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의식은 깨어나기 직전의 경계를 헤매고 있었고, 잡음이 뒤엉키면서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승격자… 피해가…
시간이 질서 없는 공간 속에서 팽창했다.
침식... 도망... 어서!
붉은 안개가... 퍼지고 있어!
어디선가 본 듯한 환영이 오감을 잠식했다. 포효하는 파도처럼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내며, 척수 깊숙한 곳으로 얼어붙을 듯한 통증을 전했다.
레이븐.
아주 짧은 순간, 따뜻한 무언가가 악몽을 밀어냈다.
[player name].
부드럽고 다정한 부름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손을 잡아당겨, 따뜻한 빛을 가르며 깊은 어둠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진흙처럼 끈적이던 악몽이 뿌리째 뽑히고, 아름다운 실루엣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다.
하, 자는 얼굴이 꽤 귀여운걸.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과학 이사회 안전 총감, 네티아야.
따라 해 봐.
좋아. 머리 위 상처는 심하지 않네. 두개골 절개 수술은 생략해도 되겠어.
그녀는 몸을 가까이 기울여, 상대방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동공 반응도 정상, 아주 좋아.
오른쪽 다리 안쪽에 파편상이 있어서 방금 임시 지혈을 해뒀어. 이제 풀어서 확인해 볼 차례야.
그녀는 옆에 놓인 대야에서 가위를 집어 들고, 지휘관 몸 아래의 너덜너덜해진 제복을 가리켰다.
괜찮으면, 지금 시작해도 될까?
음, 아픈 걸 무서워하는군. 나쁘지 않은 체질이야. 기억해 둘게.
그녀는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으로 붕대를 잘라냈다. 숙련된 움직임에서 강한 안도감이 전해져왔다.
활동성 출혈은 없지만, 상처 가장자리에 오염이 있어. 변연 절제가 필요해.
국소 마취와 파상풍 항독소를 투여한 뒤 봉합할게. 과정 중에 약간 따끔거릴 수 있어. 조금만 참아.
그녀는 연보라색 긴 머리를 정리하더니, 곧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마취 주사를 놓기 전, 그녀는 지휘관 다리에 드러난 다른 몇 개의 흉터를 보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어쩌다 혼자 방사능 구역에 쓰러지게 된 거야? 윗분들이 아주 난리가 났어.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미간이 지끈거리고, 흐릿한 기억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3시간 전
3시간 전.
...현지 부대의 포위 속에서, 승격자 존·도는 카헤티 방사능 구역 가장자리까지 몰려났다.
"아딜레 대폭발"이 무엇인지는 이미 파오스에서 배웠을 텐데.
대폭발 이후, 폭심지를 중심으로 수천 제곱킬로미터에 걸쳐 안개 형태의 퍼니싱이 발생했다. 우리는 그걸 "붉은 안개"라고 부른다.
사건 자체가 핵 방사능 사고처럼 들리다 보니, 현지에서는 붉은 안개가 뒤덮인 지역을 통칭해 "방사능 구역"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존·도는 카헤티 방사능 구역의 경계에 숨어 있다. 그곳은 과거 아딜레 연맹의 주요 지상 거점 중 하나였지.
현재 진행 중인 일반 임무는 모두 중단하고 카헤티로 이동한 뒤, 지상 부대를 지휘해 승격자를 추격해.
하산 의장의 제안이다. 그리고 의장 나름의 판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네 대원들은 다른 전투 구역에서 이동 중이니, 상황이 급박한 만큼 먼저 출발해.
그리고, [player name], 어떤 이유에서든 방사능 구역과의 접촉 및 진입은 엄격히 금지한다.
붉은 안개는 적조처럼 특수한 성질을 띠고 있다. 인간이나 구조체에 대한 물리적 피해는 크지 않지만, 정신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켜. 구체적인 증상은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아딜레 대폭발 이후 지난 29년 동안…
방사능 구역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1시간 전
1시간 전.
ECHO-1, HQ 응답하라...!
ECHO 소대가 B-77 지점에서 승격자의 기습받았습니다! 반복합니다! ECHO 소대가 B-77 지점에서 승격자의 기습받았습니다! 아군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습니다!
붉은 안개가 확산 중입니다! 대피시켜야 할 난민 수가 너무 많아, 더 이상 버티기 힘듭니다!
HQ, 들리십니까?! HQ!
안 됩니다! 지휘관님은 최우선 보호 대상입니다! 저희가…
알...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잠잠했던 방사능 구역에 이렇게 많은 침식체가 숨어 있으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휘관이 전투 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침식체들은 정면 방어선을 우회해 날카로운 칼날처럼 지휘부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급히 대응에 나섰지만, 총탄은 황야 위에서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흩날릴 뿐이었다. 침식체 하나를 쓰러뜨리면, 그 뒤에서 또 다른 흉측한 철제 팔이 덮쳐 왔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인 존재는, 멀지 않은 고지대에 서서 이 불공평한 전쟁을 광기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울이 아주 조금만 기울어도, 너희는 스스로가 승리를 결정짓는 추라고 믿지. 그게 바로 반격 시대가 너희에게 주입한 오만과 착각이다.
내 휘하의 말은 끝이 없다. 이 녀석들을 상대하면서 뒤에 있는 오합지졸들까지 챙기려면 얼마나 더 애를 써야 할까,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그거참 유감이군. 애초에 내 체스판은, 전사들이 짐승 떼와 싸우는 이 무대 위에 놓여 있지 않다.
봐라. 성장의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너는 아주 영광스럽게도, "그녀"의 첫 번째 양분이 될 거다.
승격자가 흉측한 웃음을 지었다. 지휘관은 그제야 주위의 산과 들판 사이로 기괴한 붉은 안개가 넘실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녹슨 피 냄새 같은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순간, 시야가 뒤집히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멀어져갔다.
동력갑의 보호 아래라면, 이 정도 농도의 퍼니싱은 자신에게 이런 압박을 줄 리 없었다.
의식이 흐려지고 멀어지는 가운데, 승격자의 마지막 예언이 귓가에 맴돌았다.
싹은 이미 심어졌다…
이제, 다음 사냥감을 무대에 올릴 차례다.
그게 다야?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네티아는 마지막 붕대 한 겹을 잘라내고, 마치 편지지의 말린 끝을 펴듯, 손끝으로 가장자리의 주름을 부드럽게 눌러 정리했다.
…아직도 아파?
응, 몸이 꽤 튼튼해 보이네.
후— 이제 아프지 않지?
그녀는 몸을 기울여, 지휘관 귀 가까이에 장난치듯 가볍게 숨을 불어넣었다.
바로 여기야.
카헤티 실험 중학교. 그녀는 실내의 얼룩진 벽면을 가리켰다.
이것 때문이야.
네티아는 허리에 착용하고 있던 장비를 들어 지휘관 앞에 내밀었다.
붉은 안개 차단기야. 원리는 Ω 장치와 유사하고, 일정 범위 안에서 붉은 안개를 중화하는 미립자를 생성할 수 있어.
운이 좋네. 그 누구보다도 붉은 안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거니까.
그녀는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치를 총 두 대 가지고 왔어. 어차피 같이 움직일 거니까 나머지 다른 한 대는 예비용으로 남겨둘게.
네티아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임무 수행. 과학 이사회를 위해 면역 시대의 실험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어.
네티아의 말을 듣고, 곧바로 단말기를 열어 좌표 정보를 송신하고, 군부에 통신을 시도했다.
삐, 전용 회선이 즉시 연결되었다.
하지만 연결과 동시에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진?
실내는 위험해. 레이븐, 일어설 수 있겠어?
네티아가 지휘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통신은 거의 동시에 끊겼고, 네티아는 신속하게 문을 열고 지휘관을 카헤티의 텅 빈 거리로 이끌었다.
그 순간, 멀리 떨어진 건물들 사이에서 하늘을 뒤흔드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대지가 굉음과 함께 뒤틀리면서, 발밑의 잔해들이 튀어 올랐고, 귀를 찌르는 이명이 온 공간을 가득 채웠다. 도시의 골격이 거대한 힘으로 억지로 찢기고 꺾이는 것만 같았다.
거리가 갈라지고 건물들이 비명을 질렀다. 강철 외벽이 폭음 속에 부서져 유리 조각처럼 쏟아져 내렸다. 죽은 도시나 다름없는 카헤티의 시체가 지하에서 솟구치는 폭력적인 "신생"에 의해 강제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 속에서, 어떤 힘이 진흙과 암반을 찢어발기며, 아득한 심연에서 지면을 뚫고 솟아올라 곧장 하늘을 꿰찼다.
수없이 늘어진 덩굴에서는 빛의 물방울이 떨어지고, 부서진 건축 잔해와 금속 파편들이 천천히 회전하며 마치 성환처럼 그것의 외곽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황금빛이 흐르는 "거목"이었다.
마천루와 맞먹는 굵기의 뿌리와 줄기, 거대한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흐르는 금빛처럼 번져 나갔다.
이건…
단말기 패널의 퍼니싱 농도가 치솟았고, 붉은 안개 차단기도 불안한 경고음을 토해냈다.
연결이 실패하면서, 거친 잡음이 귀를 가득 채웠다.
연결 실패, 연결 실패…
싹은 이미 심어졌다…
이제, 다음 사냥감을 무대에 올릴 차례다.
승격자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이 광경도, 혹시 승격자와 관련이 있는 걸까?
방금 목격한 참상을 떠올려보면, 방사능 구역이 계속 확산할 경우 닥쳐올 재난과 희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저기가… 카헤티 연구소야.
네티아가 땅을 뚫고 솟아오른 거목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든 재앙의 시작점이기도 하지.
찬란한 광휘 속에서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황금빛 눈송이처럼,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대륙 전역으로 흩날리듯 퍼져 나갔다.
카헤티 방사능 구역 외곽
같은 시각
한편 카헤티 방사능 구역 외곽
……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속에서 여자 병사가 관목 숲을 헤치고 언덕 위에 섰다. 그녀는 모자챙을 잡고 전율하는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그 굉음은 대체 뭐야… 젠장! 대장님, 이 차량도 완전히 멈췄습니다!
시간 없어! 다른 차량에 실린 중화기를 전부 분해해서 챙겨! 우선 후퇴한다!
하지만 이 장비 없이 침식체랑 마주치면… 대장님, 저희 다시 돌아오는 겁니까?
저 앞 위성 도시에 수천 명이 고립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즉시 철수한다. 상부 명령이야. 저 귀신 같은 안개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해.
이것저것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명령대로 움직여.
서둘러 진행된 철수도 곧 끝나고 있었다. 이 어설픈 포위 섬멸전은, 결국 인간 측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쳇, 도련님들 납셨네. 기세 좋게 덤빌 땐 언제고, 오합지졸이 따로 없군.
이길 땐 군민 단결이니 뭐니 떠들다가, 불리하니까 시민을 내팽개치고 튀는 꼴을 보니 아주 공중 정원답네.
그녀는 껌 포장지를 벗기며, 높은 곳에서 몸을 던져 홀로 절망이 뒤덮인 전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트럭 서너 대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멀어지는 엔진 소리를 뒤로한 채, 그녀는 안개가 자욱한 앞길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폼 잡기는. 카헤티 지도까지 그려서 보내고, 말이야.
그녀는 가슴 주머니에서 한 장의 편지를 꺼냈다. 얼마 전에 받은, 이른바 "초대장"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내가 너보다 훨씬 잘 알거든?
종잇장이 손가락 관절 사이에서 구겨지고, 시선은 발신자의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고 있었다.
네티아.
몽롱한 안개 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눈꺼풀이 따끔거렸다.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무언가를 본 것일까? 그녀의 동공이 순간 확장되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의 출입구에는 정교한 석고 장식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위로 햇살이 장막처럼 쏟아지며 금빛 글자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카헤티 실험 중학교.
수많은 아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어야 할 풍경들이, 안개의 실에 꿰매지듯 엮여 다시금 눈앞에 되살아났다.
……
쯧, 다 속임수일 뿐이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과거의 환영을 떨쳐내고, 어깨에 멘 총 끈을 고쳐 맨 후, 다시 고향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했다.
작은 뒷모습이 지평선 위에서 아른거리다,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순간, 흩어졌던 환영들이 아스라한 그물처럼 다시 모여들어 이 땅을 뒤덮었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