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했던 것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호화롭지도 않은 그것은 검은 암석처럼 산들 사이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북아시아 생명 과학과 진화 연구소"인가?
이곳에 처음 온 남성 연구원이 눈앞의 가리개를 내린 뒤, 주위 경치와 하나가 된 보루를 보며 감탄해했다.
이른 봄이었지만, 이곳은 새하얀 설경 그대로였다. 그리고 땅을 덮은 얇은 눈들은 조금씩 검은색 진흙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산과 하나가 된 보루의 주변엔 인간 문명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강철 틈새로 완전무장하고 돌아다니는 경비 인원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수수하군.
하하. 전 오히려 저희 같은 사람들의 상태에 딱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옆에 있는 출구에서 점잖은 남성이 걸어 나왔다.
"옥석 가리기"라는 문화가 있다고 하는데, 돈을 주고 옥이 들어있을 거 같은 광석을 산다고 해요.
거래가 성사된 후, 광석을 자르면 색이 좋은 옥이 나와서 하룻밤 사이에 거대한 부를 쌓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얻지 못해 쫄딱 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옥석 가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목과 운에 돈을 걸죠.
우리에게 있어 연구를 몇 번이나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연구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경비 소진과 성과 중 어느 것이 먼저 다가올지...
옥석 가리기 같지 않나요?
진정한 성과를 내기 전까지는 모두의 노력이 보잘것없는 돌멩이에 불과하죠. 구매자 외에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우리가 틀린 답안을 배제해 줬으니, 전체 과학 체계의 연구에 기여하긴 했죠.
하지만 우리 자신은 미래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준 돌이 된 거 아닌가요?
그렇게 말한 남성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어느 부서에서 구조조정 당했나요? 아니면 경비가 소진돼 팀이 해산된 건가요?
날카로운 질문이네요. 그래도 앞으로의 동료들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상대방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의 시원한 성격에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전 이곳의 연구원이 아니에요. 엄밀히 따지자면 상인이고 이곳엔 물건을 인수인계하러 왔을 뿐이에요.
고드윈 씨의 이름은 익히 들었어요. 평범한 인간들이 당신의 대범한 실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정말 안타까웠어요.
……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에선 원하시는 모든 지원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다음에 또 뵐 수 있길 바랄게요.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더니, 방금 전 고드윈이 내린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그러자 프로펠러에 휩쓸린 눈보라가 고드윈의 얼굴을 덮쳤다.
주위의 추위를 느낀 고드윈은 방한복을 꽉 조였다.
춥네.
수십억 년의 진화와 선별을 걸친 인간은 마침내 먹이사슬의 정점에 도달했다.
편안한 요람 같은 지구는 대기권으로 인간을 보호해 줬다.
하지만...
그 보호막은 인간이 끊을 수 없는 탯줄이 되어 인간의 문명을 지구에 단단히 묶어뒀다.
극단적인 환경, 변이된 병균 그리고 쾌적한 온도가 조금이라도 변한다면, 인간의 몸은 급속도로 악화했다.
우주의 치명적인 방사능이나 저온 그리고 진공 환경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별의 바다를 갈망한다 해도 열악한 우주 환경은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거액의 비용과 자원을 들여 우주에서의 생명 보장 시스템을 최적화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우주 환경에 적응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의 생태계를 우주로 넓힌 것이었다.
이것은 탯줄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지구와 같은 거대한 저장 장치가 없고, 무한한 에너지가 없는 상황이라면, 이 탯줄은 과연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다음 "요람"을 찾을 수는 있을까?
지금의 인간에게 미래는 살아갈 수 없는 혹독한 겨울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인간은 스스로 탯줄을 끊고 자신을 바꾸려고 한다.
우주의 "겨울"을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이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긴 계약서에 서명을 한 그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인간은 이곳에서 수만 년 만에 진화의 계단을 다시 밟을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이번엔 이 계단이 어디로 향할지는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카카카...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철문이 양쪽으로 열렸고, 그 소리에 고드윈이 정신을 차렸다.
거창한 포부 앞에서 고드윈이나 그늘에 숨은 투자자들에게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겨울 계획은 공들여 기른 거대한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갈수록, 그 뿌리는 땅 밑 어둠 속으로 뻗어나갈 것이었다.
그들은 시간이라는 최종의 자원을 손에 넣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려고 할 것이다.
저 멀리 눈으로 덮인 산을 마지막으로 본 고드윈은 몸을 돌려 고요하고 깊은 통로로 들어갔다.
침묵의 보루에 초대받지 않은 두 명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여기야.
험준한 산길은 알파와 루시아의 속도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 요새은 자기 모습을 둘 앞에 드러냈다.
루시아와 알파가 성에 접근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
루시아와 알파의 이동에 따라 움직이는 감시기를 보며, 이곳은 버려진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감시기는 말 없는 관객처럼 무대 위에 있는 두 배우를 관찰했다.
알파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무거운 갑문을 봤다. 이 보루는 그녀들의 접근을 막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맞이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이 문은 내부에서만 열 수 있는 것 같아요.
갑문을 조사한 루시아는 바로 결론을 내렸다.
이런 대형 연구 시설엔 다른 탈출 통로가 마련돼 있을 겁니다. 일단 다른 곳을 찾아봐요.
그럴 필요 없어.
이 갑문의 두께는 당신 무기보다 두꺼워서 자르는 건 불가능할 텐데요?
그런 뜻이 아니야.
알파가 손가락으로 출입문 장치를 건드리자, 약간의 적색 전류가 장치에 흐르면서 갑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그러면서 고요하고 깊은 통로가 나타났다.
알파가 먼저 눈보라를 헤치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