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협회
9:30
공중 정원
개인 화실. 아이라는 지휘관의 손목을 붙잡아 벽에서 떼어냈다.
그녀가 걱정한 건 밑그림이 아니라,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player name], 괜찮아?
아이라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지휘관의 온몸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그림에 몰두했던 정신은 어느새 자신의 몸으로 옮겨졌다.
의식이 위아래로 스캔하듯 흐르며, 흐릿했던 윤곽을 다시 그려냈다. 멍했던 정신이 그제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명백한 과로 증상입니다. 검사 결과로 봐선 다른 이상은 없네요. 약은 따로 처방해 드리지 않을 테니, 가능한 한 푹 쉬세요. 휴식이 가장 좋은 약입니다.
생명의 별 의사는 검진 결과가 담긴 화면을 넘기며 차분하게 안심시켰다.
이건 단순한 과로나 피로가 아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다고 해도 이런 반응이 나올 리 없었다.
비바람이 아무리 몰아친대도...
제가 사랑하는 이는, 이 시 속에서 영원한 젊음을 간직할 거예요.
들리는 소리인가, 보이는 광경인가.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벽화를 바라보자, 빈 얼굴이 눈앞에서 흐릿하게 변해갔고, 이목구비가 손에 닿을 듯 아른거렸다.
지휘관은 서랍을 닫으며 자연스럽게 새 원고지를 꺼냈다.
수신함을 닫고 답장을 쓰는 것이 습관이자 본능인 것처럼, 수없이 반복한 듯한 동작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막상 펜을 들었는데, 어딘가 어긋난 듯한 미묘한 위화감에 잉크가 멈춰버렸다. 시작할 내용은 이미 영감 속에서 어렴풋한 형태를 갖췄건만, 펜촉만이 그것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지휘관" 본인은 잊어버렸지만, 몸이 기억하는 그런 감정이었다.
[player name]...
아이라의 목소리가 조금 선명해졌다. 그녀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지휘관의 흐릿했던 인식을 다시 또렷하게 붙잡았다.
감정에 휩쓸리던 순간이 사그라들고, 사물은 이성이라는 도마 위에 무심히 놓여졌다. 심판의 칼날이 내려치려 하자, 사물은 몸부림치듯 구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지휘관"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감각에는 사각지대가 있었고, 문제의 핵심은──"지휘관 " 본인이었다.
난 괜찮아. 방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뭔가... 좀 위화감이 들어.
아니다. 어쩌면 문제는 "지휘관"뿐만이 아니라, 우리 또는 더 넓은 범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결론에 도달하자, 차가운 이성이 영혼과 육체를 다시 장악했다.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공포였고, 문제가 잔잔한 수면 위로 발톱과 비늘을 드러낼 때, 과거의 경험은 최고의 진정제가 되어줬다.
어떤 혼란도, 현역 지휘관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고개를 들자 식은땀이 흘렀지만, 시선은 곧 아이라를 향했다.
아.
… 그래.
지휘관은 단말기로 생명의 별 진료를 예약하며, 궁금증을 참으며 자신을 믿어주던 아이라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 그림이 네게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뭔가 보였어? 아니면 떠오르는 게 있었어?
지휘관은 아이라에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손끝에는 벽화를 만졌을 때 묻은 안료가 남아 있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구나… 알겠어.
단순 환영이라면 납득할 수 있을 텐데,
이번엔 무의식적으로 행동까지 했어. 이건 자극이 훨씬 강하고, 연관성도 크다는 뜻이야.
아이라는 촬영 장치를 내려놓고, 그림을 다시 바라봤다. 멀리서 본 벽화는 분명,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이건 내 의식의 바다에서 가져온 장면을 그린 건데...
지휘관은 단말기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아이라의 서명을 기다리는 빈 진료 예약서가 있었다.
생명의 별
10:20
공중 정원
하얗고 깨끗한 장식, 곳곳에 퍼진 소독약 냄새가 방문객들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아이라와 함께 생명의 별에 도착한 지휘관은 안내 데스크에 다가서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 몇을 발견했다.
저희가 할 말은 아니지만, 보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한 말씀 드립니다. 솔직히 당신들 선을 넘었습니다.
생명의 별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지, 당신들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그 말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공중 정원에 여기보다 더 깨끗한 곳은 없으니 말이죠.
하지만 저희도 나름 치료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지상에서 문제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면 되지만, 우주에서 문제 생기면...
그린스는 과장되게 바닥을 툭툭 밟으며, 진심이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건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을 테죠.
의료 행위에는 면허가 필요하고, 치료도 규정에 따라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하는 모든 조치는, 의사의 허가 아래 이뤄지고 있어요.
그린스는 변함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번엔 대화를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넘겼다.
...
...
짧은 침묵이 흐른 뒤, 히포크라테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통지서 같은 서류를 내밀었고, 아시모프는 재빨리 받아 말없이 서명했다.
이 일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알았다고 하기에도, 몰랐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네. 저들이 워낙 빨리 움직여서 말이야.
잠시 망설이던 아시모프는 뭔가 덧붙이려다 이내 한숨을 쉬었다.
너도 알겠지만, 난 저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 곳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앞으로는 나도 주의할게.
그러길 바랍니다.
가시죠. 주치의 그린스님. 공중 정원의 증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농담이시죠? 그자는 이미 혐의에서 벗어났잖아요. 이번 방문은 위로와 보상을 위한 겁니다.
그린스는 성의를 보이듯 준비해 온 위문품 바구니를 꺼냈다. 화려한 꽃다발 사이로 무기명 신용 저장 카드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히포크라테스는 대꾸 없이 낮게 콧방귀를 뀌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먼저 걸어갔다.
둘이 멀어져 가는 동안, 아시모프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player name]?
아시모프는 잠깐 멈칫하더니, 서명하던 펜을 안쪽 옷깃에 꽂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과학 이사회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감사원에서 연구원 몇 명을 데려갔어.
감사원이요? 쿠로노 그룹이 아니라?
쿠로노 그룹도 관련은 있지만, 시작은 그쪽이 아니야.
말을 이으려던 아시모프는 잠시 망설였다.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과학 이사회 소속 연구 기관이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적용된 성과와 보고 내용이 다르다는 게 적발됐어.
이걸 알아챈 감사원이, 방첩 및 기밀 유출 방지 조항을 들이대면서 개입한 거지.
문제는 쿠로노 그룹이 다르게 생각하지 있어. 그들은 감사원이 과학 이사회를 압박하는 이 사건을 양쪽에서 계획한 공조라고 해석하고 있어.
이해가 잘 안 가요. 감사원이 과학 이사회를 압박하는 게 왜 서로 공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이게 그렇게까지 연결될 일인가? 너무 억지 같은데?
처음 있는 일이 아니거든. 쿠로노 그룹이 과학 이사회 소속 프로젝트에 몰래 손을 뻗치는 건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야.
감사원과 과학 이사회가 함께 대응하거나 심지어 반격하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 됐어. 이런 쓸데없는 일에 끼어드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아시모프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건 그가 생각에 잠길 때 하는 습관이었다.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너무 과격한 수단을 써버렸어. 연루된 연구원들을 모조리 범죄자 취급하면서 심문했지.
그 여파로, 연구원 중 한 명은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어. 감사원 의료팀으론 감당이 안 돼서 결국 생명의 별로 이송됐고.
증거 인멸을 위해 그랬던걸 까요?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쿠로노 그룹이 전체 과정을 녹화한 영상을 공개했어.
그들로선 결백을 증명할 기회가 생긴 거니까, 당연히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이번 사건은 이상한 점이 많아.
아시모프는 좀 더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연구 과정 중간에 설명할 수 없는 공백이 있어.
쉽게 말하면, 기초 공사도 안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빌딩이 세워진 셈이야.
이 프로젝트의 최신 기술은 이미 일부 기체에 소규모로 탑재되어 시험 운용 중이고, 지난달에 최근 실험 결과가 나왔어.
하지만 그 전에 있어야 할 추론 과정이나 선행 기술 부분이 증발해 버린 것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았어.
그들 스스로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건가요?
놀랍게도 그래. 그들의 반응은 이상할 만큼 똑같았어.
모르는 척하다가, 이해 못 하겠다고 하다가, 당황해서 변명하는 순서까지 너무 비슷했지.
아시모프는 한층 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조사관들도 결국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가장 단순한 결론, '성과를 속이고 팔아넘겼다'는 식으로 사건을 정리해 버렸지.
그것도 추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야. 분명히 어딘가 잘못된 게 있는데, 지금으로선 그걸 찾아낼 방법이 없어. 게다가 감사원도, 쿠로노 그룹도 나한테 그럴 시간을 줄 생각이 없어 보여.
간단한 논리야. 1이 없으면 2도 있을 수 없어. 재료와 가공 없이 완성품이 튀어나올 리가 없지.
아시모프의 말에 추상적이었던 내용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듯했다.
응?
지휘관은 서랍에서 발견했던 편지를 꺼냈다.
억지스럽게 들리긴 하는데...
너희들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것 같군.
저랑 [player name](이)가 생명의 별을 찾아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에요.
아시모프 님, 혹시 이 프로젝트가 예술 협회랑 관련 있나요?
너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프로젝트는 예술 협회와 무관해.
순수하게 군사 관련 연구야. 전장에 적용할 기술 개발이 주목적이지. 주 연구 대상은 암능, [player name]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
아시모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정보를 덧붙였다.
프로젝트팀 공식 코드네임은 <color=#ff4e4eff>아베스</color>야. 황금시대부터 이어져 온 연구 기관, 아베스 연구소가 그 전신이지.
너희가 겪은 일이 이 이름과 관련이 있나?
아이라와 지휘관은 서로 눈을 마주친 후,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H0584 번, [player name]님. RS0585 번, 아이라님. 27번 창구로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라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차가운 전자음이 조용히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예약해 둔 진료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