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 하지… 마…
마지막 침식체가 금속음을 내며 쓰러졌다. 도로 끝에 서 있던 은발의 소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휘청거렸다.
다들...
그녀는 무릎을 꿇으며 고통스러워했다. 피부는 깨진 도자기처럼 갈라져 녹아내렸고, 그 틈새로 눈부신 황금빛이 넘쳐흘렀다.
이윽고, 그녀의 몸은 수많은 빛의 파편으로 부서지며, 금빛 눈송이처럼 안개 낀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하하하하! 환영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황금 참나무"!
승격자는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며, 멀리 서 있는 거목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네티아의 거대한 낫이 내리쳐지고, 침식체 하나가 시체처럼 튀어 올라 존·도의 앞을 막아서며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우리 둘이 함께 길러낸 결실이지, 네티아 총감.
우리가 아는 사이였나? 그리고 난 죽은 자의 수수께끼 따위엔 관심이 없어.
번개와 함께 낫 날이 다시 휘둘러졌고, 타오르는 금속 파편을 가르며 그대로 존·도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포탄은 같은 탄흔에 두 번 떨어지지 않아.
승격자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자, 발밑에 널린 새까만 시체들이 즉각 반응하며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존·도의 앞에 달라붙어, 하나의 철벽을 이뤘다.
네티아는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
레이븐!
——?!
측면으로 우회한 인간이 방아쇠를 당겼고, 탄환이 불길처럼 쏟아져 존·도의 몸을 덮쳤다.
특수 탄두가 철갑을 꿰뚫고 내부 구조를 녹여버렸다. 존·도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바닥에 엎드린 저거… 더 이상 움직임이 없는거 맞죠?
전투가 끝난 걸 눈치챈 난민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서, 설마… 승격자 죽은 건가요?
쿨럭…!
네티아는 순환액을 토해내며, 낫을 꽉 쥔 채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승격자는 붉은 안개를 조종할 수 있어... 조금 전에 놈한테 한 방 먹었어. 쿨럭!
네티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휘관 앞에서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살아남은 난민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대부분 온몸에 상처를 입은 난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
네티아는 지휘관에게 대답하는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긴 침묵 끝에, 네티아가 천천히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치 지휘관에게 불만을 토해내듯, 몸의 체중을 전부 상대방에게 실었다.
방금 제 단말기에 통신이 잡혔는데, 강 남쪽에 위성 도시가 있대요. 거기에 여과탑이 있어서 어쩌면...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제가 그 근처에서 납치당했어요. 승격자가 제 친구 모습으로 변장하더니…
삐삐삐—
네티아 허리에 있던 차단기가 경고음을 울렸다. 흩어졌던 붉은 안개가 다시 몰려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
정화 시스템으로 붉은 안개를 완전히 제거하진 못하지만, 어느 정도 억제하는 건 가능해. 만약 위성 도시의 여과탑이 아직 작동 중이라면…
네티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론상 그곳이 현재 가장 가까운 안전 구역이야.
오던 길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강가에 승격자가 남겨둔 작은 배가 하나 있는데, 저희 정도면… 좀 비좁아도 탈 수 있을 거예요.
겁에 질려 굳어 있던 얼굴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희미한 기대를 품은 채, 지휘관의 마지막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휘관 일행은 방사능 구역 깊숙이 들어가려던 계획은 잠시 접어두고, 난민들을 데리고 서둘러 철수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갈라진 도로 위를 비틀거리며 따라왔다. 다행히 이동 중에 적은 없었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비교적 안전했다.
십여 분이 지나자, 귓가에 들리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고, 어깨에 실려 있던 무게도 전보다 가벼워졌다. 네티아가 서서히 붉은 안개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 애는…
그럼, 오늘부터 우린 친구인 거네.
윽…!
네티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표정이 굳고, 호흡이 급격히 흐트러졌다.
네티아, 꼭 █▇█▇▇▄야 해.
네티아의 머릿속에서 수천 자루의 칼날이 서로 긁어대는 듯한 날카롭고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겠어.
마르가…리타…
차가운 응축액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네티아는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안쪽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려는 것처럼, 살과 피를 찢어 삼키는 감각이 꿈틀거렸다.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고통이 파도처럼 허리까지 밀려왔다.
희미한 이름과 얼굴들이 뒤엉켜 네티아의 신경을 끊임없이 짓눌렀다.
무너져 내리려던 순간, 곁에서 익숙한 온기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앞을 가로막고 있던 진흙탕을 힘껏 갈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