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 꽉 잡아!
설원 위로 맞바람이 불어왔고, 로제타는 양팔로 지휘관을 안은 채 도시 건물 사이를 질주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전투 구역을 벗어나!
네! 알겠습니다!
뒤따르는 병사들도 사력을 다해 눈보라를 헤치며 앞서가는 이들을 따라 철수하려 했지만, 멀리 가지도 못하고...
!!
아, 내 다리!
발밑의 빙하에서 귀를 찌르는 "뚝" 소리가 나더니, 이합 생물 여러 마리가 얼음 틈에서 튀어나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뒤처진 병사 둘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살려주세요! 누가 좀 잡아주세요!
알겠어. 넌 다른 병사들과 일단 후퇴해!
지휘관이 로제타의 품에서 뛰어내리자, 로제타도 곧바로 칼을 뽑고는 뒤돌아봤다.
뭐가 이렇게... 악!
끼익!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침식체 세 마리가 옆에 있던 병사를 덮쳤다. 그러자 병사의 에너지 실드가 "쿵"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면서 얼음 틈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내 병사들을 놓아줘!
이를 악문 채 병사들을 공격하는 이합 생물에게 돌진한 로제타는 빙판 위의 촉수를 날렵하게 베어낸 뒤, 다리를 다친 대원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때, 이합 생물 한 마리가 건물 위에서 뛰어내렸다.
!!
고마워! 지휘관!
로제타를 막으려던 이합 생물을 때맞춰 쓰러뜨리자, 로제타도 처음 붙잡혔던 병사를 무사히 구출해 냈다. 위기는 벗어났지만, 갑자기 날렵한 기계의 그림자가 로제타를 향해 돌진했다.
비켜라. 구조체!
이 녀석!
로제타는 공격을 막아냈지만, 어떤 반격도 할 수 없었고 눈앞의 적은 전투광과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모든 방어를 포기한 채, 오로지 전력을 로제타에게 쏟아붓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조금 전에 그 용인과 싸울 때처럼 싸우지 못하나 보네. 고작 이 정도야?
로제타를 향해 돌진한 승격자의 전투 방식은 난폭하고 체계가 없었다. 마치 처음 그녀를 봤을 때처럼, 제멋대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루먄체프와의 싸움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둘 다 모험적인 방법으로 승부를 가르려 했을 때, 지금과 비슷한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음?
로제타는 칼날이 공기를 가르기 직전에 힘을 거두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루먄체프 뒤의 허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님, 폐하께서 부탁하신 겁니까?
글쎄. 나도 심심하던 참이었거든.
손님은 루먄체프의 말에 답한 후, 악의가 가득한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이어서 극지에 갑자기 어떤 진동이 울리더니, 깊은 심연에서 울리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공간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위기를 직감한 로제타는 모든 이에게 "철수"를 외쳤다.
흥, 내 공격을 억지로 막아냈군.
뭐라고요!
다음 순간, 미소를 띤 여성이 눈앞에 나타나 로제타의 빛의 검 손잡이를 움켜쥐더니 그녀를 바닥으로 눌러 붙였다.
컥...
로제타는 재빨리 자세를 바꿔 힘을 분산시켰지만, 엄청난 일격의 충격은 그녀를 중심으로 주변 지면을 산산조각 냈다.
내 이름이 궁금한 거야? 아니면 내 신분이 궁금한 거야? 후자라면... 이미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거겠군.
내 이름은 난적이고, 보다시피 승격자다.
로제타는 바닥에 엎드린 채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대화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지휘관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쳇...
총알이 눈보라를 뚫고 승격자의 등을 직격했지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한 채 장갑에 막혀버렸다.
그러나 예상대로 승격자의 시선은 로제타에게서 지휘관 쪽으로 옮겨졌다.
나름 대담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내 일을 방해할 줄이야.
당연하지.
그러고 보니 내가 자기소개를 깜빡했네. 내 이름은 난적이고, 보다시피 승격자다.
네 눈앞의 "이합 생물"을 말하는 거라면... 그래, 맞아. 서리의 군주가 소유한 통합 능력은 승격 네트워크까지만 영향을 미칠 수 있긴 하지만, 상황이 불리한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내가 직접 도와주러 온 거야.
너희 같은 약자들을 없애버릴 생각이거든!
그러고 보니 공중 정원이 범인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더군. 그렇다면, 특별히 대답해 주지.
비웃듯 멸시하는 미소를 지은 난적은 농담하듯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한 짓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승격자 난적은 왼발에 힘을 주어 순식간에 돌진해 왔다. 동시에 주변의 구조체들이 재빨리 모여들어 방어진을 펼쳤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을 보호하라!
날 방해하지 말라고!
난적이 포효와 함께 압도적인 힘을 뿜어내자, 구조체들의 방패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고, 몇몇은 충격파에 날아가며 비명을 질렀다.
난적은 통제를 잃은 들소처럼 방어진 한가운데를 강제로 뚫어버린 뒤, 공격의 화살촉을 지휘관 쪽으로 향했다.
승격자! 지휘관은 절대로 건드리지 못할 거다!
난적이 계속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회복을 마친 로제타도 빛의 검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회전하며 난적의 머리 위에서 내리꽂았다.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굴 필요 없어. 지휘관을 해치려 했다고 누가 말했나?
난적은 과장되게 몸을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하고는 여유롭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시선만은 날카롭게 지휘관 쪽을 향한 채 떨어지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지휘관을 죽이면 "그 아이"가 화낼 테니 말이지.
승격자, 아이... 지휘관의 머릿속에서 파란 머리의 소녀가 바로 떠올랐다.
흥, 짐작이 간다면 굳이 저항하지 말고 나와 돌아가지 그래? 너는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나도 보상받을 수 있잖아.
파오스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지 않아?
당연히 더 강한 선별을 통과할 힘이지!
난적은 말을 이으며 다시 공격을 시작했고, 대화 중에도 시선은 지휘관 쪽으로 돌진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돌진하지 못하게 막아주마!
로제타는 말을 마치자마자 빙판을 박차고 돌진했고, 그녀의 검이 난적의 퍼니싱과 부딪혔다.
흥!
이후 난적이 로제타를 피해 돌아가려고 하자, 로제타가 기체의 너비를 이용해 막아섰다.
흩어져서 자리를 잡은 뒤, 엄호사격으로 견제하라!
하, 귀찮군!
대원들의 단말기에 명령이 하달되자, 구조체 소대가 신속하게 진형을 펼쳤다. 그리고 에너지 탄과 얼음 파편이 교차하며 난적의 주변 지면을 강타했다.
난적은 공격받는 건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발 디딜 곳이 파괴되어 움직임에 오차가 생겨버렸고, 로제타는 이 틈을 타 난적의 앞으로 날아갔다.
여기다!
좋아. 그럼, 너부터 처리해 주지!
로제타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난적은 곧바로 로제타의 오른손을 세게 잡아챘다.
쳇!
로제타가 반격하려 하자, 난적은 집게처럼 팔과 몸통으로 로제타의 다른 손마저 잡아버렸다.
누구의 머리가 더 단단한지 한 번 시험 해볼까? 구조체!
난적은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눈에서 광기가 번뜩이더니 머리를 살짝 뒤로 젖혔다. 다음 순간 로제타의 이마를 향해 세게 들이받았다.
컥!!
지휘관을 따르라!
쿨럭! 정신 팔리지 말고, 지휘관을 지켜!
!!
언제 포위당한 거지?
젠장!
난적과 로제타가 얽혀 싸우는 동안 어느새 이합 생물들이 가까이 다가왔고,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이에 맞서야 했다.
이때도 난적의 박치기 공격은 계속되었고, 로제타와 난적의 순환액이 거친 공격 속에서 튀어 올랐다.
장난은 이제 그만하지!
연속된 공격 속에서 자세를 가다듬던 로제타는 난적이 다음 박치기를 준비하는 틈을 타 머리를 들이받았다.
윽!
로제타가 난적의 콧등을 세게 가격하자, 난적의 광기 어린 얼굴에도 잠시 일그러짐이 스쳤다. 하지만 승격자는 이내 큰 웃음을 다시 터뜨리며 더욱 광기 어린 모습을 보였다.
하하하, 싸움이란 이래야지. 생존이란 이런 것이라고!
난적의 이 말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모두가 긴장 속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준비했다.
우우우!
드레이크?
갑자기 고래 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고, 그 날카로운 소리가 현장의 혼란을 가로질렀다. 그 직후 하늘에서 여러 발의 미사일이 날카롭게 꿰뚫고 이쪽으로 날아왔다.
다음 순간, 순식간에 폭발이 거리 전체를 뒤덮었고, 불빛과 충격파가 모든 시야를 삼켜버렸다.
흥, 방해꾼들이 끊이질 않는군!
승격자를 포함한 현장의 모든 이가 폭발음과 동시에 방어 차단막을 펼쳤다. 그러자 화염이 거리의 건물들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면서, 파편이 전장의 모든 이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로제타는 승격자가 뒤로 물러나 방어하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빼내 승격자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고민하고 있을 때...
삐...
통신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로제타, 연결을 유지해. 우리가 말쿠트의 가동 열쇠를 가져왔어!
우린 지금 도시 외곽의 얼음 바다 근처에 있어, 로제타도 이미 감지했을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무언가와 연결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어쨌든, 지휘관, 어서 말쿠트를 완전히 가동시켜!
나만 믿어. 로제타와 의식 연결이 된 지휘관이 단말기로 직접 가동할 수 있어. 지금쯤 변형 기능이 해제되었을 거야!
그때, 아머의 고글에서 처음 보는 프로그램 코드가 나타났고, 곧이어 "말쿠트"라고 표시된 실행 프로그램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럼, 사용해 봐! 명령을 내리도록 해. [player name]!
말쿠트여, 와라!
좋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어. 곰 박사, 이쪽은?
드레이크와의 연결이 완료되었어. 이젠 나를 외부 포트처럼 활용해도 좋아!
곰 박사의 말처럼, 드레이크를 더 쉽게 조작하기 위해 그는 고래 등의 모든 케이블을 몸에 연결해 놓았다. 그리고 미나의 명령을 듣자마자 곰 박사는 케이블이 연결된 등을 내보였다.
곰 박사의 등 뒤 기계 확장부가 열리더니, 등 아래쪽 중앙에 지름 20cm의 빨간 버튼이 드러났다.
신생 항로 연합의 힘이 무엇인지, 퍼니싱에게 보여주자!
미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외치며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버튼을 세게 내리쳤다.
빛나라, 오로라여! 말쿠트여!
버튼이 눌리는 순간, 곰 박사의 기체에서 울린 작동음이 케이블을 따라 드레이크로 전달되었다. 눈보라와 전장의 소음 속에서도 기체 내부의 작동음과 엔진의 가동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순간, 예상대로 하늘에 오로라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기이하고 섬뜩한 기운을 풍기는 핏빛 오로라였다.
아니야... 잘못됐어!
미나의 목소리에 갑작스러운 놀라움이 실렸다.
붉은빛이 도시 내부에서 솟아올라 전장을 넘어 극지의 빙하 전체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소용없을 거라고 말했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