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식된 실험체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중앙에 둘러싸인 두 그림자는 검은 바다를 뒤흔드는 파도 같았다.
단도로 실험체 하나를 벤 알파가 몸을 옆으로 돌리자, 칼집이 초승달 모양을 이루면서 뒤에서 기습하려는 실험체를 날려버렸다.
냉기로 형성된 회오리바람이 공중에서 스쳐 지나가자, 튕겨 나간 실험체가 순식간에 얼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루시아가 분사기를 회수해 앞에 있던 실험체의 공격을 막으려 할 때, 다른 실험체가 천장에서 루시아를 덮쳐오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루시아가 한쪽으로 피하려 했지만, 다른 실험체가 그녀의 칼날을 꽉 잡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실험체가 움직일 수 없는 루시아를 머리 위에서 공격하려는 순간, 공중에서 천둥이 터지며 오존의 비릿한 냄새를 남겼다.
머리 위 위협이 사라지자, 루시아는 자신의 칼날을 잡고 있는 실험체를 쓰러뜨린 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알파의 등과 맞대어졌다.
알파와 루시아의 방어선이 좁아진 걸 본 실험체들은 대책을 고민하듯 일시적으로 공격을 멈췄다.
그쪽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요.
손놀림이 느려지진 않았지만, 알파와 루시아의 말투에선 조금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녀들은 사방에서 오는 적들보다 의식의 바닷속 잡음을 억누르는 데 신경을 더 써야 했다.
루시아와 알파의 피로를 눈치챘는지, 잠시 둘을 살피던 실험체들이 다시 공격해 왔다.
그쪽을 부탁할게.
네. 알겠어요.
분사기를 방패 삼아 여러 실험체의 공격을 막은 뒤, 암적색 태도로 그들을 두 동강 냈다.
번개가 검은 몸을 타고 흐르자, 실험체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정지됐다. 그런 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의 칼날이 번쩍이자, 실험체의 제어 중추가 정확히 분쇄됐다.
미러 이미지 같은 칼 빛이 등을 경계로 양쪽에서 번쩍이며 틈 없는 원을 이루었다.
검은색 조수가 몇 번이고 밀려왔지만, 결국엔 의미 없는 거품만 될 뿐 조수 중앙의 암초를 흔들 순 없었다.
하지만 끝없는 공격에 암초의 내면은 조금씩 만신창이가 돼가고 있었다.
……
……
루시아와 알파는 물어보지 않아도 서로의 상태를 감지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방어전이 알파와 루시아가 힘겹게 버티고 있는 의지를 깎아내렸다. 그리고 의식의 바닷속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조금씩 심해지더니 둘의 행동에 영향 주기 시작했다.
또 한 번의 실험체 공격을 격퇴한 뒤...
α!
준비됐어.
짧은 한마디 대화만으로도 알파와 루시아는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루시아와 알파는 전술에서의 사고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의 협력만으로도 훌륭한 케미를 보여줬다.
그것은 방어작전을 포기하고 오랜 시간 축적한 일격으로 실험체들을 모두 처치하는 것이다.
광범위한 번개 빛이 알파와 루시아 주변에 터지면서 루시아에게 기회를 만들어 줬다.
분사기 끝의 기류는 둘의 옷을 펄럭이게 했고, 그것을 꽉 쥔 루시아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와 동시에 알파는 장검을 칼집에 넣고 루시아가 땅에 꽂았던 태도를 밟은 뒤, 루시아와 같은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극한까지 축적한 찰나의 얼음이 루시아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면서 확산한 냉기가 지면의 실험체들을 얼려버렸다.
칼집의 표시등이 차례로 빛을 내자, 알파는 빠른 속도로 장검을 뽑았다. 순간, 눈 부신 번개 빛이 모두의 시력을 빼앗아 갔다.
시력이 돌아올 때쯤 알파와 루시아는 지면에 착지해 있었다.
주위엔 번개로 그을린 흔적으로 가득했고, 쓰러진 실험체들도 움직임을 멈춘 채 초토화의 일부가 됐다.
땅에 꽂았던 태도를 뽑아낸 루시아가 가쁜 시뮬레이션 호흡을 진정시키려 했다.
주위에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알파도 장검을 칼집에 넣었다.
일단 여길...
알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밑에서 진동과 함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무중력이 느껴졌다. 지면이 알파와 루시아의 축적한 일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이다.
(깊이가 이상해...)
지면이 꺼진 깊이는 방 높이보다 훨씬 높았다. 아무리 구조체라도 이대로 떨어지게 된다면 부상을 입게 될 거였다.
설령 다치지 않고 착지한다 해도 함께 떨어지고 있는 낙석에 주의해야 했다.
알파가 충격을 흡수할 만한 물건을 찾고 있을 때, 주변의 온도가 갑자기 떨어지면서 알파 앞으로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여기예요.
분사기로는 구조체 두 명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루시아는 냉기로 떨어지는 돌들을 힘겹게 얼려서 미끄럼틀을 만들어 냈다.
알파는 루시아가 얼음으로 만든 미끄럼틀을 밟은 다음, 루시아가 미끄럼틀을 만드는 동안 칼자루로 낙석을 옆으로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다시 땅을 밟게 됐다.
루시아는 서리가 생긴 분사기를 회수한 뒤, 낯선 주변 환경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과거 기록엔 이 지하실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
이곳은 쿠로노 내부 인원들한테도 숨겨야 하는 곳인 거 같아.
루나가 달로 옮겨지기 전에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