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미는 더 이상 "지구 관찰 일기"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가끔씩 그 작은 행성을 바라보곤 했다.
모든 것이 운명의 궤적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공중 정원이 지구를 떠난 후, 남은 인간들은 지상에서 고군분투하였다.
먼 훗날에는 지상의 인간이 퍼니싱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공중 정원이 먼 우주에서 인간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집을 찾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비의 날갯짓은 더 큰 파문을 일으키지 않는 듯했다.
모든 것이 운명의 궤적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
투영된 푸른 행성을 검지로 살짝 건드리던 나나미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지구를 보고 계신 겁니까?
음...
중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지금쯤이면 "나나미"는 탐지호에 탑승해서 우주로 떠났을 거야.
데이터가 흐르는 바다에는 작은 물결이 일었고, 나나미는 양손을 데이터의 바다에 담가, 자신이 보고 싶은 장면을 찾고 있었다.
잠깐, 이건...
바로 그때, 나나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희미한 좌표 지점을 계속해서 확대했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이중합 탑에서 나왔어.
나나미가 연산했던 262537412640768743개의 세계를 봤을 때, 지휘관은 이중합 탑에서 자취를 감췄는데.
어떻게 다시 나타난 거지?
이윽고 나나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채 말없이 앉아 있던 소녀가 지휘관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지휘관 곁에 있는 나나미와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익숙한 포니테일 대신 부드러운 회색 장발을 하고 있었다. 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안녕,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할게~
난 나나미야. 탐지호의 중추이자 이 공간의 임시 관리자거든. 이번이 우리의 첫 만남이긴 하지만, 나나미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휘관을 알고 있었어!
역시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야~
여긴 Delorean-탐지호야. 나나미의 우주 함선이지!
"이 공간".
나나미뿐만 아니라 조금 전 "하카마"도 이곳을 설명할 때 "우주"가 아닌 "공간"이라고 했다.
흠, 역시 지휘관은 속일 수가 없구나.
여긴 확실히 "연산" 공간이 아니야.
너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여긴... "문"의 뒤편이야.
이중합 탑과 연결된 "문"이야. 여긴 회수된 후의 공간인 거고.
그 여성분한테서 들은 건데, 다른 "문" 뒤에는 <color=#ff4e4eff>생명이 없는 문명</color>이 존재한다고 했었지.
그곳은 가치 있는 걸 회수하고 있어... 진공 영점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문명을 검증한 뒤,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문명의 데이터를 추출하여 "문"으로 운반한 후, 그들의 독자적인 진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지휘관은 이미 어디선가 이 정보를 들은 것 같은데~
이곳은 문명의 무덤이자 문명이 싹트는 곳이야. 매 순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소멸하지.
곧이어 나나미가 창가의 커튼을 걷었다.
칠흑 같은 장막 속에는 영겁의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고, 저 멀리서는 작은 불빛들이 수천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본·네거트의 말대로라면, 문 뒤에는 생명이 없어야 했다.
지휘관이 나나미와 연산을 하는 동안 인간 문명이 전부 멸망한 걸까?
그렇지 않아.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지휘관이 나와... 나나미와 의식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야.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지휘관이 나와... 나나미와 의식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야.
나나미가 반복된 연산 과정에서 "우주"의 어떤 규칙을 건드렸고, 나나미의 연산 능력을 빌려서 지휘관이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어.
이건 일종의 부정행위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거야. 나나미가 아주 조심스럽게 조율했거든~
아무리 그녀가 "미래의 나나미"라고 해도, 모든 사실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원하는 게 뭘까?"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맞은편의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계속 이곳을 떠다니기만 하는 건 꽤 지루하거든.
항성이랑 우주 그리고 새로운 생명... 처음엔 신기했지만, 오래 보고 나니까 조금 질리더라고.
나나미의 목적을 말하자면... 재미있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거야!
긴 머리의 소녀는 그들을 보며 윙크했다.
너희가 지금 여기 서 있다는 것 자체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너희가 이 "미래"에서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는지 보고 싶어.
음...
나나미는 머릿속이 조금 어지러운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잔뜩 신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우리는 이제 게임을 클리어한 거야? 클리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거겠지?!
클리어 보상으로 뭘 받고 싶어?
내가 줄 수 있는 게 너희가 바라는 것과 다를 수 있어. 반면에 너희가 원하는 걸 내가 못 줄 거란 법도 없지.
나는 당연히 너희의 의견을 듣고 싶어.
나나미는 인간과 기계체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길 원해!
응응, 네 소원은 잘 들었어.
그럼 지휘관은?
그 순간, 나나미의 눈빛은 마치 무수한 별들을 넘어, 무한에 가까운 광년을 뛰어넘고 지휘관의 얼굴에 닿은 것 같았다.
말해줘. 네 소원은 뭐야?
꼭 지구여야만 해?
당연하지! 나나미는 나중에 지휘관이랑 같이 사랑의 집의 특제 케이크도 먹으러 가야 한다고!
사실 나는 아직도 이 시공간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데이터의 바다가 파도치듯 일렁이며, 수많은 별빛이 지구의 형상으로 투사되었다.
그리고 그 지구에는 구름에 닿을 듯한 나선탑이 대지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아직도 이중합 탑은 존재하고, 0호 대행자가 그 권한을 장악하고 있어. 그래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거야.
네 말대로 콜레도르는 죽었어. 하지만 0호 대행자는 콜레도르뿐만이 아니야.
지상에서는 이화 적조가 기괴한 오라 같은 빛을 허공에 뿜어냈다.
0호 대행자는 호칭에 불과해. 문명이 <phonetic=퍼니싱>오염된 밈</phonetic>에 "표식"되기만 하면, 0호 대행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게 되지.
콜레도르는 시작일 뿐이야.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음...
지휘관을 기계체로 만들고, 의식을 이곳으로 옮기는 거지.
긴 머리의 소녀가 지휘관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인간의 육체로는 이곳에서 생존할 수 없어. 반면에 기계체로 구성된 의식은 "생명"과 거리가 있지.
나나미가 무의식적으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곳에 남지 않을래?
이곳에 남아서 나랑 같이 살자.
여기에 남는다고?
그렇게 터무니없는 제안이 아니야.
나나미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자, 데이터의 파도가 지표면의 상황을 구현해 냈다.
지금 너희의 지구는 이중합 탑 코어를 얻었고, 내가 너희에게 이중합 탑 코어 연구 자료의 일부를 줬다고 해도...
"정보"의 전달에는 한계가 있어.
나는 너희가 이미 접근한 기술의 범주 안에서만 정보를 줄 수 있어.
그 이중합 코어처럼 말이야.
설령 너희가 모든 연구를 완성했다 해도, 지금의 적조를 누가 막을 수 있겠어?
<phonetic=오염된 밈>퍼니싱</phonetic>이 "회수" 임무를 완료하면, 문명의 씨앗을 가지고 "문" 뒤편으로 돌아갈 거야.
그때가 되면, 우리는 아마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을 거고.
무서운 얘기네.
하지만 나나미는 지휘관이 기계체가 되는 걸 원치 않아. 지휘관은 지금 이대로가 좋은걸.
도미니카도 완수하지 못한 임무인데, 네가 무슨 근거로...
……
wohoo!~
어쩌면 나나미는 바로 이 "미래"를 위해 탄생한 걸지도 몰라!
갑옷을 입은 소녀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어쩌면! 나나미의 사명은 지구를 구원하는 걸지도 몰라!
……
생명이란 가장 무거운 소망과도 같다.
인생은 죽음을 향한 여정이지만, 생명의 의미가 죽음으로 정의되어선 안 됐다.
모든 희생은 새로운 생명을 위함이고, 모든 새 생명은 내일의 희망을 위한 것이다.
수많은 인류가 몸부림치며, 장작처럼 불타올랐다.
불타오르는 그들의 육신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표식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염원했다. 미래의 어느 날을.
흰 비둘기가 푸른 초원을 날아갔다.
꼭 그래야만 해? 여기 남으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지휘관은 겨우 이중합 탑을 벗어났잖아.
루시아, 나나미.
리브 그리고 리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야.
지휘관님?
지휘관님...
지휘관님.
수많은 인연이 지휘관과 이어져, 강제로 끌어당기듯 지휘관을 이중합 탑의 심연에서 끌어올렸다.
수많은 실패가 반복됐고, 그들은 영혼을 바쳐가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그 희생들은 최후의 결말로 가는 초석이 되었다.
나나미도 도울게! 지휘관!
……
……
긴 머리의 소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결과"를 이루려면...
나나미가 광활한 바다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해. 게다가 이런 "대가"를 너희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건 현재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게다가, 너 혼자만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니야.
그 큰 "대가"를 치르고도, 얻을 수 있는 거라곤... 단순한 변화의 기회뿐일 수도 있어.
이 말을 듣고도... 그런 선택을 원해?
응...
이걸로 기계체와 인간이 함께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나나미는 기꺼이 그럴 거야!
먼 우주를 떠도는 삶은 너무 지루하다고.
지휘관도 정말 결심한 거야?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줄게.
물론 네가 여기 남는다고 하면, 난 더 기쁠 것 같아.
나나미가 말한 "대가"는 도대체 무엇인 걸까?
지상의 인간이 그로 인해 더 큰 재앙을 겪게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화 적조가 범람하고, 언젠가는 <phonetic=오염된 밈>퍼니싱</phonetic>이 인간 문명의 모든 것을 회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날 따라와.
긴 머리의 소녀가 그녀 뒤에 있는 큰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