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8 추론의 한계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

38-11 밤과 장미

>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리고,

상식적으로 볼 때

우리의 존재는 어둠이라는 두 영원 사이에서 잠시 동안 갈라진 틈을 통해 보이는 빛에 불과하다.

— <말하라, 기억이여>

어둠 속을 헤매던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곳에서, "광기"는 가족이라 불리는 것의 주된 멜로디였다.

모든 것은 사절 계획이라 불린 광기에서 시작되었다.

크리스티나, 그곳에 묻혀 있는 건 문명의 불씨야.

네 아버지는 위대한 일을 하러 간 거야.

넌 네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야 해. 그의 발자취를 좇고, 그의 유산을 가져와.

도미니카, 오직 도미니카만이… 인류를 다시 지구로 데려갈 수 있어.

크리스티나·노르만은 한 번도 도미니카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찰스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마음에는 늘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책에서는 도미니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과학 이사회 창립자이자 최고기술책임자, 게슈탈트 설계 이론의 창시자, 냉핵융합 이론 및 실용화의 제안자, 최초의 강인공지능 제작자…

냉핵융합 기술을 토대로 침체기에서 벗어나, 세계 정부를 세우고, 황금시대를 열어젖힌 인물.

사람들은, 도미니카는 영웅이라고 말했다.

그래, 또 하나의 영웅. 아니, 어쩌면 첫 번째 영웅인가.

하지만 그 영웅은 죽었다.

1호 원자로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죽은 사람의 유산은 항상 쟁탈의 대상이 되었고, 죽은 영웅은 계승자를 필요로 했다.

하여 "도미니카의 후계자"가 탄생했다.

노르만 그룹에서 탄생한, 도미니카의 후계자.

정말 웃기네.

도미니카는 노르만 성씨도 아니잖아.

뭐?

...아니에요.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거라. 적어도 가문 안에서는 절대.

네. 알겠어요.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거실에서, 에드워드는 마치 자신의 딸에게 주어진 운명을 애도하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너…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말을 잇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도 지상으로 사절 계획을 수행하러 가시는 건가요?

그래…

그는 억지로라도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반쯤 쪼그려 앉아 크리스티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돌아올 때면… 넌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뭐든,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전 사절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잖아요…

아빠는 꼭 돌아올 거야. 이건 우리 사이의 약속이야… 내 사랑하는 아이야.

문밖에서 들려오는 재촉에, 에드워드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노르만 가문은 상징적으로나마 에드워드의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 날, 비는 오지 않았다. 공중 정원의 기상 제어 시스템은 비를 자주 배정하지 않았고, 설령 그렇다 해도 장례식에 맞춰 떨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비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성격상 장례식에서 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자신이 울지 않고 있다고 믿었다.

그저 형식적인 의미만 가진, 옷 한 벌도 들어 있지 않은 그 묘비를 멍하게 바라만 봤다.

그러다, 곁에 있던 레오나르도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을 때서야 눈가가 이미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레오나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레오나르도가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의 텅 빈 눈동자 속엔 오직 슬픔만이 담겨있었다.

오직 슬픔만.

크리스티나와 레오나르도는 장례식장 멀리서 빅토리아의 모습을 보았다.

그 둘의 여동생은 찰스·노르만의 옆에 서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빅토리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서 있은 뒤, 빅토리아와 찰스는 먼저 떠났다.

다른 조문객들도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그때 크리스티나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역시 에드워드는 쓸모없는 놈이었어.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노르만 가문의 방계 쪽에 여자 하나가 있다던데, 이름이 오클레르였나? 사절 계획이 너무 괴로워서 가족과 크게 싸우고 공중 정원을 떠났다고 들었어.

하… 그럴 만도 하지.

사절 계획… 미친 짓이야. 노르만 가문은 머지않아 끝날 거야.

조문객들이 모두 떠난 뒤, 장례식장에는 크리스티나와 레오나르도 두 사람만 남았다.

안 가?

…………

난 사절 계획을 중단시킬 거야. 더 이상의 희생은 안 돼.

………………

어렵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야.

크리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장례식장에는 이제 소녀 한 사람만 남았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끝없는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어둠 속을 헤매던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꿈에서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보게 되었다.

제3암실의 책임자, 검은 머리의 남자가 유리창 너머로 수술대 위의 여인을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명의 의사들이 분주히 움직였지만, 수술대에 누운 여인의 처절한 비명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조산사

힘주세요! 좋아요, 이제 머리가 보여요.

여자

아아아악—!!!

조산사

머리가 나왔어요. 크게 숨을 들이쉬세요. 좋아요, 지금은 힘주지 마세요!

아기

으아앙!

아기의 울음소리가 수술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울음소리로 자신의 탄생을 알렸다.

조산사

분만이 끝났습니다.

제대가 잘리고, 의사는 즉시 아기를 받아 상태를 확인했다.

유리창 밖에서 지켜보던 남자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자

아기를… 보여주세요.

산모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의사는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의사

출혈량이 이상합니다!

의사는 즉시 판단을 내렸다.

의사

산후 출혈! 응급조치를 준비하세요!

수술실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으로 바뀌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의 손놀림도 빨라졌다.

자궁 수축 부전입니다. 자궁수축제 투여하세요.

자궁수축제가 효과 없습니다. 자궁 거즈 패킹을 준비하세요.

보호자분…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최선을 다했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부인께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지금 들어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의사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언진은 수술실로 들어가 초췌해진 여인을 바라보았다.

클레어…

그녀는 더 이상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 아이를… 보여줘요…

그는 곧장 의사를 불러, 두 사람의 딸을 데려오게 했다.

클레어는 아기를 바라보며, 얼굴을 쓰다듬고 싶어 손을 들려고 했지만,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언진은 그녀의 손을 아기의 볼에 얹어주었다.

아이의… 눈이… 당신이랑… 닮았어요…

나의… 모에누/Moineau.

나의... 소우...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왜…

왜 이렇게 큰 출혈이 발생한 거죠?

생명의 별 복도에서 에드워드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스스로도 그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제 아내는 지금 어떻게 됐나요?

그는 자신이 또 한 번 어리석은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아이만 살렸습니다.

에드워드는 무의식적으로 복도 끝에서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티나와 레오나르도를 돌아봤다.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아이의 몸 상태가…

아이의 몸 상태가 왜요?!

아주 드문 병입니다. 중증 복합 면역결핍 계열의 질환입니다.

그 병은 이미 확립된 치료법이 있지 않습니까? 조혈모세포 이식만 하면 치료 가능하잖아요.

의사는 눈앞의 이 남자가 제3암실 책임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자신의 말이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그렇지만, 이 아이가 가진 건 그 병의 변이형입니다. 기존 치료법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T세포와 B세포 기능 자체가 결핍돼 있어, 어떤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기생충 감염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럼… 평생을 무균실에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까?

의사는 고개를 돌리며, 마지막 힘을 짜내듯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의 공부는 어떻게 돼 가고 있어?

<기초 입자물리학>을 보고 있어요.

이해는 돼?

대충요.

찰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미니카의 계승자"에게 대충은 없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이건 반드시 필요한 거야.

이건 반드시 필요한 거야…

미안하다, 모에누.

무균실 안에서는 공기 조절 장치가 쉬지 않고 돌아가며 아주 미세한 소음만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살의 모에누는 슬픈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행히, 그녀는 또래보다 훨씬 똑똑하고 조숙했다.

그래서 눈앞의 남자의 말속에 담긴 죄책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모에누는 작은 손바닥을 유리창에 가만히 댔다.

그 작은 손을 본 순간, 언진은 갑자기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을 유리창에 포개며 딸의 체온을 느끼려 했지만…

전해지는 건 차가운 유리뿐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어머니의 사고는… 아버지 잘못이 아니에요.

크리스티나는 흐느끼는 남자를 조용히 위로했다.

안타깝게도, 그녀 또한 또래보다 훨씬 똑똑하고 조숙했다.

출산은 언제나 큰 위험이 동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티나는 이 순간,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마치 감정이 몸에서 분리된 것처럼,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

슬픔에 잠긴 오빠,

눈을 감은 할아버지.

그러다 크리스티나는 문득,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스쳤다.

몇 년이 지나고 나면… 난 어머니의 포옹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걸까?

포옹은… 어떤 느낌이에요?

뭐?

언진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모에누를 바라보았다.

모에누는 손에 들고 있던 카뮈의 책을 가리키며, 그 안의 한 구절을 그대로 따라 읽었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내가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있다면, 서툴게 껴안는들 무슨 상관인가."

아버지, 포옹은… 어떤 느낌이에요?

언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해졌다.

포옹은…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영원할 거라는 느낌을 줘.

그럼, 어머니와 포옹할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언진의 눈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맞아, 그런 느낌이었어.

그럼, 저도 아버지와 포옹할래요!

그건…

모에누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요?

당연히, 되지.

30분 뒤, 투명한 격리복을 입고, 세 번의 살균 과정을 거친 뒤, 언진은 조심스럽게 무균실 안으로 들어섰다.

딸에게 조금이라도 감염 위험을 주지 않으려는 듯,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모에누는 아버지의 서툴고 따뜻한 포옹을 느끼며 그 순간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구조체가 되기로 결심한 거야? "영원"한 존재가 되려고?

…………

너랑 얘기하는 게, 가끔은 너무 피곤해.

에이, 또 동생한테 미움받았네.

뭐, 난 천재들하고 어깨를 나란히 할 능력은 없으니까.

레오나르도는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앞에 있는 크리스티나가 무표정인 걸 본 그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설득하려는 건 아니야. 이미 탄탈-193 적응 검사도 끝냈겠지.

근데…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하는 건 어때, 아직은 너무 어리잖아.

기다렸다가…

모에누

기다렸다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제 병이 나을 때까지요?!

너…

화가 치밀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언진은, 다리를 헛디뎌 몸을 휘청였다. 하지만 금세 다리를 붙잡아 자세를 바로잡았다.

…………

죄송해요, 아버지.

저는 단지 바깥세상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서…

언진은 등을 구부리고,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곳이 아니야. 몇 년 전 퍼니싱이 터지고 난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고…

후, 우선 퍼니싱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 줄게.

이게 현재 상황이야. 세계 정부는 공중 정원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지.

그럼… 우리는요? 이 암실 기지는 얼마나 버틸 수 있어요?

모에누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세상이 이미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현재 소모량 기준으로, 4년은 문제없을 거야.

방법을 찾아서 어떻게든 유지해야지.

…………

걱정하지 마. 세계 정부 쪽에, 아직 연락 닿는 사람이 있어.

밖이 궁금하다면… 네트워크로 보는 건 어때?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대신 절대 네 정보를 노출하면 안 돼.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건 어떨까?

아빠도 예전에 컴퓨터 전공으로 석사까지 했었어. 박사 과정 중에 따로 배운 거긴 하지만, 그래도 "링크" 프로젝트 책임자였단 말이야. 꽤 대단한 사람이었어.

네, 배울래요!

프로그래밍을 배우겠다고?

…왜?

그냥, 취미.

할아버지는 알아?

굳이 모든 걸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크리스티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잘됐네, 마침 좋은 장난감이 하나 있어. 가상현실 장비라고, 가상 공간에서 놀 수 있는 건데, 나중에 너한테 보내줄게.

...시시해.

그러지 마. 그래도 오빠가 마음 써서 챙겨주는 건데.

요즘… 사절 계획은 잘 돼가?

………………

여전해. 어느 것도 성공한 게 없어.

듣기론…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얘기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다음 사절 후보 명단에 오를 수도 있대.

성공했어요, 아버지!

명단 정보, 제가 성공적으로 바꿨어요. 이제 다음 공중 정원 입장 명단에 아버지도 있을 거예요.

그렇게나... 간단한 일이었어?

언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모에누를 바라봤다.

딸이 이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불과 2년 만에 자신을 훌쩍 뛰어넘은 것도 알고 있었지만, 공중 정원 입장 명단을 실제로 바꿔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모에누

운이 좀 좋았어요. 그쪽 데이터가 그… 게슈탈트랑 항상 실시간으로 연결돼 있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만 업데이트되거든요.

잘했어…

아버지…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

금방 돌아올 수도 있고, 어쩌면… 오래 걸릴지도 몰라.

내가 돌아올 때면… 넌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뭐든,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거야.

왜… 돌아오지 않았어요…

크리스티나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앉아 멀리 보이는 가짜 태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미니카의 후계자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녀는 오직 이 가상 공간에서만 자신의 슬픔을 달랠 수 있었다.

???

어라, 여기에 이런 빈 공간이 있었네? 경치 괜찮은데?

등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크리스티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보라색 머리의 여성이 이 가상 공간을 둘러보고 있었다.

테디베어? 참 이상한 ID네.

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알았어, 알았어, 항복. 나쁘지 않은 이름이네.

넌 누구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음… 날개를 잃은 새라고 불러줘.

네트워크 공간을 돌아다니다가 들렀을 뿐이야. 그보다 너, 꼬맹이가 여기서 왜 울고 있어?

…울지 않았어.

하하하, 그래, 그래. 울지 않았어.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화약 냄새로 가득한 만남.

방화벽이 세 층… 음, 그냥저냥이네.

오, 이 함정은 좀 재밌는데.

아쉽네, 내 꼭두각시 기계만 걸렸어.

날개를 잃은 새는 테디베어가 깔아둔 방어 프로그램을 가볍게 부수고, 다시 가상 공간으로 들어왔다.

테디베어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해변 의자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이번엔 해변이야?

저번 설원보단 훨씬 낫네.

시끄러, 음침한 여자야.

날개를 잃은 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마, 재수 없는 꼬맹아.

내 이름은 모에누야.

…크리스티나.

너 주려고 장미 한 송이 가져왔어.

장미는 나도 만들 수 있어.

테디베어가 손을 들자, 데이터 흐름이 그녀의 손안에 모이며 장미 한 송이를 만들어 냈다.

이런 거 말고, 홀로그램 기술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그녀도 똑같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테디베어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복잡한 데이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투명한 유리 재질의 카드 한 장이 나타났다.

이 기술의 특징은, 쉽게 말해 저장된 이미지가 3차원이라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

카드 안의 장미는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카드가 회전하자 평소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꽃잎의 뒷면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유리 카드가 쩍하고 산산조각 났다.

조각 하나하나가 완전한 이미지를 보여줘.

허공에 흩날리는 수많은 조각 속에서, 수천 송이의 장미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 또 왔어.

이번엔 방화벽이 없네?

어차피 널 막지도 못하잖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기술을 연습하기 딱 좋은 환경이잖아.

…………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셀 수도 없는 만남 속에서 둘의 사이도 점차 가까워졌다.

처음엔 경계와 적대로 가득했지만,

이젠 어떤 말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테디베어에게도 최초이자 유일한 친구가 생겼다.

내일, 구조체 개조 수술을 받아.

그거 엄청 아프지 않아?

몰라.

마음은 이미 굳혔어?

사실 몇 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됐을 때.

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쯤이네.

응, 레오나르도한테 설득당해서 그땐 안 했어.

네가 레오나르도 말도 듣네?

테디베어는 그녀를 한 번 째려본 후, 말을 이어갔다.

레오나르도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노르만 그룹의 사절 계획을 멈추게 했어.

그건 잘한 거지.

난 지금 노르만 그룹의 정보를 모으는 중이야. 나중에 써먹을 협박 자료들 말이야.

아마 꽤 오래 걸릴 거야.

그때가 되면 너도 노르만 그룹에서 벗어날 수 있겠네?

아마도…

달라지는 건 없어. 작은 우리에서 조금 더 큰 우리로 옮겨 가는 것뿐이야.

도망칠 데가 어디 있다고.

…………

그래도 한 곳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낫지.

적어도… 넌 날 수 있잖아.

테디베어는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눈치챘다.

하아… 그럼, 너는? 이 염세주의야.

내가 뭐.

넌 어느 우리에 갇혀 있는데?

하하… 모르지. 어쩌면 달에 갇혀 있는 것일 수도.

테디베어는 날개를 잃은 새가 숨기고 있는 걸 알기에, 그냥 대놓고 말하기로 했다.

나중에 내가 공중 정원에서 나오면 지상으로 널 찾으러 갈게.

난 지상에 있다고 말한 적 없는데!

날개를 잃은 새가 다급하게 받아쳤다.

알고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내가 바보도 아니고.

…………

모에누, 시간이랑 장소를 정해서 실제로 한번 만날까?

그건 나중에 얘기해...

언진이 다시 제3암실 기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머리칼은 하얗게 변해있었지만, 보랏빛 눈동자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가 가져온 건, 완성된 구조체 개조 기술이었다.

모에누, 네 기체에 바라는 거 있어?

모에누는 수술대에 누워 눈부신 무영등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가상 공간의 그 분홍 머리 소녀가 떠올랐다.

날개를 달아줘요. 부러진 날개여도 괜찮아요…

개조가 끝나면, 테디베어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다시 가상 공간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의 새 기체를 살폈다.

너도 개조했을 줄은 몰랐네.

이게 훨씬 편하니까…

난 노르만 그룹에서 나왔어.

레오나르도 그 자식… 날 속였어. 가문 재산을 물려받으러 돌아간대.

정비 부대에 얘기해놨어. 같이 내려가서 임무 하나를 수행할 거야. 일종의 입대 평가? 뭐 그런 거.

하지만 상관없어. 임무 중에 따돌릴 거니까.

테디베어가 시간과 장소를 알려줬다.

날개를 잃은 새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야, 기억했지?

응, 기억했어.

뭐야, 왜 멍하니 있어?

그냥, 예전에 맨날 울던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서.

어른인 척하는 말투 쓰지 마, 짜증 나니까.

모에누는 약간 떨리는 눈으로 제3암실 기지의 정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밖으로 나섰다.

풀 냄새가 나. 가상 공간에서 맡던 거랑은 조금 다르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스무 해가 넘도록, 진짜 세상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어떤 세계일까…?

와서 직접 보고 느껴 봐.

넌 이제 자유로운 새야.

부러진 날개를 움직여 날아올라.

몸에 붙어 있던 무인기가 화려한 불꽃을 분사하며, 그녀를 지상에서 들어 올렸다.

흩날리는 머리칼, 생체공학 피부에 스치는 바람…

하늘로 날아오른 모에누는 이 모든 걸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무인기 날개의 분사 방향을 조정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전쟁의 화염과 선홍빛 피, 무너진 폐허와 널브러진 잔해였다.

대지는 온통 붉은 퍼니싱으로 물들어 있었다.

뭔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건… 어떤 세계지…

모에누가 제3암실 기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녀는 연구원들의 인사도 무시한 채, 곧장 20여년을 살아온 무균실로 향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무엇이 달라졌는지 깨달았다.

아, 공조기 소음이었구나.

더는 무균실에서 지낼 필요가 없으니, 공조 시스템이 멈춘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스무 해 넘게 그녀를 힘들게 했던, 어느새 몸의 일부처럼 익숙해졌던 그 소음이 사라졌다.

이런 세계가, 그녀에겐 살아갈 만한 곳일까?

모에누는 테디베어를 만나러 갈지 말지 고민했다.

약속한 시간이 다 와 가는데도, 모에누는 여전히 테디베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일단 만나고 보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목적지로 향하던 그때였다.

삐—빅.

단말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버지?

테디베어가 지상에 내려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흙 위에 남긴 발자국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옆쪽엔 잡초가 마음껏 뻗어 있었다.

흙냄새가 나. 가상 공간에서 맡던 거랑은 좀 다르네.

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네가 그 신입이야?

지상은 처음이지? 난 카레니나야. 이번 임무는 나만 따라오면 돼.

그날 아버지를 끝내 기다리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테디베어는 모에누를 기다리지 못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배회했다.

어둠은 차갑고 축축한 파도처럼, 기억을 몰아내며 들이닥쳤다.

과거의 장면들이 책장처럼 한 장 한 장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웅크린 채, 어둠이 자신을 녹여버리도록 내버려뒀다.

정말 웃기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리고,

상식적으로 볼 때

우리의 존재는 어둠이라는 두 영원 사이에서 잠시 동안 갈라진 틈을 통해 보이는 빛에 불과하다.

— <말하라, 기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