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36 꿈의 귀로 /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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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벗어난 속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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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된 여과탑 코어는 다중 검증을 거쳐 안정성이 확인되었다. 이후 공중 정원 담당의 모든 보육 구역으로 신속히 보급되었다.

그 결과 "안전 구역"이 광범위하게 건설되었다. 퍼니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지만, 퍼니싱과 적조에 잠식된 땅을 인간이 점진적으로 안정화하기에는 충분했다.

인간의 "안전 구역"에 대해선 대략 이렇습니다. 루나 아가씨.

알았다.

이는 루나가 승격 네트워크에서 보았던 내용과는 달랐다.

더 이전에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의 힘을 빌려 아주 먼 미래를 엿본 적이 있었다.

루나의 권능으로는 여전히 전체를 볼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시련"은 결국 도래할 것이며, "선택"을 통해 더 높은 존재로 진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루나는 "시련"이라 할 만한 사건을 보지 못했다.

루나가 무엇 때문에 "시련"이 오지 않은 건지 원인을 파악하기도 전에, 승격 네트워크는 대행자와 승격자에 대한 새로운 선별을 서두르고 있었다.

인간의 안전 구역은 확장되고 있었고, 승격 네트워크는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루나 아가씨, 이제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만들어진 꿈속에 롤랑이 서 있었고, 은백색 소녀는 그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녀의 생각을 읽으려 하며 롤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네거트에게 돌아가 그의 반응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아니. 그건 최선의 선택이 아니야.

루나는 롤랑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 대행자와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든, 우리와는 상관없어.

본·네거트가 무엇을 하든, 승격 네트워크를 흔들 수는 없어. 내가 언니와 말했던 것처럼.

알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가 여기 왔습니까?

응, 너보다 먼저.

그럼, 왜...

롤랑은 잠시 멈칫하더니 루나의 주변을 바라보았다.

알파가 왜 날 구해내지 못했는지 궁금한 건가?

왜냐하면... 이것이 "대가"니까.

승격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대가니까.

꿈이 조금씩 부서지면서, 이 구역의 실제 모습이 희미한 빛 속에 드러났다.

은백색 소녀는 진홍 지오드에 갇혀, 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처럼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인간이 "안전 구역"을 얻자, 승격 네트워크는 압박에 못 이겨 선별을 추진했어. 그 과정에서 난 선별을 통해 새로운 권한을 얻게 됐어.

하지만 더 많은 권한을 얻었다는 건, 승격 네트워크와의 연결도 더욱 긴밀해졌다는 뜻이다. 이것이 내가 치러야 할 "대가"다.

듣기에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괜찮다. 아직 마지막 단계를 밟지 않았으니 승격 네트워크에 완전히 제한되지는 않을 거다.

루나는 멀리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다른 이들이 루나를 찾기 전에 태도를 든 알파는 이곳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알파는 루나를 찾았고, 자신이 나아갈 방향도 찾았다.

언니가 정말 승격 네트워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승격자들은 이 돌파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루나는 눈을 감고 복잡하게 얽힌 승격 네트워크 속으로 의식을 침투시켰다.

언니는 아직 승격 네트워크의 연결을 끊지 못했다. 그래서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를 통해 언니에게 일어날 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루나는 언니가 위험을 감수하길 원하지 않았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루나가 승격 네트워크의 끈을 따라가자, 희미하게 설원을 보았다. 그리고 검은색과 흰색 두 실루엣이 매서운 한파 속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순간, 칼날이 번뜩였다.

루나

루... 루시아 언니야.

루시아와 언니의 의식의 바다는 근원이 같아. 그래서 승격 네트워크가 선별 대상으로 판정한 걸까?

짧고 격렬한 교전이 끝난 뒤 알파와 루시아는 거의 동시에 무기를 거두었다.

루나는 언니가 이미 교전 중에 승격 네트워크를 억제할 방법을 찾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루나

이제 약속대로 언니는...

겨울 요새로 갈 것이다.

승격 네트워크는 인간이 연구하던 신형 특화 기체에서 발생한 두 개의 신호를 순간 포착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승격 네트워크는 뜻밖에 짧은 신호를 포착해 냈다. 그리고 신호를 보낸 장소는 바로 그 연구소 내부였다.

이것은... 알파가 승격 네트워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설원에 숨겨진 철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루시아와 알파는 겨울 요새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방에서 침식된 실험체들이 몰려들어 알파와 루시아를 실험실 중앙에 포위했다.

실험체들이... 지하 실험실에서 탈출했군.

알파의 시야를 통해 루나는 겨울 요새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리브·"백야"와 비앙카·"심흔" 기체에서 뜻밖의 데이터를 얻은 고드윈은 승격 네트워크를 장악하려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실험체들에 더 많은 퍼니싱을 주입했다. 고드윈은 광기 어린 눈으로 데이터를 기록하며 보이지 않는 끈을 잡으려 했다.

봤어! 이제 곧 잡을 수 있어!!

교수님, 교수님!

실험체들이 구속을 뿌리치고 지하 실험실을 벗어났다.

으아아아!

거의 성공했...

실험체가 고드윈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정말 어리석군.

자신의 파멸을 자초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에 남은 연결의 흔적을 따라 알파를 찾으려 했다.

언니...

루나는 알파를 찾았다.

부서진 거울 속에 수많은 알파의 그림자가 비쳤고, 중앙에 선 그녀는 장검을 뽑아 모든 악몽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알파는 우리에서 벗어나려는 환영을 하나씩 베어내며,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소진해 갔다.

알파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섰고, 칼끝에서는 불꽃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루나

승격 네트워크가... 물러섰어.

승격 네트워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루나는 그 연결이 약해지는 것을 예리하게 감지했다.

루나

때가 됐어.

순간, 거울 면이 산산조각 났다.

환영이 사라짐과 동시에 루나는 알파와의 연결을 잃게 됐다.

언니가 성공했어.

과정의 참혹함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알파는 결국 자신을 구속했던 우리에서 벗어났다.

루나는 그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언니는 승격 네트워크의 일부를 가로채고 연결을 끊었다.

알파를 잃은 승격 네트워크는 분명 행동을 취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제... 루나가 행동할 차례였다.

진홍 지오드에 갇힌 소녀가 살짝 눈을 떴다.

루나 아가씨?

언니가 성공했어. 승격 네트워크의 속박에서 벗어났어. 그리고 나는...

알파가 승격 네트워크에서 탈출하는 순간, 그녀는 이를 통해 또 다른 권능을 얻었다.

힘이 루나의 몸 안에서 흐르자, 그녀는 다음 수를 어느 방향에 둘지 고민했다.

너에게 새로운 무기를 줄 거야. 그럼...

승격 네트워크가 내 권한을 빼앗으려 할 거다. 그때 네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겠어.

네트워크의 벌레들이 큰 소리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루나 아가씨.

롤랑이 유쾌한 곡조를 흥얼거리며 환영 속에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나는 알파의 이탈로 인한 승격 네트워크의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촉수가 승격 네트워크의 가지에 접속했고, 거미줄에 걸린 작은 벌레는 반격의 계획을 실행했다.

루나는 반드시 이곳을 떠날 것이다.

루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퍼니싱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의 간절함과 퍼니싱의 동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앞으로 밀려 나가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적조가 힘을 폭발시키려 했다.

적조는 은밀히 성장하면서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생명"을 "배양"하고 있었다.

루나는 적조가 진정한 "지성"을 가진 생명을 탄생시키기 전에, 퍼니싱이 준 이 힘을 빼앗아야 했다.

지상에서 적조는 진흙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늪에서 뒤틀린 촉수를 내민 이합 생물은 폐허의 저 끝을 향해 안간힘을 다해 기어갔다. 그리고 배를 폐허의 날카로운 잔해에 밀착시켰다.

"푸직".

적조와 비슷한 액체가 몸에서 서서히 흘러내렸고, 이합 생물은 점차 몸부림을 멈췄다.

다른 이합 생물은 첫 번째 생물의 움직임이 멈추기도 전에 그 사체를 딛고 올라섰다. 폐허의 저 끝,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그들만의 바벨탑을 쌓아 올렸다.

탕...

총구의 연기가 걷히자, 리는 이합 생물을 향해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기며, 굳어진 표정으로 먼 곳을 주시했다.

며칠 전, 승격자와의 무단 접촉 행위로 인해 루시아는 일시적으로 24시간 의식의 바다 감시 상태에 놓이게 됐다.

하산은 쿠로노의 은밀한 행동을 막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게 간섭한다는 구실로 그레이 레이븐의 나머지 셋에게 적조 이상 현상 조사 임무를 지시했다.

임무 설명에 따르면, 이 보육 구역은 여과탑 없이 난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주위 이합 생물들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자 곧바로 공중 정원에 상황을 보고했다고 한다.

케르베로스 소대는 보육 구역 내에서 이합 생물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기로 했고, 그레이 레이븐은 보육 구역 외곽 지역에서 이합 생물과 적조의 연관성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기로 했다.

하지만 보육 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21호와 베라가 실종된 난민을 수색하기 위해 중도 재난 지역 깊숙이 들어갔다가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21호와 연결됐습니까?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의식 연결이 강제로 차단되며 찾아온 고통이 인간의 귓가에 찌르는 듯한 윙윙거림을 남겼다.

지휘관님, 무리하지 마세요.

리브가 걱정스럽게 약을 건넸다.

신경성 통증이 만들어낸 이명이 잦아들어 가는 순간, 눈앞이 오히려 희미하게 흐려져 갔다.

흐릿해진 시야 끝자락에서 식물들이 요동치더니, 섬뜩한 색을 띤 뿌리줄기가 흙을 찢어냈다.

이질적인 색상의 수관이 어두운 녹색 숲에서 급속도로 치솟았다. 그것들은 얽히고설켜 뿌리는 가지와 잎을 감았고, 가지와 잎은 뿌리를 비틀었다.

"같은 나무"의 다른 가지처럼, 그것들은 하나이자, 기형적인 구형의 숲이었다.

귓가를 채우던 윙윙거림이 점차 잦아들었고, 시야를 가득 메우던 짙은 보라색 구형의 숲도 희미해지며 자취를 감췄다. 시야가 다시 맑아지자 원래의 짙푸른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기시감"인가?

지휘관님, 이합 생물이 저쪽에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이 현상의 의미를 파악할 틈도 없이, 리가 옆에서 급히 달려와 전방의 상황을 보고했다.

이동하는 동안, 지휘관은 21호와 연결을 계속 시도했다.

사사...

의식 신호에서 미세한 백색 소음이 들렸다. 퍼니싱의 간섭으로 인해 원거리 의식 연결은 계속해서 불안정한 상태였다.

사사...

윽...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대장, 부상당했다. 21호는 대장을 구해야 해.

의식 신호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21호가 더듬거리며 베라의 지시를 되풀이했다.

숲, 그림자, 남서쪽...

알았어. 21호와 대장, 조심할게.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그녀들은 괜찮아?

21호가 공유한 위치 정보를 따라 나아간 지휘관 일행은 경로상의 이합 생물들을 신속히 제거하며 숲 경계까지 돌진했다.

그녀들의 흔적을 찾았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지휘관님, 앞은 중도 재난 지역입니다. 리브와 여기 계십시오. 저와 녹티스가...

잠깐, 저기...

누구냐!

숲 가장자리, 진흙처럼 깔린 적갈색 적조 구역의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리는 재빠르게 무기를 들어 올려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를 정확히 조준했다.

움직이던 검은 그림자들이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고, 탐조등 아래서 마침내 그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21호와 베라였다.

적조와 순환액에 뒤덮인 21호의 모습은 이미 "구조체"라 부르기도 힘들 정도였다. 리와 리브를 제외한 나머지 구조체들은 여전히 그녀들을 향해 총구를 고정한 채로 있었다.

...

하얀 머리 소녀는 의심스러워하는 구조체들을 둘러보며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21호의 트라우마가 불현듯 떠오르자, 지휘관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녹티스의 표정을 보니 그도 같은 생각이 든 것 같았다.

야! 못 들었어? 무기 내리라고!

녹티스는 앞에 있는 구조체를 밀치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예상과 달리 소녀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무분별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는 침식체가 아니다.

주변의 모든 시선을 담담히 마주한 소녀는, 평소처럼 사냥감을 찢어발기려 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요구를 차분하고 명확하게 전달했다.

나는... 케르베로스 소대의 21호다!

21호가 베라를 부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그녀 곁을 떠나지 않던 "꼬마"라 불리는 보조 기계가 보이지 않았다.

대장이 다쳤어. 당장 치료해야 해.

구조체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굳어버린 채 서 있었다.

빨리 움직여! 들것 가져와! 내가 가져온 응급 키트는 어디 있어?

침식 수준이 안전 기준치를 훨씬 초과했어요. 우선 퍼니싱을 제거해야 해요.

리브가 능숙하게 응급 의료 키트를 준비하는 모습에, 구조체들은 마침내 경계심을 거두고 협조하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잠시 멈칫하더니, 결국 의혹을 말하지 않았다. 언제 작망 기체로 교체했는지 질문할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기형적인 구형의 숲이 지휘관의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전 구역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일시적인 평화를 깨뜨릴 수 있는 어떤 위기도 용납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휘관의 의도를 이해한 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채집 장비를 들고 중도 재난 지역으로 몸을 돌렸다.

며칠 후, 공중 정원.

리가 중도 재난 지역에서 수집한 데이터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진화 중이든, 집단행동을 보이는 "이합 생물"이든 그리고 이합 생물의 "진화"를 촉진하는 적조든 다 포함되는 것이었다.

"이합 생물"은 죽으면 액체로 변해 땅속으로 스며든 뒤,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적조로 새롭게 부화되었다.

누군가가 이것들을 "양육"하는 것이든 아니면 적조가 자연적으로 진화한 결과든, 공중 정원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위험 신호였다.

다행히 개량형 여과탑 코어는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여과탑 코어만 교체할 수 있다면 보육 구역의 안전은 충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지휘관은 방금 열린 공중 정원의 최고 기밀 회의 내용을 곰곰이 되새기며 꽉 조여있던 모자 끈을 풀었다.

새로운 여과탑 코어는 퍼니싱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비록 분산된 퍼니싱이 다른 곳에서 다시 모일 것이 분명했지만, 대규모 또는 집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회의 후 세리카가 보내온 지난주 인구 실종 보고서에 "이합 생물에 의한 실종" 사건이 빈번히 발생한다는 내용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혹시 분산된 퍼니싱이...

[player name].

텅 빈 복도 끝 모퉁이에 하얀 그림자가 숨어 있다가, 지휘관이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를 냈다.

21호는 대장을 기다리고 있어.

대장이 전투를 앞두고 임시 작망 기체로 교체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보고가 필요해.

대장이 머레이 지휘관이랑 얘기를 나누더니, 기체를 교체하기로 정했어, 그것 외엔 21호도 아는 게 없어.

반대편에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킨 21호가 고개를 들어 인간을 바라보았다.

[player name]이(가) 지나가는 걸 봤어. [player name], 21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지휘관의 거절이 두려웠던 듯, 눈살을 찌푸린 21호는 2초 정도 고민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player name]이(가) 이전에 21호에게 약속했잖아.

21호에게 일이 생기면, [player name]을(를) 찾아오라고.

지휘관은 이후 일정을 점검하고 남은 업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21호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섰다.

...

말을 건네는 것이 어색한 21호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21호는 아직 지휘관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어.

꼬마 때문이야.

고개를 든 하얀 소녀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그날, 21호는 베라를 데리고 이합 생물의 포위를 뚫고 이화된 "꼬마"를 물리쳤다. 그리고 중도 재난 지역을 탈출한 후...

이런 특이한 구조체를 처음 접한 지휘관은 그 독특한 차림의 소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전에...

꼬마는 사라졌어.

하지만 괜찮아. 21호는 이미 꼬마를 찾았거든.

21호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건 단순히 기체를 변경한 것이 아닌...

21호는 이 세계에서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찾은 것 같았다.

21호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작별...

21호는 눈살을 찌푸린 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해가 가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다.

21호는 꼬마와 "작별"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21호는 꼬마와 작별하고 싶어.

[player name], 함께 해줄 거지?

베라는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였다. 21호는 멍한 눈으로 눈앞의 인간을 바라봤다.

...

응. 21호는 [player name]이(가) 같이 있었으면 해.

그리고 함께 꼬마와 작별하러 가고 싶어.

하루가 지나고 아직 동이 트기 전, 보육 구역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기가 넘쳐 보이는 21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21호 치료 다 끝났어.

[player name]이(가) 21호와 같이 "작별"하러 가준다고 했었잖아.

21호가 붕대를 풀기가 무섭게 이곳으로 달려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리브는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듯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새벽녘, 방호복을 입은 지휘관은 21호와 함께 중도 재난 지역의 숲을 향해 나섰다.

이합 생물들을 처치하며 전진하던 중 21호가 특정 지점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여기야.

늑대 귀를 가진 소녀는 바닥을 뒤덮은 금속 조각들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쭈그려 앉았다.

꼬마...

작별이란 가르칠 필요도 없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21호는 반복해서 그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21호는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했던 파편들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녀의 손끝에 닿는 금속 조각 하나하나에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두통은 꼬마가 보냈던 신호였어. 그렇지?

미안, 꼬마야. 내가 너무 멍청해서, 이게 네 구조 신호인 줄 몰랐어.

이것이 21호가 빠르게 성장한 이유일 것이다.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모든 진화는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21호가 꼬마의 복수를 했어.

21호는 바닥의 조각들을 모아 작은 더미를 만들었다.

꼬마를 빼앗아 간 나쁜 놈들을 21호가 다 물리쳤어.

다시는 그것들이 21호에게서 대장을 빼앗지 못하도록 막았어.

그래도 미안해. 꼬마야. 21호가 책임을 다하지 못했어.

21호는 이 말들을 집착에 가깝게 되뇌며, 흙 속에서 남은 금속 파편들을 고집스럽게 찾아 모았다.

그래서...

꼬마야, 영원히 21호와 함께하자.

21호가 나쁜 것들이 꼬마의 "하루가"를 다시는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할 거야.

작은 금속 조각 뭉치를 바라본 21호가 기체의 가슴 부분을 눌렀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치자 21호의 단호한 표정은 경건해 보였다.

꼬마야. 영원히 영원히 21호와 함께하자.

늑대 귀를 가진 소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작별"을 고했다.

21호는 자신의 일부를 잃었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자유를 찾았다.

그러고 나서 21호는 대장, 녹티스와 함께 공중 정원으로 돌아갔어.

21호는 [player name]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어.

고마워. [player name]. 21호에게 "작별"할 수 있다고 알려줘서.

하루가는 캐논이 21호에게 가르쳐준 거야.

캐논은 21호와 꼬마의 친구야.

"하루가"의 뜻은...

무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