 보물 하나를 조심스레 꺼냈다.
이번에는... 반드시 너희를 구해낼 거야.
야킨카는 그 보물을 손목에 가볍게 차고 격납고 문을 활짝 열었다. 시간 속에 잠들어 있던 영웅들이 마침내 다시 세계의 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이제, 그들이 출발할 차례였다.
가족을 되찾기 위해, 그 처절했던 승리를 되찾기 위해.
이 장관이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있던 인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얼룩덜룩한 색채가 변모하더니, 차츰 넓고 축축한 거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 위로는 붉은 현수막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흥겨운 음악 소리 속에서 현수막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기억이 났다. 아주 오래전의 "승리의 날"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 하늘은 잿빛이었고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직 소령이었던 그는 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했다. 제복의 핏자국은 여전했지만, 훈장만은 반질반질 닦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소령은 익숙한 대로를 달리며, 목을 빼고 기다리는 인파를 헤치고 어머니의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이 소령은 병단 지휘부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방사능 구역 확산을 저지한 공로자로, 세계 연합 정부로부터 "국민 영웅"이라는 숭고한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전투에서 산산조각 났다가 간신히 이어 붙인 듯한 몸을 이끌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어머니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얽히고설킨 아파트 단지 아래에는 여느 때처럼 최전선의 이야기에 목마른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바랜 전쟁 영웅 포스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 멀리 벌어지는 전장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다리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헉... 헉...
이 소령은 인파 속을 다급하게 훑어보았다. 극심한 피로와 부상, 거기에 집으로 향하는 강렬한 감정까지 더해져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마침내, 소령은 가까운 수돗가에서 무언가를 씻고 있는 포근해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 순간, 전장에서 억눌러왔던 무력감과 서러움, 고통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소령은 마침내 집을 찾은 아이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을 구원해 줄 것만 같은 그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어머니!
낡은 아파트 사이로 떠돌이의 외침이 메아리쳤고, 그 삑사리 난 목소리에 흰 비둘기 떼가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그리고 이내 이 소령은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수돗가, 나무 그늘, 창가... 수십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이 소령을 향했고, 그 모든 시선에는 간절한 애원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
이 소령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살짝 통통했던 뒷모습의 주인이 몸을 돌리자, 수심이 가득한 낯선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반짝이던 희망은, 눈앞의 청년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치수와는 맞지 않는 셔츠를 힘주어 빨기 시작했다.
왕 이모, 우리 어머니는요?
이 소령은 아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왕 이모의 아들은 3대대 소대장으로 복무하다가, 카헤티 전투에서 폭탄 가방을 메고 침식체에게 돌진했다.
……
왕 이모는 고개를 저었다.
오 아주머니, 우리 어머니는요?
오 아주머니의 딸은 자신의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아리샤 참모를 따라 불타는 카헤티로 향했다.
……
오 아주머니는 침묵하며 손을 저었다.
어머니!
이 소령은 속이 타들어 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떤 눈빛도 이 소령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하늘가에서 먹구름이 뒤틀리며 둔중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길어진 침묵 끝에, 인자한 모습의 노인이 소령 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난주에 침식체 몇 놈이 교외까지 침입해 왔었어.
소평과 마씨가... 당시 거기에 있었지.
소령의 동공이 순식간에 수축했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감이구나.
콰르릉—
이 소령은 머릿속이 펑 하고 터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의 모든 색채가 흐릿하게 뭉개졌다.
이 소령이 가장 먼저 느낀 건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난 억울함과 불공평함이었다. 수많은 의문이 개미 떼처럼 밀려와 그의 이성을 집어삼켜 버렸다.
이 소령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발작이라도 일으키고 싶었지만, 위장 속의 더러운 것들이 먼저 올라와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소평이 너에게 말하지 않았겠지만, 마씨는 네 어머니의 마지막 전우였다.
네가 태어나던 날, 그들 소대가 반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할 뻔했어. 죽은 척한 마씨만이 살아남았지.
그 후로 둘은 계속 죽은 전우들한테 미안해했어. 늘 전우들의 눈길이 자신들을 지켜보는 것 같다고 했었지.
열일곱, 열여덟... 함께 웃고 떠들며, 함께 피 흘리고, 함께 비를 맞던... 영원히 그 시절에 머문 전우들 말이야.
이제 바람이 그들을 한곳으로 모아주었으니, 다들 이 대지의 먼지가 되어 서로 헤어질 일은 없겠구나.
오늘날까지도, 이 장관은 자신이 그날 눈물을 흘렸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희망이 꺼져가던 그 수많은 눈동자만은 영원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이 그에게 남긴 가르침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무거운 죄책이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염원을 되새기며, 역사의 깊은 상처를 짊어진 채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숙명이었다.
이 장관의 남은 생은 전우들의 희생을 영원히 짊어져야 했고, 그 대폭발의 기억은 결코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쿵——
둔탁한 천둥소리가 굉음으로 변해 하늘을 찢을 듯 울려 퍼지며, 이 장관을 다시 혼잡한 대열 속으로 불러들였다.
!
이 장관은 물속에서 건져진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폭발음, 주변 사람들의 숨소리 같은 현실의 소리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멀리 "황금 참나무"가 도시의 속박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거대한 가지들은 굉음과 함께 진동하고 있었고, 자욱한 안개 속의 형상은 그 옛날 폭발하던 연기구름을 떠올리게 했다.
방금 그건... 붉은 안개?
이 장관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처럼 멍하니 고개를 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과 마주쳤다.
나... 아버지를 봤어.
난로 앞에 앉아 계셨는데, 고개 숙이지 말고 계속 앞으로 가라고 하셨어.
다들... 보셨어요?
네. 엄마가 보였는데, 안개 속에서 절 보며 웃고 계셨어요.
그리고 슬퍼하지 말라고... 제 주변의 많은 것들로 변해 계속 곁에 있어 줄 거라고 하셨어요...
눈부시게, 한없이 밝게 빛나다가... 마지막에는 그 폭발을 다시 보았어요. 그러고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어요.
………
비통한 감정이 교차하며 일렁였다. 모두가 환상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엿보았다.
상처의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은 날, 같은 순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예비 계획을 실행해야 합니다. 운송 장비를 탈환해야만 살길이 열립니다.
저희, 정말로 이 안개를 벗어날 수 있나요? 하늘을 좀 보세요. 저렇게나 빨리 퍼지고 있는데…!
죽는소리해 봐야 무슨 소용없어! 시도라도 하지 않으면 다 여기서 죽는다고!
그럼, 도망친 다음에는요. 우리 카헤티 사람들은... 어디로 갈 수 있죠?
장관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혼란 속에서 부관 한 명이 이 장관을 바라보았다.
……
장관은 목울대를 움직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안개 깊은 곳에서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해가는 거대한 나무의 윤곽을 좇을 뿐이었다.
4호 원자로는 영점 에너지 엔진이랑 똑같아.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개 형태의 퍼니싱은 멈추질 않아. 지금 끄지 않으면, 퍼니싱은 계속 퍼져나갈 것이고… 두 달도 안 돼서, 공중 정원 놈들은 지구 전체가 핏빛으로 덮이는 꼴을 보게 되겠지.
붉은 안개가 멈추지 않고 확산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카헤티 주민들의 생사는 물론, 인접한 보육 구역과 지구 전체의 운명까지도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네티아... 그리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이 장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두 사람의 힘으로, 과연 저 거대한 거목을 멈출 수 있을까?
………
등 뒤의 먼 지평선이 핏빛으로 물들면서 하늘 전체가 진동하며 불타오르는 듯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그 피비린내 나던 새벽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 장관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두웠던 세월 속에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순간, 그들의 시선 너머로 전우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여러분.
이번에야말로, 이 장관은 한때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지금 이 순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네티아는 강 건너편에서 이 세계, 그리고 저희를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침묵과 함께 이 장관을 응시했다.
그날, 똑같이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무슨 말을 했던가?
이 장관은 그 말을 잊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카헤티 사람들이 내린 선택만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이 장관은 코트를 벗어 던지고 군모를 착용했다.
저희를 탈출시켜 주었던 "스파르타쿠스호"가 지금 강변에 정박해 있습니다.
저는 위성 도시로 돌아가서 그 배를 몰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도와 "황금 참나무"를 부숴버릴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마지막 순간까지 싸워, 철수 작전의 마지막 희망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 장관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결연하게 몸을 돌렸다.
저는 여러분의 아버지 세대와 함께 지내면서 이런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역사에 새겨진 모든 글자는 우리를 비추고, 치열하게 살아온 수천만 보통 사람들의 삶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무게를 결정하는 건 화려한 미사여구도, 깊이 있는 글귀도 아닙니다.
바로, 이 처절한 투쟁의 길에서,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이 어떤 행복까지 희생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이 장관은 이 땅의 마지막 순간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람들에게 전해주세요. 저는 정말로 좋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찬란한 노래와 같은 제 생명입니다. 저는 용기 있게 제 잘못을 직면하고, 희망과 작은 불씨를 내일로 가져가겠습니다.
제가 떠난 뒤의 카헤티… 여러분의 미래는, 이제 여러분 스스로가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말을 마친 이 장관은 발걸음을 내디뎌, 불빛이 일렁이는 죽음의 길로 뛰어들려고 했다.
이 장관님!
이 장관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카헤티가 장관님만의 도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저희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일이 우리에게 닥쳤는데 그걸 외면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 장관은 앳된 소년이 자신의 키만 한 무기를 짊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장관님 혼자서는 석탄도 제대로 퍼 올리지 못하시잖습니까. 저희가 "스파르타쿠스호"의 시동을 거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장관은 노동자들이 굳은살 박인 손을 들어 올리며 굳건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았다.
장관님, 저희는 카헤티의 마지막 위수 병단입니다. 연합 정부의 깃발 아래, 이미 지구의 모든 자손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장관은 외팔이 병사가 남은 한 손으로 권총을 단단히 쥐고, 이빨로 고정 끈을 조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았다.
얼굴에 석탄 가루가 묻은 젊은 광부, 낡은 앞치마를 두른 식당 아주머니 그리고 기념비 앞에서 망연히 서 있던, 폭발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과묵한 소년까지…
지금 이 순간, 그들 모두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다들…
함성도, 맹세도 없었다. 그저 말 없는 미소와,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꽃을 품은 듯한 차분한 눈빛뿐이었다.
이 장관은 천천히 몸을 돌려 거수경례를 올렸다.
장관님...
학생이 다가와 이 장관 앞에 멈춰 서더니, 단정한 제복의 먼지를 조용히 털어주었다.
지금의 장관님이야말로, 그 어떤 때보다 이 제복에 잘 어울리십니다.
몇몇이 더 앞으로 나오더니, 자연스럽게 이 장관의 곁에 서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 순간, 이 장관은 몽롱해졌다. 눈앞의 살아 숨 쉬는 굳건한 얼굴들 너머로, 또 다른 익숙한 모습들이 겹쳐 보였다.
안전모를 고쳐 쓰며 격려의 미소를 보내던 그레고리.
얼굴의 피와 먼지를 닦아내며 경례하던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자나 대대장.
마지막으로 어깨를 두드리고 미소를 지으며 화염 속으로 사라지던 아리샤 참모장.
낡은 작업복과 국방색 군복을 입은 수많은 그림자가 역류하는 인파 속에서 뒤를 돌아보며 이 장관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장관은 언제나 뜨겁고, 언제나 젊었던 그 생명들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똑같이 미소 지었다.
자, 갑시다. 여러분…
이 장관은 군모를 고쳐 쓰고, 불타는 고향을 향해 돌아섰다.
승리를 위해 외칩시다. 우리가 분명히 살아 있었음을 이 세계에 알려 줍시다!
이 장관의 뒤에는 더 이상 고독한 그림자가 아닌, 노동자와 병사, 학생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선이 서 있었다.
카헤티의 모든 불씨가 모여, 희망을 잃지 않는 생명들의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카헤티를 위하여! 살아있는 모든 이들과 쓰러져 간 이들을 위하여!
더 아름다운 내일을 위하여!
수십 년의 고난을 겪고도, 이 위대한 사람들은 다시 한번 똑같은 선택을 했다.
비록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미약하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연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