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은 자신의 파멸에서 원시적인 쾌락을 느꼈다.
그들은 동정심이 가져다주는 타락한 위안 앞에 굴복할 수도 있었지만, 고통 속에서 느끼는 황홀감의 대가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파멸의 시대에서는 가혹한 비극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테리 이글턴 <Radical Sacrifice>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은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꿈속에서 지휘관은 육체를 벗어나 유령처럼 세상 만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로는 자신과 밀접하게 연결된 <phonetic=카오스>"그녀"</phonetic>의 육체에 깃들어 지난 세월을 몸소 경험하기도 했다.
또 때로는 꿈속에서 곁에 있는 동료의 기억을 통해 그녀가 말했던 인생을 온전히 경험하기도 했다.
또는... 안정적이면서 평화롭고,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설기도 한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꿈에서는 사람들이 이상한 검은 그림자에 쫓겨 육체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빛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낯선 계단을 따라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한 번 또 한 번 진정한 종말을 엿보게 되었다.
또 다시 비슷한 결말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매번 그렇듯 정해진 희생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님.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당신도 저처럼,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나요?
당신도 저처럼... 이곳에 남은 건 단지 하나의 투영일 뿐인가요?
자, 이제 <phonetic=진실>거울</phonetic> 앞에서 고개를 들고 제게 말해주세요.
시야는 어둡고 윙윙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긴 악몽에서 깨어나자 낯선 거리가 눈앞에 보였다.
"기억해야 했을" 무언가가 이 어둠의 끝자락에 흩어져 있는 듯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여긴 어디지?
지금이 몇 월 며칠이지?
귓가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주위를 둘러보니, 완전히 낯선 지역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지휘관님!
악몽 속의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오르려는 찰나, 따뜻한 손이 지휘관의 얼굴을 감쌌다.
낯익은 얼굴, 익숙한 목소리, 그 고독한 악몽들과 달리, 루시아는 바로 눈앞에서 지휘관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 익숙한 목소리, 그 고독한 악몽들과 달리, 루시아의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그녀의 존재만큼이나 진실되고 따뜻한 감촉이었다.
괜찮으세요?
루시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고 나서야 바닥에 떨어진 혈흔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지휘관의 코피였다.
루시아가 재빨리 지휘관의 손을 막더니, 의료 가방에서 거즈를 꺼내 코피를 멈추게 한 뒤 꼼꼼히 상태를 확인했다.
루시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료 가방에서 거즈를 꺼내 코피를 멈추게 한 뒤 꼼꼼히 상태를 확인했다.
이 말을 들은 루시아는 눈에 띄게 멈칫했다.
지휘관님?
…………
루시아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보다 걱정이 더 앞서는 듯했다.
역시 부작용 때문인 걸까요?
"열쇠"로 시간을 되돌릴 때, 저희 둘에게 부작용이 발생했었어요. 하지만 지휘관님이 더 심한 것 같네요. 처음에는 어지럽기만 했는데, 이후에는 기억이 흐릿해지거나 되돌리기 전과 후를 구분하기 어려워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의식의 바다 편차와 부하 문제요. 마인드 연결만 유지하면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b><ud><color=#34aff8ff><link=12>반이중합 탑</link></color></ud></b>에서 대행자 본·네거트와 충돌이 발생했었어요.<i><color=#a8a8a8><size=30>(밑줄 친 글자는 터치할 수 있습니다.)</size></color></i>
이 길고 긴 악연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
본·네거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짧은 선고와 관련된 기억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면서 참기 힘든 통증도 같이 몰려왔다.
지휘관님.
…………
충돌하던 중 콜레도르도 전투에 합류하게 됐는데, 본·네거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저희와 콜레도르 모두 반이중합 탑에서 밀려나게 됐어요.
루시아가 말해준 일이 전혀 기억에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너무나 생생한 꿈과 같아서 어떤 것이 진짜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른 일들은 기억나세요?
반이중합 탑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요. 제 기체의 일은 기억나세요?
지휘관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3월 30일 그날의 일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라미아가 심해에서 <b><ud><color=#34aff8ff><link=11>"알"</link></color></ud></b>을 가져온 지 약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i><color=#a8a8a8><size=30>(밑줄 친 글자는 터치할 수 있습니다.)</size></color></i>
<b><ud><color=#34aff8ff><link=13>Ω 무기</link></color></ud></b>의 개선 개발이 완료되었고, 루시아의 기체 호환도 끝나게 되면서 만우절이 오기 전에 기체를 변경할 예정이었다.<i><color=#a8a8a8><size=30>(밑줄 친 글자는 터치할 수 있습니다.)</size></color></i>
이를 위해, 과학 이사회 사람들은 관련 인원들을 모두 불러 회의실에서 간단한 설명회를 열었다.
방금 시연한 것처럼, Ω 무기의 유효 범위와 효율이 한층 개선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기체에만 작용하기 때문에, Ω 무기로 정화 구역을 자체 구축하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기술적 문제가 많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수고 많았다. 다음 주부터는 다들 일정한 휴식 기간을 갖도록 해.
응.
책상 앞에서 스크린만 보던 아시모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루시아도 새 기체 적응이 완료되어서 내일이면 변경할 수 있어.
다만 불확실한 조합이 너무 많아서, 반이중합 탑 진입 테스트 전에 최소 3개월 이상은 일반 임무 테스트를 진행해야 해.
예전처럼 테스트도 없이 위기 상황에서 기체를 사용하는 건 위험하고 규정에도 어긋나는 일이니까.
아시모프의 말에 다들 각자의 기억 속으로 빠져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시모프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 "알"은 초각 기체 때의 이중합 조각과는 달라. 남아있는 기억 데이터를 제외하면 어떤 효과도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이합 생물 관련 기술과 호환성이 매우 좋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어.
그래서 겨울 계획의 자료, 초각 기체가 남긴 데이터, 근원 추적 장치, 개선된 Ω 무기... 이 기술들을 결합한 뒤, 그 알을 "저장 장치"로 삼아 "Ω 코어"를 제작해 냈지.
"Ω 코어"는 퍼니싱 면역 외에도, 승격자처럼 퍼니싱을 에너지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수면 캡슐에서 정기적으로 에너지 충전을 하지 않아도 기체를 계속 작동시킬 수 있게 해줘.
공중 정원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하지?
퍼니싱이 없는 상황에선 Ω 코어도 백업 모드로 전환되기 때문에, 그때는 수면 캡슐에서 정상적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면 돼.
좋아. 계속 설명해 줘.
근원 추적 장치의 기술과 결합한 Ω 코어는 기체의 사용자가 퍼니싱에 포함된 정보 일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줘. 예전 리브·백야 기체에서 관찰된 현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돼.
제어 자체는 쉬워. 정보를 읽을 필요가 없을 땐 해당 기능을 능동적으로 끌 수 있어.
Ω 코어와 그에 걸맞은 전투력 향상 외에도 이 기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출 수 있어서 잠입 작전에도 적합해.
처음 사용하는 기술도 많고 기능이 다양해서, 안정성 확보를 위해 3개월 이상의 테스트 기간이 있었으면 해.
아시모프는 스크린 뒤에서 피곤한 눈을 위로 향했다가 다시 내렸다.
반이중합 탑의 출현과 내부 구조는 모두 미지수야. 현재까지 확보한 자료로 볼 때, 퍼니싱의 근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돼.
때문에 충분한 준비를 마치고 진입해야 할 거야.
루시아가 "서염" 기체로 변경하면, 아우도 회수해서 다시 정비 및 업그레이드할 예정이야. 문제가 발견된다면 언제든 기존 기체로 돌아갈 수 있어.
3월 31일, 루시아가 서염 기체로의 변경에 성공한 후 과학 이사회는 긴 테스트를 시작했고, 테스트 중에 발견된 문제들을 계속 개선해 나갔다.
아시모프의 말대로 테스트 없이 실전에 투입되는 기체는 잠재적인 위험이 많다.
처음 3개월 동안은 테스트를 위해 난이도가 높지 않은 탐사와 구조 임무만 수행했다. 그 덕분에 드물게 루시아와 여유로운 3개월을 보낼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임무 겸 온천도 가고, 나무도 심고, 술도 빚고, 평소에는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쳤었던 많은 풍경도 보게 되었다.
그 후에 일어난 일도... 기억나세요?
그 이후, 세상은 서서히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우리는 이 국면을 미리 막지 못했고, 모든 일은 그렇게 갑작스레 일어나 버렸다.
풀리아 삼림 공원 때와 같이, 처음에는 그냥 단순하고 안전한 임무만 수행할 뿐이었다.
다들 피곤하실 텐데, 오늘 밤은 쉬세요.
그날도 루시아와 평소처럼 테스트를 위한 일상적인 호송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목표는 이합 재난 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보육 구역 주민들의 철수를 지원하는 것으로, 당시 이합 재난 구역과는 불과 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곳 주민들이 짐 싸는 것을 도와주다 보니 깊은 밤이 되었다. 그러자 보육 구역 담당자가 따뜻한 토마토수프와 바삭한 과자를 가져와서는 구석에 있는 간이침대에 앉으라고 안내했다.
여기엔 어린아이들이 여럿 있어서 밤에 이동하는 건 위험해요.
담당자가 텐트 구석에 있던 여자아이를 가리키자, 아이는 활기차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언니, 그리고...
아이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무언가에 걸려 지휘관의 품으로 넘어졌다. 그 때문에 테이블 옆 뜨거운 수프가 엎어질 뻔했다.
악!
네, 네. 수... 수프는 괜찮나요?
수프가 자긴 괜찮대.
루시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달래주었다. 아이는 돌아서서 수프가 무사한 걸 확인한 뒤에야 등 뒤에 숨겼던 장미꽃을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거 받으세요!
꽃을 건넨 아이는 곧바로 돌아서서 뛰어가다가 또다시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에이나, 천천히 가렴!
휴, 이 아이들은 매번 덤벙대기만 하네요.
지휘관님, 밤에 출발하면 정말 위험할 수 있어요. 임무 일정도 내일로 잡혀있고요.
그러시죠. 다른 사람들한테 전해주고 올 동안 따듯한 수프 드시고 계세요.
별말씀을요. 저희가 더 감사하죠.
담당자가 즐거운 듯 손을 만지작거리며 웃자 얼굴 주름이 더욱 선명해졌다.
공중 정원에서 영웅 소대인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보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덕분에 다들 마음이 놓였죠.
아무도 재난이 오고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악몽에 빠져 있던 지휘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물에 설치된 탐측기들은 누군가가 일부러 망가뜨린 것처럼 어떤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합 재난 구역에서 흘러나온 적조가 홍수처럼 50킬로미터나 되는 황무지를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비록 루시아는 눈치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모두를 구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적조는 보육 구역을 덮친 후에도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갔고, 주민들을 이송하려던 차량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토석류와 같은 적조의 충격은 단 1시간 만에 이미 쓰러져가던 보육 구역의 건물들을 무너지게 했다. 그리고 건물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퍼니싱에 면역이 있는 리와 카무가 곧바로 도착해 루시아를 도와 적조와 폐허 속에서 생존자를 찾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루시아는 날이 어느 정도 밝아서야 튼튼한 상자 속에서 전날 꽃을 건넸던 어린 에이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에이나의 온몸은 이미 썩어있었다.
…………
하지만 만약이란 없다.
그 사건 이후, 반이중합 탑은 가끔씩 당시에 강림했을 때처럼 붉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이합 재난 구역도 적조의 확산과 함께 급격히 확장되는 추세를 보였다.
의회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하나는 루시아를 일찍 보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지휘관을 보내 승격자들과 협력해서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다.
일찍 출발하시죠. 저희는 이미 정화 구역을 잃었어요. 풀리아 삼림 공원의 참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돼요!
루시아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탑 진입 테스트를 무시한 채 깊숙이 들어가려 하자, 반이중합 탑은 또 갑자기 잠잠해졌다.
상황을 저울질한 끝에, 지휘부는 루시아에게 깊이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반이중합 탑 표층에서 계속 테스트하도록 지시했다.
지휘관은 적조를 억제하기 위해 처음으로 루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가 적조를 저지해 주거나 반이중합 탑 조사를 도와주길 바랐다.
하지만 루나는 자신이 반이중합 탑으로부터 차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진입 규칙이 바뀌었어.
0호 대행자의 행방은 아직도 미지수인데, 혹시 반이중합 탑의 이상이 0호 대행자와 관련 있는 걸까?
본·네거트도 혹사가 말한 것처럼 사라졌어. 아마 너희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반이중합 탑으로 들어간 것 같아.
루나는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거래를 제안했다.
내가 적조를 저지해서 인간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게. 대신 언니가 반이중합 탑에 들어갈 준비가 되면, 그 탑에서 얻은 정보를 나한테도 공유해줘.
그 당시 반이중합 탑의 코어는 나한테 해로운 존재였어. 가까이 가기만 해도 대행자의 능력을 잃게 돼서 제대로 조사할 수가 없었거든.
게다가 이 탑은 예전과는 달리 변하고 있어. 대체 누가 그런 코어의 힘을 뛰어넘어서 반이중합 탑을 장악할 수 있는지 궁금해.
루나와 그녀 주변의 승격자들 덕분에 철수할 시간을 벌었으니, 저희도 새로운 수용 방안을 빠르게 수립해야 합니다.
정화 구역은 이미 A1 공항과 그곳의 오염된 밈이 추락하면서 무너졌습니다. 이제 안전한 곳은 공중 정원뿐입니다.
공중 정원의 수용 능력은 제한적이에요. 지난번 풀리아 삼림 공원 전투 때도 많은 사람들을 수용했죠. 예전 데이터를 바탕으로 선별 조건을 작성해 봤는데...
의원은 잠시 멈추고 주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내용이 많진 않아요. 주로 36세 이하이면서 특기가 있거나 공중합체 적응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우주 무기를 다시 사용해서 적조를 제거할 수는 없는 겁니까?
이합 재난 구역의 확장 속도로 판단해 봤을 때, 사용해 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게슈탈트의 계산으로 봤을 때, 이합 재난 구역이 지구 전체를 덮어버리기까지 얼마나 걸리죠?
원래는 1년 예상했는데, 북극 항로 연합 쪽은 조금 늦춰져서 2년 정도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루나가 적조의 흐름을 유도하는 일을 도와주기로 했고, 정비 부대도 적조의 속도를 늦춰주는 방어 시설을 만들 수 있어서 시간을 좀 벌었어요.
하지만 그래봤자, 5년이에요.
의회의 어두운 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져갔다.
이건 절망의 선고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반이중합 탑에 들어갈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산은 힘 있는 목소리로 동요하는 불안을 잠재웠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지금까지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난번에 몇 명 구하지도 못했잖아...
점차 조용해지는 의회 안에서 이 혼잣말하듯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다.
일단 이 방안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이번 변이만 억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은 "다시 한번" 이합 생물이 된 센 앞에 서서, 그날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떠올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5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5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확장하는 이합 재난 구역에서 인간은 반드시 전환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들은 이 항쟁의 최악의 결말은 희생된 자들이 "영웅"의 무덤에 묻혀 재난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함께 하지 못하는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희생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
그럼, 지금 이 순간에 평화롭게 살아가는 영웅들에게 정말 희생만이 이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얘기한다면... 영웅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하지만, 이 시대의 재난이 가져온 희생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평온한 죽음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