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 차가운 액체에 잠긴 것 같았고, 짙은 하얀 안개가 시야 전체를 덮고 있었다.
왜인지 이런 느낌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하얀 안개가 점점 걷히고, 칠흑의 거울이 앞에 나타났다.
손을 뻗어 거울을 만지자, 거울에 비친 것은 놀랍게도 흰머리에 빨간 눈동자를 가진, 카오스라고 자칭하던 그 소녀였다.
거울이 갑자기 산산조각 났다.
...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이 새로운 꿈에 빠진 것 같았다. 꿈의 주인은 앞에 있는 파란 머리 소녀였다.
안녕하세요, ■■■.
어젯밤 숙제는 다 했어?
소녀가 허공에 있는 인간 그림자와 대화하고 있었다.
다 풀었다고? 어제 선생님께서 가르쳐 준 그 방법으로 풀었어?
장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소녀는 캠퍼스 안에서 산책하는 것 같았다.
장래 희망이요? 저는 과학 이사회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생명의 별도 나쁘지 않고요.
음, 좀 더 안정적인 걸 원할 것 같아요. 구조체는 너무 위험해요.
이것은 이 소녀의 "평범한 하루"인 것 같았다.
지휘관은 이 "꿈"이 평소처럼 혼란 속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 부서질 때 파란 머리 소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지휘관을 바라봤다.
이중합 조각.
파란 머리의 소녀가 의심의 여지 없이 지휘관을 바라봤다.
이중합 조각을 가져가세요.
이상한 기시감이 혓바닥으로 밀려왔다.
아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당신이 기억해야 하는 건... █▇█▇▂▃▄▂▊
이중합 조각은... █▇▂▃▃▃▇▂▇▂▇■
그녀의 입술이 계속 움직였지만, 지휘관은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격하게 찌르는 고통이 뇌의 깊숙한 곳에서 전해졌다.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네요.
파란 머리 소녀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아직 이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라는 겁니다.
알고 계시잖아요? 여기는 제 "꿈"이에요.
이전에 경험한 꿈에서 지휘관은 완전히 방관자 형태였고, 꿈속의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다.
이전?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파란 머리의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오스 때문이에요.
그녀는 귀를 기울이며,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 같았다.
이건 "미래"에 속하지 않으니, "말할 수 있는" 정보인 것 같네요.
저는... 적조를 통해 카오스의 목소리를 들었고, 카오스가 저를 여기로 안내해 줬어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명심하세요. 본·네거트의 말은 믿지 마시고, 센을 죽인 뒤, 이중합 조각을 가져가세요.
네. 본·네거트의 말은 믿지 마시고, 센을 죽인 뒤, 이중합 조각을 가져가세요.
그리고...
됐어요... 별거 아니에요.
제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말했던 내용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달빛이 밝게 비치면서 시야가 흐려지는 가운데, 의식이 외력에 의해 끌려가다가 강제로 몸속에 밀어 넣어진 것 같았다.
고막에는 여전히 물에 눌린 듯한 통증이 있고, 몸은 코끼리 대여섯 마리가 함께 밟고 지나간 것처럼 모든 관절이 신음하고 있었다.
깨어났나?
이미 정신을 차렸다는 걸 다 알고 있다.
굳이 바보인 척할 필요 없어. 그게 아니라면, 나의 자기소개를 다시 듣고 싶은 건가?
나는 본·네거트라고 한다, 보다시피, 대행자 중 하나다.
이 구역은... 이전에 그들이 반복해서 언급했던 "저수지" 구역인 것 같았다.
거대한 저수 탱크에는 꿈틀거리는 적조가 담겨 있고, 때때로 이합 생물이 그 속에서 천천히 기어 나오곤 했는데, 대행자가 세운 방어 역장에 의해 밖으로 차단됐다.
보아하니 방어 역장 역장의 "보호" 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왜 굳이 지휘관을 보호하려고 하는 걸까...
정상적으로 대화할 능력을 회복했다면,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넌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가 너에게 묻고 싶은 질문인걸.
뛰어내릴 생각인가?
...
차단막이 거부할 수 없게 인간 지휘관을 밀어냈다.
떠볼 필요 없어, 내 질문에 답하기 전까지, 넌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본·네거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카퍼필드 해양 박물관에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그게 아니라면, 이상한 상황을 "본" 적이 있나?
본·네거트가 떠보는 말투로 물었다.
루시아가 물살에 어디로 휩쓸려갔는지, 나머지 대원들도 안전하게 대피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으로선 본·네거트와 먼저 이야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뭘 봤지?
그래, 말해봐.
이합 생물을 배양하기 위해서다. 적조가 희생자들의 재생을 도와줄 것이고, 그 효과는 이미 보았을 텐데.
그걸 종속이라고 할 수는 없지. 지금 이게 두 번째 질문이다.
본·네거트의 진정한 목적은 절대 지휘관을 적조에 던져서, 찍찍거리는 끈적한 액체 덩어리에 융합시키는 게 아닐 거라고... 그 수상한 기시감이 주의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승격자는 대행자에게 "종속"되지 않아. 대행자는 그들에게 선택할 기회만 제공할 뿐, 어떻게 선택할지는 그들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대행자는 이 길을 통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이들을 선별할 뿐이다. 됐다, 대답은 여기까지다.
네가 뭘 봤는지 말해.
뭘 봤는지라...
카퍼필드 해양 박물관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부터 이유 없이 몇 번이나 터져 나온 "기시감", 빨간 눈동자 소녀 카오스, 예상하지 못하게 비앙카를 "본" 것...
본·네거트는 지휘관이 뭘 "봤는지"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인데, 대체 어느 부분이 궁금해서 신경 쓰는 걸까?
지휘관은 최대한 모호한 말로 "대답"하기로 했다.
그것뿐인가?
아니, 더 있을 텐데.
지휘관은 대행자의 표정을 짐작하며, 머리를 굴려 그가 원하는 내용이 있을지 고민했다.
로비에 있을 때 본·네거트가 "탑"을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지휘관이 "봤던" 모든 장면에서 이 "탑"은 존재하지 않았다.
...
차라리 널 적조에 융합시킨 뒤, 직접 네 기억을 엿보는 게 더 좋을 것 같군.
...
주황색 고양이...
또 뭐가 있었지?
차라리 널 적조에 융합시킨 뒤, 직접 네 기억을 엿보는 게 더 좋을 것 같군.
...
역시 너와 관련이 있었군.
"탑"에 무슨 짓을 했지?
탑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부수기? 올라가기?
그럴 리는 없어.
필멸자의 육신으로 탑에 올랐다고?
필멸자의 육신으로 탑에 올랐다고?
그럴 리는 없어.
본·네거트는 신중하게 인간 지휘관을 살펴봤다.
...
대행자의 안색이 어둡고 불분명해졌다. 인간 지휘관의 대답 속에서 진실성을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앞의 인간은 분명 뭔가를 알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하지만 지금
피와 살이 있는 몸으로는 "탑"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탑을 봤다"라고 한 것도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다.
"탑을 봤다"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면,
시끄러운 의식의 바다가 기형적인 비명을 지르자, 대행자는 그 혼란스러운 소리를 억누르며 자신의 수첩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지난번
본·네거트는 이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적조를 배양하고, "열쇠"를 준비했으며, 해저 요람 계획 추진과
본·네거트는 이중합 탑이 성장을 멈췄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중합 탑 안에 있는 자신과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
...
내가 예상할 수 없는 뭔가가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본·네거트가 평온하면서도 지친 듯이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는 고삐를 잡고 규칙을 정하는 존재가 필요해.
그렇지 않고, 계속 교착 상태만 유지한다면, 결국 막다른 길일뿐이다.
어떻게 발전하든, 끝없는 회랑 속에서 맴도는 상태를 말하는 거지.
인간이 더 높은 등급의 구조체를 개발하면, 이합 생물은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그것은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이자, 필요한 선택이다.
대행자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더 멀리 있는 "미래"다.
그걸 "봤다"고는 할 수 없다. 난 아직 그런 권능을 얻을 수 없으니까.
난 미래를 예지할 수 없다.
미래는 바꿀 수 없어, 바꿀 수 있는 건 현재뿐이다.
퍼니싱은 일종의 "정보"고, 난 퍼니싱을 이용해 기억을 전달할 수 있다.
말을 마친 본·네거트는 또 몇 초간 침묵했다.
됐다. 충분히 대화를 나눈 것 같군.
역장 차단막이 자연스럽게 수축하더니 인간을 중앙에 가뒀다.
내 태도가 아주 명확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네 협조가 필요해. 함께 이 "막다른 길"을 깨뜨려야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처음부터 너한테 선택권은 없었어.
본·네거트는 설명하기 귀찮은 기색이었고, 그저 역장 차단막을 수축시켜 인간 지휘관을 "포장"한 뒤 데려갈 준비를 했다.
너도 지금 인간의 선택에 간섭하고 있지 않나?
옳고 그름, 빛과 어둠, 정의와 악...
"선택"의 전제는 주도적으로 선택할 권력을 가지는 것이고, 누구도 한 문명, 한 종족을 대신해 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
이 세계는 속박된 하나의 선택지 속에서 살아가서는 안 됐다.
선택의 권력은 약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런 식으로 시간 끌 필요 없다. 루시아는 적조의 다른 구역에 갇혀 있다.
본·네거트는 낡은 단말기로 시간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 널 데려가는 게 너무 이르지만, 난 이 모든 것을 앞당겨도 상관없다.
총알이 공기 중에 투명한 궤적을 그리더니 대행자 앞에 떨어졌다.
가자, 여기는 곧 무너질 거다.
대행자의 말이 갑자기 끊어지더니, 공기를 가르는 채찍 소리가 들려왔다.
지휘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