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울창한 숲을 빠져나와 포탄 자국이 가득한 계곡을 하나 지나면, 곧 강가 끝자락에 자리한 폐허가 된 도시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부서진 여과탑을 중심으로 각종 건물들이 원형으로 퍼져 있고, 안개에 뒤덮인 구조물들은 흐릿하게 흔들리며 마치 모래 바다 위에 떠오른 신기루처럼 실체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곳이 바로 "위성 도시"이고, 여기서 강을 건너면 곧바로 카헤티 방사능 구역이다.
카헤티 위성 도시
혈청 세 통, 7.62 전위력 탄약 다섯 개, AP랑 API 혼합이야. 자, 누님.
어두운 조명 아래, 제이는 운반 카트를 천천히 야킨카 앞에 세웠다. 카트 안에는 그녀가 요청한 보급품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마워.
야킨카는 창고 안에 높이 쌓인 나무 상자 위에 걸터앉아 걸레로 총기 부품을 하나하나 닦고 있었다.
이거 가져갔다고 공중 정원 놈들이 널 군사 법정에 세우지는 않겠지?
에이, 그럴 리가. 지금 우리한테 부족한 건 무기보다 사람이야. 게다가… 정부랑도 그렇게까지 험악한 사이는 아니잖아. 이 정도로 잡혀갈 일은 없어.
야킨카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채, 복잡한 표정으로 무기를 다시 조립했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세계 정부 녀석들이 괴롭히지는 않았어?
괴롭힘 같은 건... 딱히 없었어. 공중 정원도 우리를 꽤 존중해 주는 편이었고. 깃발만 바뀌고, 가끔 시찰 나오는 거 말곤 여전히 카헤티 사람들끼리 알아서 버티는 중이야. 크게 달라진 건 없어.
그러니까 카헤티 사람들을 방사능 구역 바깥에 던져 놓고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지원도 안 했다는 거네.
다들 사정이 어려우니까…
제이는 카트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전시 통제 때문에 사람 이동도 거의 없어. 먹고 입는 건 빠듯해도,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야. 그럭저럭 버틸 만해.
어릴 땐 종종 그런 생각도 했었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기술과 지식으로 역사를 바꿔서 인류를 더 빨리 황금기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왜? 어느 황제한테 스카우트 1만 명쯤 공중 투하해서 퍼니싱의 싹을 미리 잘라 버리기라도 하게?
진짜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때 그런 상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땅은 있어도 씨앗이 없고, 트랙터랑 분리기는 있어도 기름이 없어서 전부 여기 쌓아둔 고철이 됐어.
그는 창고 안쪽을 힐끗 바라봤다.
농사지을 사람도, 희토류 캐낼 사람도, 제련할 사람도, 리벳 하나 만들 사람도 없어. 현대 산업이라는 게 그물처럼 얽혀 있어서, 한 군데만 끊어져도 전체가 무너져 내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던 현대 생활이 얼마나 복잡하고 또 소중했는지, 거대한 집단의 자원 교환에서 벗어나면 어떤 작은 사회도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난 이거야말로 퍼니싱의 가장 무서운 점이라고 생각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우리를 하나하나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서 문명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말이야.
...어디서 그런 말들을 배웠대. 예전엔 이렇게 감성적인 녀석 아니었잖아.
사회만큼 냉철한 스승은 없으니까.
제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물자 가져가는 대신, 뭐 도와줄 건 없어?
아니, 위성 도시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 누님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제이는 그 편지를 떠올렸다.
누님 명성은 우리도 다 들어서 알고 있어. 유명한 망각자 "레인저"는 분명 더 중요한 임무가 있을 거야.
레인저는 망각자 산하의 소규모 무장 조직으로, 정예 구조체나 숙련된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침식 구역 가장자리를 떠돌며 난민을 구출하고 "오아시스"로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주 임무다.
그리고 야킨카가 바로 그 일원 중 한 명이다.
...그 편지는 며칠 전 네티아한테서 온 거야. 아딜레 대폭발이 마르가리타, 그리고 승격자와 뭔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더군.
그걸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는데, 발을 들이자마자 방사능 구역 확산이라니. 참...
승… 승격자? 네티아는 뭐라고 했어?
자세한 얘긴 없었어. 편지 내용이 온통 수수께끼 투성이라, 총사령관님도 처음엔 무시하려고 했지, 그러다…
누구야?!
희미한 발소리를 포착한 야킨카가 순간 몸을 돌려 총을 겨눴다.
오랜만이다, 야킨카.
수척하고 키 큰 남자가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 장관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여긴 내 도시다. 너희들의 작은 움직임도 전부 훤히 꿰뚫고 있지.
물론, 레인저 한 명의 행적도 포함해서 말이야.
여전히 거만한 태도였지만, 목소리에는 예전보다 훨씬 깊은 무게와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교관님 말투도 여전히 재수 없으시네요.
퇴역한 지가 언젠데. 이젠 장관이라고 불러.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야킨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순간, 여전히 바닥을 알 수 없는 오만함을 느꼈다.
방금 네가 한 말을 다 들었다, 레인저. 임무가 있다면서, 언제 출발할 거지?
그건 카헤티가 저를 받아줄 생각이 있는지부터 봐야겠죠. 지금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 정보를 더 모을 필요가 있어요.
따라와.
이 장관은 뒷짐을 진 채 몸을 돌려 걸어갔고, 반질반질한 구두가 시멘트 바닥 위에서 또각또각하는 소리를 냈다.
어딜 가려고요?
오랜만에 왔는데, 고향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아야지.
낮게 깔린 안개 속에 축축한 흙 내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회색 하늘이 도시와 대지를 짓누르듯 내려앉아, 마치 납으로 된 관 속에 들어온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야킨카는 질퍽한 거리 위를 걸었다. 양옆의 건물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임시로 세운 난민 텐트가 시야 끝까지 이어져, 썩은 나무에 돋아난 균사처럼 이미 무너진 건물들을 더 거칠게 뒤덮고 있었다.
표 받은 사람은 이쪽으로! 한 사람당 한 국자다, 질서 지켜!
외지에서 몰려온 난민들이 큰 솥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대부분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눈빛엔 생기가 없었다. 솜이 삐져나온 누더기를 걸친 이들도 있었고, 피가 묻은 군복 차림의 병사들도 섞여 있었다.
웩…! 이 빌어먹을 안개 때문에 미치겠네, 진짜!
조금만 참으세요. 저희 쪽 혈청도 이제 거의 바닥났어요…
혈청 따윈 소용없어! 아무 소용도 없다고! 제발 그냥 잘라 줘… 아파서… 아파서 더는 못 버티겠어!!
위성 도시의 주민들 역시 집에 있는 건 죄다 내놓고 그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붉은 안개의 영향 속에서 절망은 여전히 번져가며 사람들의 인내심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야킨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도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제 경험상, 이 정도 숫자의 난민에 치안 문제까지 터지면 당신 병력으론 5분도 못 버텨요.
위성 도시 인구는 원래 2,832명이다. 그런데 지난 24시간 동안, 난민이랑 패잔병이 2,000명 넘게 밀려들어 왔지.
거의 같은 시각에 침식체들이 동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다. 우린 큰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밀어낼 수 있었지.
지금 병력으로는 외곽 방어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한계다. 적이 코앞에 있는데, 이 사람들을 감시하겠다고 총구를 더 늘릴 여력이 없어. 최대한 믿는 수밖에 없다.
멍청한 로봇들한테 토막 나는 것보단 차라리 인간 손에 죽는 게 낫지.
그는 코트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며 현실적인 판단을 덧붙였다.
지금 생산량으로 4,000명을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여기에 틀어박혀 있으면 자원 문제부터 터질 거예요. 로봇들이 오기도 전에 끝장난다고요.
판단은 정확하군. 설령 내부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붉은 안개에 삼켜질 거다.
그래서 병력을 모아 사람들을 데리고 돌파할 생각이다. 침식체 포위를 벗어나야지.
4,000명을 데리고 퍼니싱 한가운데서 대탈출이라… 지금 보유 중인 병사가 400명이라도 되나요? 당신이 뭐 스파르타쿠스예요?
위기에서 사람들 구해내는 솜씨라면, 레인저가 나보다 훨씬 낫지 않나?
그는 걸음을 멈추고 야킨카를 바라봤다.
제 동료들도 각자 맡은 역할이 있어요. 제가 보모 노릇 할 사람으로 보이세요?
야킨카, 이 도시에 갇힌 건 공중 정원 사람들만이 아니다. 카헤티 시민 3,000명 그들도 전부 네 동포다.
전 망각자 소속이고, 여긴 제 집이 아니에요… 적어도 지금은 그래요, 교관님.
만약 우리가 성공한다면, 적어도 위기의 순간에는 공중 정원보다 오아시스가 더 믿음직하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지.
신뢰라는 씨앗만 심어지면, 망각자가 필요할 때 카헤티는 언제든 꽃을 피울 수 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 않나?
……
야킨카는 혀를 한 번 차고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감았다.
전 다른 할 일이 있어요. 마르가리타를 찾…
탕——!
갑작스러운 폭음이 하늘을 가르며 울렸다. 사람들은 하던 걸 멈추고 멍하니 남쪽 성문을 바라봤다.
총성이 울린 방향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소리는 순식간에 뒤엉켜 혼란과 소란으로 번져 갔다.
야킨카와 이 장관은 눈이 마주치자 거의 동시에 무기를 집어 들고 빠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무너져 가는 초소 아래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의 방어선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 초소를 넘는 순간, 탈영병으로 간주해 현장에서 사살할 것이다!
선두에 선 병사가 목이 터지라 외치고 있었다. 강철 투구 아래로 땀이 흘러내려 방아쇠울 안쪽, 하얗게 질린 손가락 위로 떨어졌다.
여긴 약이 다 떨어졌어! 벌써 사흘째 고열이야! 파상풍 혈청이 없으면… 죽는다고!
앞장선 남자는 의식을 잃은 소녀를 끌어안은 채, 미친 들소처럼 인파를 향해 몸을 던졌다.
밖은 전부 침식체다! 우리 소대는 너희 같은 배은망덕한 놈들 구하려다 절반도 살아오지 못했어!
흥분이 극에 달한 병사는 갑자기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마지막 경고다! 진짜 쏴버리기 전에 물러서!
병사가 깊은숨을 들이쉬며 연기 나는 총구를 군중에게 겨누자, 시끄럽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서로 부딪치던 두 개의 격류가 동시에 멈췄다. 분노와 혼란이 사람들 얼굴 위에 그대로 떠올랐다.
그때, 군중 한가운데서 가늘고 약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바닥에 떨어진 은 바늘처럼, 모든 침묵과 망설임을 단번에 깨뜨렸다.
그래, 쏴 봐! 할 수 있으면 우릴 전부 다 쏴 죽여 보라고!
사격!!
그 순간, 그림자 하나가 튀어 나와 두 무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진정해.
방아쇠가 당겨지기 직전, 야킨카의 손이 정확히 병사의 손과 총 사이 틈으로 파고들었다.
찰칵, 그녀는 재빠르게 노리쇠를 젖히고 탄창을 빼낸 후, 총열을 움켜쥐고 강하게 비틀어 잡아당겼다.
짧고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과 함께, 병사의 무기는 마치 조립 블록처럼 순식간에 분해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가 경악하며 쳐다보는 가운데, 야킨카가 천천히 오른손을 펴자, 총열이 쨍그랑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총은 동포가 아닌 적에게 겨눠, 총 간수 잘해.
너, 넌 뭐야?!
집을 떠난 카헤티 사람.
그녀는 몸을 돌려, 난민의 품에 안긴 소녀를 바라봤다.
…몇 살이에요?
열여섯이요.
……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이런 또래의 아이를 볼 때마다 자꾸만 과거의 자신…
혹은, 지나가 버린 누군가와, 어떤 일들을 떠올랐다.
야킨카는 조심스럽게 소녀의 뺨에 손을 얹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그녀는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불 속에 있는 돌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그 솜씨… 처음 보는데, 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야?!
무기 버리고 검문에 응해!
그럴 필요 없어, 야킨카는 우리 아군이다.
군중 깊은 곳에서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그 정체를 알아차리고 자연스럽게 양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열었다.
자, 장관님?! 하지만 저 사람은…
이 장관은 가볍게 손을 들어 상대의 말을 끊었다.
이제, "아군" 맞지? 야킨카.
…교관님. 레인저에 대해 알고 계시니 말씀드리는 건데, 저 몸값 꽤 비싼 편입니다.
야킨카는 불안으로 가득한 군중을 둘러본 뒤, 짧게 숨을 내쉬고 네티아의 편지를 배낭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나중에 계산할 때, 교관님의 그 비싼 차를 파셔야 할 걸요.
그러지.
이젠 통이 좀 크시네요? 그럼 앞엔 터보 달리고, 뒤에선 불 뿜는 놈으로 준비해 주세요.
이 장관은 말없이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야킨카에게 던졌다.
어느 게 그거죠?
이 장관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전부 다 네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