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
구룡 순환 도시, 외곽 거주지
11월 10일, 06:30
이합 생물이 물러나기 시작한 후로 십여 분이 지났다.
순환 도시에는 상회 시절과 고대 구룡의 벽돌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서, 이합 생물들이 구룡 순환 도시를 빠져나갔을 때, 이 건물들은 의도적으로 보존된 것처럼 거의 심각한 손상을 입지 않았다.
만세명의 지표면이 붕괴한 후, 순환 도시 외곽에서 전투를 벌이던 다른 공중 정원의 지원 부대도 즉시 구조 작업에 착수했다. 수많은 수송기가 1000미터 이상의 만세명 돔을 통과하여 구룡 사람들을 다시 지상으로 데려왔다.
구룡파들도 순환 도시와 육교항구의 폐허 사이에서 생존자를 빠르게 찾기 시작했다.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한 가닥의 숨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룡의 먹구름을 가르던 그 하얀 빛이 조용히 이 폐허 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흠...
앉아.
곡은 힘없이 지휘관 옆에 있는 유리 기와를 두드리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아니면 이 자리가 너한테는 맞지 않는 건가, 수석?
지휘관은 곡 옆에 있는 부서진 벽을 넘고,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응?
내 몸속에는 퍼니싱이 없어.
가까이 앉아도 돼.
힘겨운 전투를 겪고서도 곡의 말투는 여전히 날카로웠고, 그 말 깊은 곳에서 오는 위압감은 변함없었다.
결국 바닥에 있는 조각들을 치우고 곡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은 600년 전 구룡 구성의 오래된 성벽 중 하나야. 여기서는 일출을 바로 볼 수 있지.
하지만 화서의 원래 연산에서는 구룡과 만세명이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퍼니싱의 물결 속에 사라질 예정이었어.
그 연산에 따르면, 구룡 상회, 연합 공동체 구룡, 만세명 계획은 오늘 새벽 4시 52분에 끝나게 돼 있었어.
원래대로라면, 이게 구룡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 예정이었지.
그렇긴 하네. 지금 몇 시야?
무슨 일이야?
틀렸어. 이 도시엔 난민이나 생존자가 없어.
그들 모두는 생사 불문하고, 구룡 사람이야. 괜찮을 거야.
조풍과 포뢰 같이 백성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들은 이 폐허 속에서도 전 세계를 비출 문명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거야.
구룡은 전쟁과 고난으로 무너진 적이 없어. 이건 역사의 법칙이야.
날 걱정한다고? 수석한테 걱정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나도 지금은 확신할 수 없어. 내가 정말 살아 있는 건지 아니면 죽어 있는 건지.
어쩌면... 난 죽음을 속일 수 없나 봐.
넌 어때? 수석.
만세명이 누출한 데이터 조각에서 얼마나 많은 걸 봤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거야.
물어봐.
어떤 질문이든, 내가 다 말해줄게. 그게 네 권리야.
우리에겐 시간이 아주 많아..
시작부터 이야기를 한다면...
그때부터 벌써 3년이 지났군.
야항선에 있는 구룡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구룡으로 돌아오는 걸 막아야 했어.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만이 구룡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당시 승격자들은 내가 화서로 유인한 거야. 그리고 여러 수단을 통해 화서가 만세명의 사용 권한을 자연스럽게 얻도록 했지.
그렇게 해야만 그녀가 게슈탈트와 같은 근원인 화서로 게슈탈트를 공격할 수 있었거든.
하지만... 그때 그 루시아라는 소녀 그리고 네가 내 예상을 벗어났어.
우리 사이엔 결코 조정할 수 없는 이념과 원칙의 충돌이 있었어.
그렇게까지 해줄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다는 건 네게 큰 행운이야.
루시아를 언급할 때, 곡의 차가운 시선이 놀랍게도 부드러워졌고, 입가에는 알아챌 수 없는 쓴웃음이 나타났다.
그때 내 최선의 선택은 상황에 맞춰 대응하는 것이었어. 그래서 너희에게 패한 한 후, 가브리엘이 화서를 가져가게 하는 거였어.
그렇게 하면 난 좀 더 잘 숨을 수...
루나가 화서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그녀에게 달렸어.
하지만 어떻게든 루나가 화서를 통해 게슈탈트를 공격해야만 했어.
곡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선 나도 몰라. 나조차도 더 먼 곳은 볼 수 없었어.
화서의 연산 속에선 루나를 제거하거나 그녀가 이런 방법으로 게슈탈트에 접촉해야만 했어.
이게 유일하게 구룡과 만세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어.
그리고... 이 세상이 계속 존재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해. 희망은 희미했고, 나도 큰 기대는 걸지 않았어.
게다가 공중 정원은 너희가 그냥 앉아서 편안하게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야. 높은 곳에서 안일한 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깨우려면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어.
그 외에도, 루나가 정말 화서를 사용해 공중 정원을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인간이 여기까지밖에 올 수 없다는 것과 만세명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어.
어떤 부분은 그렇고, 어떤 부분은 아니야.
화서는 단지 도구에 불과해. 게슈탈트도 마찬가지고.
마지막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인간밖에 없어. 필요할 때, 도구와 결정을 내리는 사람조차도 도구가 될 수 있지.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라는 말이 있어.
어쨌든 그때의 구룡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을 거야.
루나나 너희 중에 그 누구든, 난 그 결과만 기다리면 됐어.
곡은 동쪽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그녀의 눈앞에 있는 시간은 고르게 퍼진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래를 본다는 것도 정말 잔인한 일이야.
그건 책임이자 무거운 짐이 되지.
일부는 봤어.
이합 생물들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인간의 지식을 빼앗아 진화하려고 할 테니까.
그들이 만세명을 노린 것도 결국 시간문제였던 거지.
만세명이 유일한 목적이긴 했지만, 난 도살자가 아니야
곡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들이 날 원망하지 않았다면, 조풍과 포뢰를 믿지 않았을 거야.
그들이 만세명에 들어갈 때, 나를 믿지 않았을 거야. 그때 구룡은 지도자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내가 존재했었으면... 혼란을 초래했겠지. 비난받을 대상이 필요할 땐, 내가 가장 좋은 선택이야.
때로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공통의 적이 필요해.
확실히 많이 성장했군. 수석.
곡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가 공중 정원에 배치한 체스 말이었어. 적절한 시기가 되면 그녀가 왕을 잡을 거야.
왕을 잡을 사람은 그녀뿐이야. 그녀는 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렇게 해야만 했어.
그녀가 나를 죽였을 때만, 사람들은 그녀 뒤에 있는 공중 정원을 공통의 적으로 가질 수 있어.
구룡 사람은 이 배후의 진실을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누가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는 구분할 수 있어.
그들은 조풍과 포뢰를 따라갈 거야. 조풍과 포뢰가 그들을 보호해 주고, 살게 할 테니까.
마찬가지로 그들은 널 따를 거야. 왜냐하면 넌 계속 싸울 테니까.
물론이지.
너니까.
어쩌면 이 세상에서 너 자신 외에 너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는 나일지도 몰라.
만세명 안에서 너의 의식을 볼 수 있었어.
만세명 속 시간은... 거의 무한에 가깝지.
아니.
지난 수십 시간 동안, 수십만 명의 사람들과 구조체가 만세명에 들어갔고, 그 순간부터 화서는 지속적으로 낮은 출력으로 모든 사람의 의식 데이터를 고정밀도로 스캔하고 복제했어.
그런데 네 의식 데이터만 화서가 복제나 기록을 할 수 없어. 이건 게슈탈트도 할 수 없을 거야.
넌 어떤 방법으로도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야.
하지만 난 기억할 수 있어. 그래서 내가... 필요할 때 넌 내 머릿속에 나타날 거야.
만세명의 모든 것, 구룡의 모든 것 그리고 너의 모든 것이 여기 있어.
곡은 손을 내밀어 천천히 이마를 가리켰다.
누군들 아니겠어?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대가도 치를 수 있어. 그게 나 자신이라도 말이야.
곡은 이번엔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난 모든 사람의 이름과 이야기를 기억할 거야.
그건 내가 져야 할 책임이자, 구룡이 져야 할 책임이야.
생사 불문, 허구 실제 불문하고... 어떤 대가도 고려하지 않고...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 일도 있는 법이야. 수석.
이 시대에선 평화는 전쟁으로 지켜야 하고, 진실은 거짓말로 지켜야 해.
곡은 손을 뻗어 지휘관의 왼손을 쥐었다. 곡이 차가운 손을 놓았을 때, 지휘관의 손바닥 위에 저장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가 너에게 전하라고 한 물건이야.
내가 만세명의 연산 세계에서 만난 이야.
"그"는 화서의 연산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지만, 화서와 게슈탈트 사이의 수많은 연결 덕에 "그"가 소녀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 같아.
도미니카.
그 이름은 한때 황금처럼 빛나는 상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임과 꿈으로 그 시대의 척추를 세웠다.
도미니카와 과학 이사회는 그들의 지혜로 그 시대의 영혼을 단련했으며, 인간의 시선을 먼 별들로 향하게 했다.
그렇다고 봐야지.
그들도 항상 신비로워.
설마 하나의 도미니카만으로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들은 그 시대에 많은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이야.
기억해야 할 건 특정 영웅이 아니라, 정신이야.
그것 때문에 "그"가 이걸 너에게 전해달라고 한 것 같아.
그래.
하지만 화서가 도미니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어서, 그들이 소녀의 형태로 나타나서 이걸 나에게 준 것 같아.
우주 끝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나나미라는 소녀 말이야.
그래서 그들이 이걸 너에게 준 거야. 너만이 이걸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이건 "초대장"이야.
어.
그래.
구체적인 건, 나도 몰라. 이 "초대장"의 구체적인 내용은 너만 알 수 있어.
난 "도미니카"가 아니니까.
곡의 말에는 자조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때, 하늘의 회색빛이 새벽 햇살에 묻혔고, 해가 곧 떠오를 것 같았다.
그건 예상 밖의 일이었어.
원래 계획은 연산에 따라 거짓 죽음 상태를 이용해 구룡이 멸망하는 가능성으로부터 구룡을 지키는 거였어.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던 거야. 예를 들면... 스스로를 "황제"라고 부르는 존재 말이야.
곡은 터질 듯한 분노를 억누르려 애썼다.
그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화서와 만세명 그리고 구룡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 거야.
맞아.
만세명의 계산 세계에서 나와 그는 오랜 시간 싸움을 벌였어.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게 아니라면 연산과 시뮬레이션이 그에게는 매우 익숙한 듯했어.
대충 그런 것 같아.
그래서...
현실이든 가상이든, 살든 죽든, 대가가 어떤 거든 상관없어.
여기까지만 얘기할 게.
곡은 지휘관의 손을 잡으며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손끝의 미세한 차가움은 만세명에서 생과 사 사이를 맴도는 망자들로부터 온 것이었지만, 지금은 곡의 몸 안에 수많은 바람이 모여 뜨거운 흐름을 이루는 것 같았다.
남은 문제들은 앞으로의 시간에 맡기자.
태양이 곧 떠오르려고 해. [player name].
우리 문명도 한때 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났던 적이 있었어.
흔들리거나 망설이지 않고...
흥. 그게 너다운 거지.
구룡을 밝히는 첫 번째 햇살이 곡의 얼굴에 닿았다.
곡은 처음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다시 빛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