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 법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의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현재"의 흔적이 지워질 때,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메아리"가 남게 된다.
서둘러 휴게실로 돌아가자, 우편함엔 지휘관의 이름과 정교한 봉랍 자국만 남은 편지지들이 마치 되돌아오지 않는 꿈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기이한 불협화음이 가벼운 노랫소리로 바뀌어 창틀과 편지지 사이를 맴돌았다.
편지지들을 차분히 정리한 뒤 과학 이사회로 향하자, 아시모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필적 감정을 통해 분석해 봤더니, 이 편지들이 가장 최근에 작성된 것들이야.
아시모프는 얇은 편지지 몇 장을 골라내며 말했다.
이 시간대의 감시 영상을 신청할 수 있겠어?
특수 상황에서는 언제나 처리 속도가 빨랐다. 세리카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숙소 인근의 감시 영상 열람 요청을 승인해 주었다.
곧이어, 협조 요청을 받은 테디베어도 급히 도착했다.
이 부분이야.
새벽 3시. 늘 분주한 공중 정원도 대부분이 조용히 잠든 시간. 지휘관의 숙소 역시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나둘 불이 꺼지자, 감시 카메라에는 거친 잡음만이 남았다.
… 여기, 이 구간이야.
영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테디베어가 만든 특수 음성 감지 프로그램은 비정상적인 주파수를 포착하고 경고를 울렸다.
이 주파수는 일반 구조체조차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특이해. 당시 정비 부대에 청각 시스템이 개조된 구조체가 없었더라면, 나도 그냥 "소음"으로 넘겼을 거야.
예전에 비슷한 감시 영상 몇 개를 따로 보관해 둔 게 있었는데, 이번 소리랑 동일한 주파수 스펙트럼이 검출됐어. 그래서 감지 프로그램을 그런 식으로 세팅해 둔 거고. 자, 봐봐.
테디베어가 조금 전 영상을 재생했다. 그러자 음성 감지 시스템은 동일한 지점에서 또다시 경고음을 냈다.
이 시간이... 네가 말했던 "이리스"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간 같아.
그럴 리가 없지.
백색 소음 장치를 작동시키려면 고성능 연산 능력과 특수한 구조체가 필요해. 안타깝지만 넌 이 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해.
이론상, 이 장치는 특정한 음성 신호를 읽은 후 그걸 구체적인 위치 정보나 영상, 데이터로 변환해 낼 수 있어.
예술 협회의 햄릿을 데려와 장치에 맞게 개조하고, 게슈탈트의 연산 일부를 연결해 볼게. 결과적으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고마워할 건 없어. 나도 실행 가능성이 궁금해서 그래.
이리스에 관한 걸 최대한 많이 "기억"해 내. 영상이든, 메모든... 어떤 형태든 좋아.
네 말 대로라면, 이리스는 시간 조각 안에 있을 거야. 그곳을 떠나면 그녀에 대한 기억도 점차 희미해질 수 있어.
이리스가 네 말처럼 공중 정원에 존재하던 구조체라면, 그녀의 의식 어딘가에 가상 신경 어레이 구조가 남아 있을 거야.
그래. 충분히 친숙한 사이라면, 지휘관의 마인드 표식을 통해 구조체들의 역원 장치 신호를 감지할 수 있어.
백색 소음 장치로 시간 조각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을지는 확신 못 해. 하지만 만약 찾는 데 성공한다면—
그녀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건 너뿐일 거야.
아시모프는 정기 점검을 구실로 햄릿을 가져와, "백색 소음" 장치에 인터페이스를 연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지휘관은 휴게실에서 포착한 첫 번째 "소음"을 단서 삼아, 다시 햄릿에 접속하여 시공간 너머의 속삭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위험한 실험이니까,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말해. 즉시 중단할게.
아시모프의 목소리가 기계 밖에서 둔탁하게 울려왔다.
로사, 기계를 작동시켜.
네... 네!
갑자기 치아가 시릴 만큼 강렬한 백색 소음이 밀려오더니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두운 시야가 순간 바늘 끝만큼 좁아졌다가, 이내 대낮처럼 밝은 가상 세계가 펼쳐졌다.
지휘자님... 지휘자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초조해 보이는 "이리스"의 얼굴이었고, 그 뒤로는 밤이 내려앉은 공중 정원이 보였다.
의식의 바다가 선명해지며, 소녀의 이름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지휘자님, 상처는 어떠세요?
후아가 무언가를 조작했는지, 모든 게 갑작스레 일어났어요. 우주 항의 군인들은 제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고… 군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지휘자님을 숨겨둔 거예요.
마치 정해진 연극처럼, 시선은 시간 속 자신의 모습에 고정된 채, 깊이 묻혀 있던 기억을 다시 읽어내고 있었다.
저...
세레나는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그분"을 찾아갔었어요.
네. 그분의 허락 없이는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후아에게 맞설 방법을 찾았어요.
이노이·후아의 본체는 아주 멀리 숨어 있어요.
당분간 지휘자님은 공중 정원에 머물러 주세요.
세레나의 얼굴이 어둠에 묻혀 흐릿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언제든 지휘자님께 지원 요청할 수 있게요. 신호를 받으면 바로 군에 보고하고, 그레이 레이븐을 이끌고 이노이·후아에 맞서는 걸 도와주세요.
할 수 있어요.
후아가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가 없는 제가 그녀의 흔적을 쫓는 게 더 유리할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으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예요. 공중 정원이 재앙에 빠지게 둘 순 없어요.
과다 출혈로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의식이 몽롱해졌다. 세레나의 손을 잡으려 애써 팔을 뻗어봤지만, 힘없이 늘어질 뿐이었다.
세레나가 지휘관의 힘없는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지휘자님.
저...
부드러운 속삭임이 저녁 바람과 함께 하늘로 사라지며, 한 장의 편지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로열 블루 잉크로 적은 가느다란 글씨가 물 자국과 함께 두 줄로 남아있었다.
<i>제 영혼이 외로움에 잠길 때, </i>
<i>이 덧없는 장미는 왜 피어나는 걸까요?</i>
<i>시간의 틈새에서 아이리스가 피어날 수 있다면, 그 향기만으로도 떠올릴 수 있을 텐데...</i>
흐릿한 필체가 소녀의 떠남과 함께 희미해져 갔고, 인간은 점차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 지휘자님?
[player name]!
과다 출혈로 인한 어지러움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귀를 때리던 거친 소음이 잦아들자, 기계 밖에서 아시모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색 소음 장치가 그 소음의 위치를 찾아냈나?
햄릿이 소음 신호를 영상으로 변환하자, 홀로그램 연극 장치가 이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아시모프님,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요.
실험을 중단할까요?
...
아시모프는 인간의 몸 상태를 보여주는 기계를 빠르게 살핀 후, 모든 데이터가 정상임을 확인하고 지휘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체 데이터와 마인드 표식 데이터, 모두 정상범위이긴 해. 정말 계속할 생각이야?
...
아시모프는 옆에 있던 연구원에게 계속 진행하라고 손짓으로 지시한 뒤, 다시 한번 지휘관을 향해 돌아섰다.
무리하면 안 돼. "이리스"의 역원 장치에 억지로 연결하더라도 마인드 표식이 끊어지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야.
로사, 두 번째 "소음"을 입력해.
입력 완료했습니다.
순간 밀려든 격렬한 소음에 로사의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지휘자님!
지휘관이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뛰어오른 세레나는 무기를 꺼내 지휘관의 뒤로 푸른빛의 현을 날렸다.
지휘관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푸른빛 현이 날아간 방향으로 사격했다.
총알을 맞은 금속 갑옷이 뒤로 비틀거렸다.
즉시 옆으로 몸을 틀어 피했다.
금속 갑옷의 공격을 피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세레나는 지휘관의 움직임에 맞춰 즉시 공격을 이어갔고, 하늘엔 푸른 섬광이 터졌다.
흥...
세레나와 지휘관의 협공에 금속 갑옷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모래처럼 흩어져 버렸다.
또 분신이에요. 이번까지 하면 벌써 다섯 번째에요.
지휘자님, 괜찮으세요?
세레나가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후아라는 이름의 이상 구조체가 다섯 번째 "기습"을 감행했다.
과정은 매번 비슷했다. 지휘관이 다급히 공중 정원으로 복귀해 이상 정보를 군에 보고하면, 군은 곧 정체 파악에 나선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후아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해가 뜨면, 인간은 다시 보육 구역에서 눈을 떴다. 단말기의 임무는 여전히 "보육 구역 근처에 나타난 미확인 승격자 조사"였다.
마치 시간이… 크로노스의 저주에 걸린 것만 같아요.
그래도 전, 차라리 정말로 시간이 반복되고 있는 거라면 좋겠어요. 그럼, 지휘자님의 상처도..
시간이 반복되는 듯했지만, 날짜는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후아가 어떻게 "과거"를 수정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휘관의 몸에 하나둘 늘어나는 상처를 보고서야, 히포크라테스와 아시모프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하지만 "과거" 속 지휘관은 여전히 지상 임무가 없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일 뿐이었다.
후아는 자신의 분신을 이용해 계속 "어제"에서 "미확인 승격자"의 흔적을 시뮬레이션하며, 공중 정원이 "가장 가까운 보육 구역"에 있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을 파견하도록 유도한 것 같았다.
지휘관이 군에 지원 요청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 정보를 보고하면 "과거"는 늘 지워지고, "목표 지점 이상"이라는 정보만 남았다.
저도 문자로 기록을 남겨보려고 했는데, 보육 구역으로 돌아올 때마다 그 내용들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어요.
인과관계의 기억이 지워지면서 과거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세레나의 눈에 잠깐 걱정이 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음엔 후아의 본체를 처치할 수 있을 거예요.
세레나가 몸에 지니고 있던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이건... 우리가 겪은 일을 기록해 둔 다섯 번째 편지예요.
첫 번째 편지는 글씨가 사라져서 폐기했고, 두 번째 건 보육 구역에 두었어요.
세 번째와 네 번째 편지는 병에 넣어서 봉인한 다음, "오늘" 이 곳에 묻어뒀어요.
다섯 번째 편지는 지휘자님께 드릴게요.
세레나가 편지를 봉투에 넣은 뒤 지휘관에게 건넸다.
<i>사람들이 더 이상 시간에 속지 않게 되었을 때, 겨울 햇살이 다시 하늘에 걸렸을 때... </i>
<i>그때가 되면, 편지지 틈새에 적혀있는 제 소원을 보시게 될까요?</i>
<i>지휘자님...</i>
어둠 속에서 갑자기 깨어난 지휘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보육 구역의 위치를 기록한 지휘관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좌표?
아직 시간에 씻기지 않은 기억 속에, 후아의 분신이 산산조각 난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백색 소음 장치"와 똑같이 생긴 장치가 흩어져 있었다.
...
아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 모체 장치에 종속된 자체 장치야.
모체 장치는 좌표를 고정하고, 자체 장치는 위치를 추적하는 용도야. 이 둘은 서로 끌어당겨… 근데,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즉시 군에 연락해서 이 좌표로 이동해 "백색 소음" 장치를 찾으라고 해.
네.
위치 신호를 강화할 수 있어. 그럼, 모체 장치의 좌표를 고정할 수 있을 거야.
그건 네 편지에서 추출한 마지막 유효 소음이야.
지금 읽으려고?
좋아. 연결을 시작하지.
지휘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시모프는 연결선들을 하나씩 점검한 뒤, 햄릿을 재가동했다.
그 좌표처럼, 가능한 한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해. 소음 입력은 성공했어.
익숙해진 거대한 이명이 귀를 가르며 밀려들었다.
지휘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수송기 안이었다.
단말기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가 떠 있었다. "고고학 소대 호위 지상 임무 수행. 보육 구역으로 이동해 세레나와 합류.", "보육 구역 근처에 나타난 미확인 승격자 조사". 그리고 눈앞 작은 테이블 위엔, 편지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i>[player name] 님. 안녕하세요.</i>
<i>지금 시간은 <color=#ff4e4eff>23:30</color>이네요. 보통 이 시간엔 주무시고 계시겠죠?</i>
<i>원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전해드리려고 했어요.</i>
<i>보육 구역 근처에서 전에 본 적 없던 꽃을 발견했어요. 정말 독특한 과일도 먹었고요.</i>
<i>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i>
<i>"과거"가 뒤섞이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많이 걱정돼요.</i>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너무 걱정되는데, 이런 상황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제 착각이면 좋겠어요. 지금 이 순간들이… 너무 소중하니까요.
며칠 뒤면 곧 만나게 되겠죠. 지휘자님이 이번 임무를 수락하셨다고 들었을 때 정말 기뻤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당신의 이리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