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25 영원히 타오르는 횃불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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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1 조각난 비극

붉게 물든 시야로 얼어붙은 대지를 봤다.

포효하는 침식체가 진흙 속에서 끝없이 몰려들었다.

절단된 팔다리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의식의 바다는 순환액과 풀 냄새가 섞인 이상한 냄새로 가득 차 있어서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구... 구해줘.

그녀는 훈장 뒷면의 비밀 버튼을 세게 눌렀다. 그러자 통신이 연결된다는 붉은빛이 훈장에서 깜박였다.

황야에서 구조체의 몸통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힘없이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전장을 청소하던 구조체가 뒤늦게 도착했다.

무서워.

구조체는 땅에 널브러진 구조체 잔해를 아무렇게나 훑으며, 뭔가를 찾으려는 듯했다.

찾았다. 여기 있네.

구조체는 힘없는 로봇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벌린 뒤, 그 안에서 금속 명패를 능숙하게 꺼냈다.

등록. 공중 정원의 실버 팔콘 소대 소속 나타. 사망.

구해주세요.

저흰 아직 살아 있어요.

등록. 공중 정원의 실버 팔콘 소대 소속 제카. 사망.

아직도... 살아있어... 안돼...

등록. 공중 정원의 실버 이글 소대 소속 지휘관 아르빌...

사망.

그렇지 않아요.

안타깝군.

붉은빛이 깜박이는 실버 팔콘의 훈장이 그 구조체의 발밑에 짓밟히고 있었다.

구조체가 의도적으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땅에 널브러진 구조체의 잔해를 힐끗 살폈다. 아직 그녀의 의식이 남아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우릴... 구해주세요.

부서진 발성 시스템에서 꼬인 발음의 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마지막 비명은 바람 속에 흩어져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12시간 전. 공중 정원.

세실리. 이것 봐!

여성 구조체가 세실리를 향해 손에 든 종이책을 흔들었다.

드디어 이 책의 종이판을 구했다고. 황금시대에 발행된 건데, 발매량이 적어서 정말 귀한 거래.

발매량이 적다는 건 사람들이 안 사서 그런 거 아냐? <황금시대의 시 모음집>. 이건 어떻게 들어도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지 않잖아.

야!

됐어. 싸우지 마. 지휘관님은 어디 가셨어?

보라색 장발의 구조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싸우는 두 동료를 말렸다.

휴게실에 계셔. 새로운 임무가 들어왔다던데.

세실리가 동행해야 한다고 했어... 근데 세실리는 지원에서 막 복귀한 거 아니야?

이번 주 세실리의 출근 기록이 장난이 아닌 거 같던데...

괜찮아. 내가 자청한 거니까.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면 좋잖아.

게다가 그 소대가 간 보육 구역은 저쪽이야.

그 아이들을 구한 뒤에도 그렇게까지 서비스를 제공하다니,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소대가 근처를 지나갈 때면 항상 들르고, 가끔은 네 물자도 나눠주잖아.

너무 어린아이들이라 혹시 괴롭힘이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자주 가보는 거야.

이쯤하고, 지휘관님께서 보내신 임무 브리핑은 나왔어?

112번 보육 구역의 침식체와 이합 생물을 처리하고, 보육 구역 주민을 보호하는 거야.

보호 임무인 건가?

임무가 시시하다고 얕보지 마!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지구의 미래를 위한 것이고, 모든 전투는 앞으로의 큰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경험을 쌓는 거야.

준비나 하러 가야겠어. 세실리. 같이 갈래?

난 월리스 참모장님께 여쭐 게 있어서, 나중에 전투 대기실에서 보자.

회의실.

월리스는 회의 테이블 뒤에 앉은 뒤, 회의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들어와.

월리스 참모장님?

오랜만이군. 세실리.

제가 지난번에 제안한 계획은 승인됐나요?

아직 안 됐어. 지금 방랑하는 아이들에게 공중 정원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호는 보육 구역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거야.

특별히 훌륭하거나 부모가 큰 공헌을 한 경우에만 공중 정원으로 데려올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

그런 조치는 아이들에게는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그래, 아이들에게는 불공평하겠지.

모든 일이 흑과 백으로만 나뉘는 건 아니다. 세실리. 이 정도는 너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정의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니 중도에 길을 잃은 진리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라", 참모장님께서 예전에 가르쳐주신 거잖아요?

공중 정원의 수용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월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공중 정원과 관련된 일 중에는 월리스나 하산이라 할지라도, 내릴 수 없는 결정들이 있었다.

제가 너무 조급했던 거 같아요. 죄송해요.

네가 모든 아이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싶어 한다는 거 알아. 그래. 모든 아이는 미래로 가는 한 줄기 희망이지.

하지만 당분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야.

세실리는 월리스가 가르친 학생 중, 가장 출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완벽에 가까운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조건에서는...

아... 저희에게 새로운 지상 임무가 떨어져서 곧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새로운... 지상 임무? 그런데 왜 내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

월리스는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침식체의 공격이 있었다고 하던데,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 같네요. 어쨌든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 방안을 계속 개선해 나갈 겁니다.

세실리의 단말기에서 재촉하는 통신음이 울렸다.

아... 시간이 다 됐네요.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 월리스... 교관님.

문이 닫혔다.

안 돼. 가지 마! 가면 안 돼!

갑자기 깨어났을 때, 이마에 차가운 응축액이 가득했다.

세실리?

괜찮아?

악몽을 꿨어.

……

"바로 이런 순간에, 그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내면의 평화와 침착함을 유지하라고 가르쳐주네."

나타는 유일하게 남겨진 <황금시대의 시 모음집>으로 세실리를 위로하려 했다.

이런 곳에서 저런 걸 믿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이건 그냥...

그냥 뭐... 마음의 식량이라고 말하려고? 됐어. 우린 아침을 충분히 먹었으니까.

그만해. 나타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잖아.

그녀는 뒤쪽의 감시하는 시선과 깜빡이는 카메라를 등지고, 그녀들이 약속한 비밀 신호를 조심스럽게 그렸다.

[지휘관님은 어디 계셔?]

[서쪽 구역에 계셔.]

[통풍관으로 탈출할 수 있을 거야.]

[정확한 정보인 거야?]

[정확해. 아리사와 확인했어.]

아리사... 이런 지저분하고 위선의 규칙에 따라 살고 있는 참 착한 아이였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여기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리사도 함께 데려가야 했다.

[나타는?]

[무기도 준비됐어.]

이런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건 나타밖에 없었다.

부서진 실버 팔콘의 훈장을 손에 꼭 쥔 세실리는 조용히 방향을 고민했다.

안... 안돼. 가면 안 돼.

[계획대로 준비해.]

[오늘 밤 실행에 옮기자.]

안 돼. 문제가 터질 거야.

제카와 나타가 세실리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행 요새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세실리는 월리스 참모장과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 돼!

세실리 언니?

괜찮으세요? 세실리 언니

차가운 응축액이 이마에서 한 방울씩 흘러 귀 옆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끈적한 액체는 의식의 바다로 파고드는 작은 뱀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악몽을 꾼 것뿐이야.

아리사. 무슨 일이니?

의식의 바닷속에서 한때 굳게 믿었던 그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차가운 응축액이 인조 피부의 손바닥에서 조금씩 스며 나왔다.

오늘 아버지께서 바쁘시다면서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없다고 하셨어요. 세실리 언니, 시간 괜찮으세요?

물론이지. 아리사.

세실리는 아리사의 이마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었고, 아리사는 멍하니 세실리를 바라봤다. 아리사의 맑은 눈동자는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착한 아리사는 유토피아라는 이 썩은 땅에서 피어난 유일한 꽃이었다.

통풍관을 통해 탈출을 시도한 그녀들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오로라 부대가 그녀들의 탈출을 발견한 즉시 의식의 바다 교란 장치를 가동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유토피아에 들어간 첫 번째 주민으로서... 괜찮은 선택되겠어.

배양 접시에 액체가 주입되면서, 기계에서 차가운 띠띠 소리가 들렸다.

역시 공중 정원에서 온 구조체들은 달라, 데이터가 아주 훌륭해.

그녀는 아르빌과 제카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됐다.

아? 여기 손님이 계신 것 같아요. 저쪽으로 가요.

옆문을 통해 보니, 피크맨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의사님께서 원하는 걸 위쪽에서 가져올 수 없다고요, 그러니 일단 제 보수를 정산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록을 조작하는 것도 더는 위험해요. 전 보수를 받고 어서 도망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등록. 공중 정원의 실버 팔콘 소대 소속 나타. 사망.

등록. 공중 정원의 실버 팔콘 소대 소속 제카. 사망.

등록. 공중 정원의 실버 이글 소대 소속 지휘관 아르빌...

사망.

안타깝군.

아니...

세실리 언니?

어떻게... 그럴 수...

새로운... 지상 임무? 그런데 왜 내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

침식체의 공격이 있었다고 하던데,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 같네요...

그 문을 열면 안 돼...

[이렇게 하자.]

[제카와 아르빌을...]

[성급하게 나서지 마.]

파손된 실버 팔콘의 훈장이 눈 덮인 평원에 버려졌다.

배양 접시 안에 떠 있는 나타에게서 더 이상의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앞에 있는 갑옷이 천천히 뒤돌아봤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만날 거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유토피아에서...

그만!

이번 탈출에서 실패한 대가는 나타였다.

그녀들은 바깥으로 통하는 문의 비밀번호를 얻어냈고, 차가운 바람까지 느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언니?

그렇다. 이제는 접두사를 사용해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 실버 팔콘 소대는 이제 세실리만 남았다.

음... 괜찮아. 악몽을 꾼 것뿐이야.

그렇다. 이 모든 건 악몽에 불과했다.

침식체 수량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을 때, 보냈던 구조 신호에 왜 응답이 없었는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훈장의 긴급 연락 버튼을 사용했을 때, 왜 상대방이 응답하지 않았는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번 탈출을 시도했을 때, 왜 배신을 당했는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이곳에 들어섰을 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곳에 들어섰을 때, 그녀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곳에 들어섰을 때...

옥상의 천창 밖에 무거운 회색 구름이 천막에 쌓여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오랫동안 쌓인 먹구름이 폭우로 변해서 무거운 유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유토피아에 들어온 이후로... 이런 하늘을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억울했던 걸까? 조금은 그런 것 같기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배신당했던 고통과 도망치고 싶었던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이게 최선의 결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실버 팔콘 소대여, 안녕.

그리고 지금 하는 그녀의 도피를 허락해 줘.

세실리

미안해, 아리사. 언니를 용서해 줘.

도망치고 나서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게 정말 비열하지만...

날이 밝는 그때가 찾아온다면...

날 대신해서 이 세상을 계속 지켜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