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눈을 뜬 알파는 루나와 자신의 집을 봤다.
언니. 어서 와.
겨울에 쌓인 눈이 사라지면서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파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루나...
여기 온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엔 눈앞의 소녀가 자신을 현혹시키려는 승격 네트워크의 음모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함정이 아니라 루나가 알파를 위해 맡은 역할에서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만든 마지막 피난처였던 거였다.
그리고 이건 알파와 루나의 유일한 연결고리이기도 했다.
순백의 소녀는 평소처럼 자기와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이내 걸음을 멈췄다.
언니가 이곳에 오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네?
응.
알파는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
루나. 예전의 넌 세상을 바꾸려면 파멸이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달에서 돌아온 넌 변했고,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했어.
너에게 이런 변화가 있어서 난 정말 기뻤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너와 승격 네트워크의 연결은 더욱 긴밀해졌지.
난 그런 네가 걱정됐지만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어.
알파는 눈을 감았고, 보기 드물게도 연약한 기색을 보였다.
난 잘못된 결정을 많이 했어.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너에게 의지했었지.
그리고 항상 좀 더 기다리자, 좀 더 지켜보자, 정보를 좀 더 모은 후에 행동하자... 그렇게 자신을 설득했어.
하지만 난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지.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모든 준비는 의미가 없는 거야.
루나. 모든 결정을 너한테 떠넘겨서 미안해. 제자리걸음 했던 건 나였어.
알파는 다시 눈을 떴고, 면전의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루나. 난 네가 승격 네트워크를 선택한 의미... 그리고 승격 네트워크가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 그건 승격 네트워크가 너한테 포기라는 선택지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거야.
마지막에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너에게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남겨주고 싶어.
그러니까 이번 이별은 아주 잠시만 떨어져 있는 거야. 난 당분간 먼 길을 떠날 거야.
언니...
잘 가. 가서 언니가 하고 싶은 걸 해.
따뜻한 세상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고, 알파는 눈앞의 문을 열었다.
부서진 땅을 밟으며 뒤에서 지켜보던 시선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선이 사라진 순간 알파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들어섰다.
이게 과연 옳은 길일까?
자신과 비슷한 목소리가 의식의 공간에 울려 퍼졌고, 사지는 쇠사슬과 끈으로 단단히 속박돼 있었다.
주위에서 떠다니는 검은 큐브 때문인지 의식의 공간이 좁게만 느껴졌다.
깨진 거울 속엔 알파의 현실 모습이 비쳤고,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건 너희들의 유일한 연결고리야. 그녀를 버리겠다는 거야?
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휘둘리는 걸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알파는 전력을 다해 쇠사슬을 없애려 했지만, 검붉은 족쇄는 부서졌다가 금방 재생됐다.
의식의 바다 심층에 있는 자신이 먼저 속박에서 탈출할까? 아니면 의식이 먼저 잠식을 당할까?
그때, 그를 말릴 힘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약육강식이 유일한 진리야.
잡음은 조금씩 익숙한 목소리로 변했다.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듯 또는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이건 환청일까? 아니면 한 번도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일까?
이 행성의 문명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 때문에 생명의 형식에도 변화가 필요해.
그래서 승격 네트워크의 선별이 있는 거고, 그 때문에 승격자가 출현하게 된 거야.
퍼니싱은 무기도 아니고 도구도 아니야.
그건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필수로 직면하게 될 자연의 섭리다.
알파의 눈앞에 밤하늘이 펼쳐지면서, 수천만 년 전의 광휘가 스쳐 지나갔다.
우주는 탄생했을 때부터 정보 구조를 갖추고 있어. 공간, 물질, 에너지...
여러 문명은 그것들을 다르게 불렀어. 문명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보 구조를 발견했고,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냈어.
모든 정보 구조엔 사명이 있고 목적이 있어.
인간... 지혜를 가진 생명도 수많은 정보 구조 중의 일환이다.
정보 구조 간의 영향은 단일한 게 아니야. 한 정보 구조가 다른 구조에 영향을 준다면, 다른 구조의 영향을 받는 것도 당연한 거야.
퍼니싱은 계속 존재했어. 다만 특정된 상황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것뿐이야.
퍼니싱이 계속 존재했다면 승격 네트워크는 뭘까?
상호작용하면 새로운 구조가 생기기 마련이야. 퍼니싱도 마찬가지고.
승격 네트워크의 탄생은 벗어날 수 없는 규칙이자, 숙명이었어.
승격 네트워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거지?
"규칙"을 깰 수 있는 개체가 나타날 때까지 문명을 선별하고 종족을 선별하기 위해서.
개체?
정체된 문명은 쇠퇴하게 되면서 결국 멸망하게 되지만, 생명의 형식은 진화의 발걸음을 멈출 순 없어.
그 개체가 나타날 때까지 선별하는 건 승격 네트워크의 정해진 운명이야.
알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지...
변수를 주고, 시련을 시킨다면...
넌 결말에 도착하게 될 거야.
눈앞의 밤하늘이 사라지자, 알파는 설원에 서 있는 자신이 보였다.
순환액이 오색찬란한 물줄기를 형성했고, 수많은 칼들이 주변에 꽂혀 있었다. 그건 훈장 같기도 했고, 감옥 같기도 했다.
그녀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손을 뻗으면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이 쌓인 잔해가 그녀의 왕좌였다.
이런 광경을 본 알파는 가볍게 웃었다.
깰 수 없는 숙명 같은 건 없고, 절대적인 규칙도 존재하지 않아.
약육강식의 선별은 규칙일지 몰라도 진리는 아니야.
선별의 종점에 아무것도 없다면, 더 큰 우리로 바꾼 것과 다를 게 뭐지?
나와. 얼굴 보고 얘기하지.
다음 순간, 알파의 모습이 사라진 설원엔 공허한 무덤처럼 널브러진 잔해만 남아 있었다.
이미 선택을 했나 보네.
눈앞의 광경이 원래대로 다시 돌아왔고, 어느새 속박에서 벗어난 알파의 기체는 현실과 같아졌다.
그리고 알파의 맞은편에서 알파와 똑같은 모습을 한 이가 거울에서 나왔다.
우리를 깨고 싶다고 했으니 마지막 선별을 시작할게.
바라던 바다.
태도가 서로 부딪치면서 격렬한 불꽃이 튀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싸웠는지는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칼날이 부딪칠 때마다 의식의 바다 공간이 격렬하게 흔들렸던 것만 기억났다.
의식의 바다 가장자리에 검은 균열이 생겼고, 그 균열로 밖의 허무를 볼 수 있었다.
의지는 흔들리지 않고 있지만, 이 의식의 바다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태도가 다시 부딪치자, 둘은 힘의 충돌 때문에 뒤로 두 발짝 물러서게 됐다. 그리고 알파는 칼 손잡이를 움켜쥐며 팔의 떨림을 멈추게 하려 했다.
용기는 인정하지. 하지만 넌 그것 때문에 심연에 끌려가게 될 거야.
네 의식의 바다는 원래부터 손상돼 있었어. 속박에서 벗어나기 전에 네가 먼저 무너지게 될 거야.
알파는 공격과 회피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다. 하지만 자신과 동일한 상대를 마주했기 때문에 공격마다 같은 방법으로 막혔다.
황야가 불타오르고 지면에 균열이 생기자, 그 사이로 용암이 솟구쳤다.
의식의 바닷속 모든 것이 충돌로 부서졌고, 알파는 조금씩 없어지는 종점을 향하고 있었다.
네가 졌어.
알파는 정면에서 내리치는 공격은 막았지만, 뒤따르던 칼집 공격은 막지 못하고 복부를 맞았다.
윽...
상대방에게 걷어차여서 날아간 알파는 순환액을 토해내며 간신히 칼날을 이용해 몸을 지탱했다.
이건 알파가 자주 사용했던 기술이지만, 의식의 바다가 붕괴하면서 주의력을 집중하지 못한 탓에 상대방의 행동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었다.
의식 조각이 떨어지면서 죽음의 환상이 알파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불공평한 싸움이었으니, 이젠 끝낼 때가 됐어.
상대는 장검을 칼집에 넣고, 일시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알파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다.
흔들리는 생명의 화염이 다 타버리기 직전이었다.
일어나요!
이때, 불타오르던 불바다에 새하얀 눈꽃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꽃이 떨어지면서 끝없는 얼음벽이 솟아오르며 둘 사이를 갈라놓았고
검은 머리 소녀가 얼음벽을 타고 내려와 적을 향해 참격을 연속으로 날렸다.
이런 상황에서 의식 잠복을 한 건가?
알파는 붕괴 직전이었던 의식의 바다가 조금씩 복원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지?
075호 도시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루시아는 의식 잠복을 이용해 알파의 의식의 바다에 진입했고, 같은 근원의 의식의 바다는 융합되고 덮어씌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됐다.
이런 융합 덕분에 알파는 만신창이가 된 의식의 바다를 복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융합이 분기점을 넘어서게 되면, 루시아의 의식이 완전히 덮이게 된다.
왜 그녀를 도와주는 거지? 너희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잖아.
알파의 환영은 루시아의 회전 참격을 가볍게 피했고, 루시아가 칼을 거두기도 전에 여러 벼락을 내렸다.
우리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건 맞아요.
흩날리는 눈꽃이 얼음벽을 이뤄서 덮쳐오는 벼락을 막았다. 그리고 상대방을 다시 덮친 루시아는 연이은 칼 빛으로 상대방의 공격 노선을 봉쇄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칼날이 닿는 순간 루시아는 뒤에 있던 추진기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추진기에서 분사된 기류가 루시아의 옷을 흩날리며 알파의 환영을 날려버렸다.
거스르고 싶은 운명이 있어요!
알파 옆으로 온 루시아의 팔에 서리가 맺힌 흔적이 생겼다. 방금 전 일격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건 루시아가 몸으로 분사기의 경로를 엄호했었기 때문이었다.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한테 돌아갈 거예요. 여기서 의식이 덮이는 걸 보고만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요.
알파. 일어나요!
이런 곳에서 무너질 생각인가요?
……
알파가 바로잡고 싶었던 "실수"는 알파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둘은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자신만의 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둘의 짧은 교집합이 어딘가에 생기기 일쑤였다.
칼을 맞댈 때가 있었고...
또는...
칼날에 번개를 응집한 알파가 루시아와 다시 어깨를 나란히 섰다.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쓰러지지 않아.
의식이 덮이기 전에 어서 끝내자!
기나긴 싸움이 종지부를 찍었고, 알파의 환영은 그녀가 나온 거울처럼 금이 갔다.
몸에 금이 간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윽...
의식 공간에 쏟아지는 눈꽃이 조금씩 더 늘어났다.
융합이 곧 분기점을 넘을 거야. 의식의 바다에서 어서 나가는 게 좋겠어.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꽃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자 주위의 의식 공간이 조금씩 상처투성이 모습으로 돌아갔다.
넌 다른 결말로 가는 길을 찾았어.
그 말을 들은 알파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방의 붕괴 직전인 몸에 칼을 꽂았다.
거울은 깨졌고, 알파의 환영은 데이터 조각으로 흩어져 모종의 연결 방법을 통해 본체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이내 보이지 않는 차단막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의식의 바다 주위의 공간이 조금씩 좁아지면서 바람조차 통하지 않는 우리를 만들어냈다.
이게 너희들의 진정한 목적이었구나.
정해진 선별 규칙만 따른다면, 그건 우리가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우리가 될 거야.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려면, 그것을 구속할 힘이 필요해.
이제부터 내가 네 [우리]야.
공중 정원은 너한테 감사하지 않을 거고, 다른 승격자도 널 배신자라고 생각할 거야. 모든 사람이 너희들의 가치를 탐낼 거라고.
너희가 모두의 적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 어떤 동맹도 없게 될 거야.
괜찮아. 지금으로도 충분하니까.
"지류"를 가로채면 종점과 출발점이 영원히 분리될 거야.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넌 무한한 소용돌이에 의해 허무라는 심연에 빠지게 될 텐데.
이건 시작에 불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