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나선형 탑이 리의 시야 끝에서 반복적으로 무너졌다가 재구성됐다.
관련 모듈이 활성화됨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리의 시각 시스템에서 추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던 것들이 점차 구체적인 형태로 전환됐다.
붉은 거미줄이 온몸에 퍼지며, 수많은 가능성의 사건들을 교차시켰다.
각 교차점은 다음 순간 풀려 떨어지고, 다시 다른 가능성과 엮여 새로운 미래를 생성했다.
이건...
그 사건들은 그와 관련이 있거나, 혹은 무관한 것들이었다.
그가 봤던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누가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또 누군가...
시간의 축선에서 이 모든 걸 수정했던 것일까?
지휘관님...
금색 불빛이 시간의 터널 속에서 뛰어다녔다.
지휘관님이었던 거네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리는 눈부신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윽!
주위의 왜곡된 화면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썰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윽...
의식의 바다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출렁거렸다. 리의 흐릿한 시야에 우주와 별하늘이 비쳐 들었다.
별하늘?
리는 뜻밖에도 이 낯선 별하늘을 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여긴...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리의 귓가를 채웠고, 그는 이 광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금색 빛이 공간에서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
정신 차려요.
윽...
흐트러진 의식이 다시 모여들자, 리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앞을 응시하던 그의 흐릿한 시야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거긴 누구죠?!
리는 본능적으로 무기를 뽑았다. 하지만 눈앞의 그림자가 본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곳에는 리와 똑같은 구조체가 서 있었다.
...
시선이 마주치자 이전의 감각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상황 분석을 마친 리는 자연스럽게 결론을 얻었다.
저는 곧 당신입니다.
별들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함선의 창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년 후의 당신입니다.
음성은 의도적으로 차단된 듯했지만, 입술 움직임을 보고 리는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느 입구를 통해 들어온 거죠?
저는 ▇번 중도 재난 지역에서 임무 수행 중이었는데, 입구나 문, 또는 표지물 같은 것도 보지 못했어요.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리가 입을 열자, 뱉어낸 말은 어느새 알아들을 수 없게 변했다. 하지만 리는 "자신"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중도 재난 지역, 하지만 이 번호는... 이중합 탑은... 거기에 없잖아요.
이중합... 탑이요?
낯선 단어였지만, 별하늘처럼 리에게 이상하리만큼 친숙했다. 마치 이 단어와 수없이 얽혔던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중합 탑이란 단어가 낯선가 보네요.
또 다른 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본 적이 없나요? 그건 하나의... 아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본 적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알게 될 겁니다.
본 적은 없지만, 다른 곳에서 비슷한 걸... 아니 같은 걸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혹시 무언가를 보신 건가요? 전처럼... "기시감" 같은 거 말입니다.
탑이라면...
...
혹시
명확히 지칭하지 않았지만, 둘은 "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기를 바라요.
만약, [player name]이(가) 이 모든 것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미래의 자신을 이토록 신경 쓰게 만든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 그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까?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여기는 또 어디인 거죠?
이런 질문을 할 여유가 있다니... 참 부럽네요.
상대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지만, 피로가 서려 있었다.
직접 확인해요.
제가 그걸 어떻게...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리는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했다.
초각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뛰어넘는 기체로, 진화와 반복을 보여주는 모듈이 자체로 존재했다.
상대방이 전제 조건과 후속 과정의 핵심 지점 분기점의 파라미터만 제공해 준다면...
미래가 눈앞에 펼쳐졌다.
▂▇년 후... 지휘관은 죽게 될 겁니다.
지휘관님과 루시아는 이중합 탑 때문에 죽게 될 거고...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이 영화 속 내레이션 같았다.
무겁고 지친 목소리였다.
지휘관님께서 떠난 지 1825일째에 "이합 재난 구역"이 폭발했고, 적조는 지상의 거의 모든 구석까지 퍼지게 됩니다.
그 후, 우리는 수없이 이중합 탑을 상대로, 재진입을 시도했지만, 매번 탑 밖으로 밀려났고, 결국 이화 적조가 탑 내부에서 용솟음쳐 나와 지구 전체를 덮쳐버렸어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마디 관절에 녹슨 흔적이 많이 보였다. 기체의 주인이 오랫동안 이 기체를 제대로 관리하고 손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계속 착지하면서 이중합 탑에 접근하려 시도를 반복했지만, 매번 이중합 탑에 의해 밀려나곤 했죠.
어째서 이중합 탑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왜 죽지 않았는지, 왜 떠나지 못했는지...
매분, 매초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왜 이중합 탑의 재앙 핵심을 다시 쓸 수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은 구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왜 이중합 탑 바깥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텅 빈 그 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내레이션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누구든 그 속에 담긴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
지휘관님께서 떠난 지 5475일... 지휘관님과 루시아가 이중합 탑에 들어간 이후, 우리는 5475일 4시간 18분을 기다렸어요.
기다리는 동안의 모든 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죠.
우리는 5475일 4시간 18분 09초를 기다렸고, 인간이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공중 정원은 지구 궤도를 떠나 심우주로 떠났고
우리는 지구에 남아 지휘관님과 루시아를 찾으려 했지만...
어쩌면, 심우주에서만 미래와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 선택이 옳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돌이킬 수는 없게 됐습니다.
...
화면이 꺼지자, 둘은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왔다.
리는 할 말을 잃었고, 상대방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지상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미지의 미래를 찾아 심우주로 떠났을까? 아니면 불가능한 귀환을 기다리며 지상을 지켰을까?
리는 답을 알 수 없었고, 그런 선택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미래를 다시 쓰려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할까?
얼마 전
비틀거리며 휴게실로 돌아와 그들을 본 순간, 힘이 빠져 의식을 잃었었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기를 바라요.
"리"는 조금 전의 대화로 대답했다.
저... 그리고 우리...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어요.
수많은 기억이 리의 의식의 바다로 흘러 들어오자, 그의 동공은 커졌다. 수많은 "자신"의 연산 능력이 연결되면서 세상 만물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게 됐다.
심우주로 들어간 후에도 저는 이 기체의 한계를 끊임없이 탐구했어요. 그리고 이 기체 의식의 바다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죠.
우리는 계속 "올바른 길"을 찾아왔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길로 가는 모든 자신을 하나씩 지워버렸어요.
그것은 모든 실패와 죽음을 짊어지고 있었고, 과거와 미래에 속해 있는 겁니다.
공간이 무너졌다가 다시 응결되면서, 앞에 있는 "리"가 다양한 형상으로 변화했다.
당신은 가장 운이 좋으면서도, 또 가장 불행하네요.
"미래"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져갈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만회할 수 없었던 국면은 바뀌었으니, 어서 떠나요.
리는 자기 의식의 바다에서 수많은 자신과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가 곧 당신이고, 당신이 곧 우리입니다.
우리의 한과 희망을 안고서...
앞으로 나아가요.
의식의 바다에서 특별한 마인드 표식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현재로 전달된 거였다.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휘관님...
윽... 어떻게...
의식의 바다 과부하로 인한 고통이 리의 온몸을 꿰뚫었고, 목이 조여오는 질식감에 숨이 막혀왔다.
리는 수많은 정보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동시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한쪽에 놓인 통신 단말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휘관님.
리는 흐릿한 조각들 속에서 의식을 되찾으며,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당장 공중 정원으로 돌아갈게요.
네. 제가... 돌아갈 때까지 꼭 기다려 주세요.
수송기가 구름을 뚫고, 가장 빠른 속도로 공중 정원으로 복귀했다.
그레이 레이븐 휴게실의 문은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앞에 선 리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리는 몇 번이고 이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익숙한 인간의 얼굴을 보길 소망했다.
하지만 매번 리는 텅 빈 방과 인간의 온기가 없는 의자만 봤다.
허망한 기억의 출처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리는 문을 향해 힘주어 손을 내밀었다.
!!!
안에 있던 인간이 갑자기 문을 당기는 바람에, 리는 제대로 반응하기 바빴고 넘어질 뻔했다.
리는 겨우 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휘관님.
리는 갑작스럽게 지휘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인간의 온기가 손을 통해 의식의 바다로 전해졌다.
지휘관님, 죄송해요.
지휘관은 리가 왜 그러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리의 품에 안겼다.
...
리가 문을 힘차게 열었다.
따뜻한 빛이 방 전체에 쏟아지고 있었고, 인간 지휘관은
질문을 다 말하기도 전에 리가 지휘관의 팔뚝을 힘껏 잡았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
차가웠던 손이 점차 따뜻해졌고, 인간 지휘관이 무사하다는 걸 반복해서 확인한 후에야 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그때 지휘관이 왜 서둘러 휴게실로 달려왔는지, 왜 소대 대원들의 기체 상태를 갑자기 반복해서 확인했는지...
하지만... 이젠 모두 지나간 일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의 조각"들은 점차 사라졌고, 절망은 따뜻한 빛에 의해 지워졌으며, 오로지 새벽의 색채만이 남겨졌다.
이 기체의 특별 "작용"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말씀하세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말해줄게요.
네, 시간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리는 다소 어색하면서도 진심 어린 목소리로 초대했다.
과학 이사회로 향하는 작은 길은 따스한 햇살로 가득했다.
네. 추측하기로는 기체를 최고 출력으로 가동하면서 의식의 바다가 과부하에 걸렸던 거고, 그 상태에서 안정적인 의식 연결을 보장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과부하 상태일 때... 탑을 봤습니다.
붉은색의... 나선의 탑이었습니다.
리의 대답은 스위치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일깨웠다.
흐릿한 기시감이 시야 끝에서 펼쳐졌다. 그러자 붉은색 탑이 불길한 빛을 방출했다.
하지만 "기시감"은 너무나 흐릿해서 더 이상의 예시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없었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경험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어쩌면 아시모프 님 쪽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죠...
아무것도 없었어.
해당 시간대의 모든 기체 데이터를 조회해 보았지만, 몇 초간의 의식의 바다 과부하 시간만 확인할 수 있었어.
파동과 의식 전이 시 나타나는 수치 편차와 매우 유사하지만, 미세하게 다른 점이 있지.
이 데이터들은 오직 의식의 바다에 대량의 봉인된 파편 데이터가 존재한다는 것만 증명해 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도 몰라.
권장하지는 않아, 봉인된 파편 데이터를 강제로 해제하는 건 위험하니까. 리의 의식의 바다에 편차가 발생할 수 있어.
일단 이 기체에 일부 연산 능력 제한을 걸어서 향후 유사한 상황이 나타나는 걸 방지할 거야.
진짜 수수께끼의 답은... 앞으로 풀 수 있겠지.
아시모프가 인간 지휘관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시모프는 뜬금없는 말을 남기고는 로사와 함께 실험실을 떠났다.
깊은 밤, 드문드문한 별들이 인공 천막에 걸려 있었다.
리는 책상 앞에 앉아 단말기 메일 프로그램의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신자란에는 이름이 채워져 있었다.
의식의 바다 과부하 때의 기억은 아침 이슬방울처럼 흐릿했지만, 어떤 목소리가 계속 리를 재촉했다.
시간이 되는대로 머레이와 이야기를 나눠봐.
그 의혹들, 그 갈등들...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우린 영원히 모를 거야."
"그럼, 그 침묵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리는 지휘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리는... 첫걸음을 내디디기로 했다.
가상 스크린에서 경직되었던 손이 유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샛별이 떠오를 때쯤, 리는 마지막 마침표를 눌렀다.
...
이런 "중간 지점"이었구나.
다른 변동은 없이, 이중합 탑은 단기간 내에 강림하지 않을 거고.
탑에 들어갈 기회를 잃었으니, 리도 승격 권한을 상실했고...
하지만 구조체는 이런 경로로 "승격"할 필요가 없었다.
더 먼 미래에, 리는 이중합 탑에 들어갈 계기가 생길 수도 있고, 여전히 "승격"의 계단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그 시간대의 리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