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인 수도
우금 호텔
20:30
악보 너비: 2
황금빛으로 눈부신 호텔 홀에는 반짝이는 각종 장식과 서명 절차 시작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사진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셔터를 눌러대는 중이었다.
홀 안은 술잔이 오고가는 건배 소리로 북적였고, 사람들의 분주한 대화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중심엔 조나단이 서 있었고, 주목받는 인사인 만큼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이런 광경이 익숙지 않은 단데이라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지휘관과 이리스는 단순히 자리를 지키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여기 제 명함입니다. 파오스 님, 이리스 님. 말씀드린 제안, 꼭 한번 검토 부탁드립니다.
지휘관은 정중히 인사한 뒤, 명함을 챙기고는 이리스를 데리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런가요? 전 주목받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연합 정부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면서 많은 반대 단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 영향으로, 각지의 <새 지구서> 대표단들도 크고 작은 난관에 부딪히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대표단 주요 인물을 아무 문제 없이 베인의 수도까지 데려온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지휘관을 바라보는 이리스의 눈빛엔 찬사가 담겨 있었다.
단데이라 말로는, 조나단을 만난 사람들 중 베인 국경 보안 관리자만 유일하게 얼굴을 찌푸렸다고 하더라고요.
우리의 승리를 축하할 겸 한잔하실래요?
한 모금 마시려던 찰나, 누군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지휘관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멈추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팔짱을 끼고 있던 이리스의 동작이 순간 멈칫했다.
의향 조약 서명식이 30분 후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께서는 질서 있게 참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
불편하시면, 잠깐 산책하러 나가실래요?
두 사람은 인파를 빠져나와 건물 위층으로 향했다.
밤하늘 아래 도시의 불빛은 반짝이며 찬란하게 흐르고 있었다. 낮에는 감히 꾸지 못했던 꿈들이, 지금은 모두 깨어 있는 듯했다.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얽힌 거리 아래, 길목마다 계곡을 앞에 두고 건널지 말지 망설이는 여행자들이 있었다.
...
이리스는 옥상 가장자리에 앉았다. 저녁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얀 얼굴엔 옅은 홍조가 감돌았고, 빛나는 눈동자는 달빛 아래 그림자를 미동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휘관이 시선을 거두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부드러운 온기가 왼손을 덮었다.
진짜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파오스 님?
지휘관으로서의 소양과 본능은 위장을 유지하라고 외쳤지만, 이리스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감정이 이성을 압도했다.
왜 지금, 왜 그 이름을 묻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player name] 님.
이름, 정말 좋네요. 발음도 예쁘고.
이름은 열쇠이자 권리이며, 소유자의 약속이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리스는 마침내 이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이름을 당당히 불러볼 수 있게 되었다.
[player name] 님.
이리스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불렀다. 혀끝에서 춤추는 글자들이 시의 운율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지휘관의 손을 감싸고 있던 이리스의 손이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동자에는 알 듯 말 듯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그리고 탐욕스럽게 눈앞의 지휘관을 눈으로 한 번 또 한 번 그려냈다.
기억했어요.
이리스는 자신의 모든 바람이 그 결정을 내린 순간 자제력이라는 칼날에 산산조각 나고, 긴 순환 속에 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 잔잔한 재는 억제의 벽을 뚫고, 의식을 갈라놓을 듯 터져 나오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야 비로소 가시처럼 자신을 옭매던 족쇄가 어느새 흐릿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당황하고 있는 그녀의 치아는 떨리고 있었다. 의식이 몸을 배신했다. 그렇다면, 몸은?
붙잡을 수 없었다. 가까워질수록 더 깊이 빠져들 뿐이었다.
가요. [player name] 님.
결국 이리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오늘 전투에서 얻은 코어를 꺼내 들었다. 원래 희미하던 무늬는 이제 이리스를 상징하는 짙은 푸른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쉿.
희미한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자, 이리스의 손가락이 지휘관의 입술을 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player name] 님. 제발요.
백색 소음이 울리기 시작하면서, 입술을 누르던 손가락에도 힘이 더 들어갔다.
지휘관은 꽉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고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시야가 온통 안개로 뒤덮였다.
베인 수도
우금 호텔
20:45
악보 너비: 2
221 보육 구역
공중 정원 소속 물류창고
20:45
악보 너비: 0
지휘관은 이리스가 있던 방향으로 손을 뻗었지만, 안개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휘관...?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하얀 안개가 조금씩 걷히더니, 예상치 못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상 상황 발생. 경계 태세를 갖춰라!
잠깐. 지... 지휘관님이야!
고요한 안개 속에서 무기를 거두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이어서, 마치 다른 세계에서 되돌아온 것처럼, 몇몇 실루엣이 지휘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생체 신호 확인을 시작합니다. 생물학적 데이터 수집 준비 완료.
지휘관이 돌아왔다고 공중 정원에 보고해!
지휘관이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은... 221호 보육 구역 창고였다. 후아와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였던 그 장소였다.
간단한 신원 확인을 거친 후, 격리가 해제되었고 곧 아이라가 전투로 폐허가 된 창고로 뛰어 들어왔다.
지휘관! 한참을 찾았어. 대체 그 갑옷이 어디로 데려간 거야?
해결됐다고? 그럼, 됐어.
맞다. 아시모프 님이 뭔가 발견한 것 같아.
지휘관의 시야 끝에 검푸른 색채가 떠올랐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가 바로 저거잖아? 지휘관, 괜찮아?
아이라가 몸을 옆으로 살짝 비키자, 공중 정원 제복을 입은 대원들이 기체를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 그 기체가 지휘관의 눈에 들어왔다.
지휘관?
심장이 잠깐 멎은 듯 멈췄다가, 곧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순식간에 전신을 감쌌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저는 공... 다른 시간대의 연합 정부 소속 654번... 코드네임... 이리스예요.
안 돼요.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정말 멀어요. 오선지에서 가장 위 선과 가장 아래 선처럼요.
1에서 5까지, 그 짧은 숫자 안에 담긴 간격은... 시간으로 보면 끝없이 멀어요.
갈라진 입술을 무의식적으로 핥았다.
인식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호흡도 가빠졌다.
지휘관, 왜 그래?!
수많은 의문이 한데 뒤엉켜, 몇 번이나 입을 열고 다물기를 반복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띠... 띠... 띠...
그때, 네트워크 연결이 복구된 단말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발신인: 이스마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