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이 침식체의 약점인 관절 부분을 정확히 뚫었다. 지휘관의 목적은 침식체를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의 이동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네!
사냥 본능만으로 행동하고 있는 침식체를 의도적으로 한곳에 유도했다. 그리고 침식체의 느린 이동 속도 덕분에 지휘관은 안전한 곳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원거리에서 발사된 입자 빔이 침식체가 모여 있는 중심부에 떨어지자, 푸른 불꽃이 타오르면서 침식체를 삼켜버렸다.
권총에 새 탄창을 밀어 넣고 핀을 누르자, 노리쇠가 움직였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리쇠는 제자리로 돌아갔고, 다음 총알이 장전됐다.
이게 마지막 탄창이었다. 하지만 침식체는 끊임없이 쏟아졌고, 상처도 다시 벌어져서 거즈를 묵직하게 물들였다.
계속 사격하며, 대책을 생각했다.
인원수와 무장의 차이가 크면, 요령과 전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구조체와 함께 싸우고 있긴 하지만, 지휘관은 전투 중엔 보호가 필요한 대상이었다.
총기의 깨끗한 발포음과 함께 지휘관은 마지막 총알을 발사했다.
처지가 바뀐 지금 지휘관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구조체가 막강한 성능을 발휘할수록 인간의 연약한 몸뚱어리는 소대의 약점으로 변해갔다.
통신기에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리와 리브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휘관은 좀 더 버텨야만 했다.
%#... $*&진... &...
침식체의 부패한 발성 모듈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동물이 포식하기 전에 위협하는 목소리 같았다.
승격... 진화...
누구야?
알파는 겨울 요새 근처 설산에 착륙한 뒤로 누군가에게 염탐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또 그 잡음인가? 아니. 이번엔 조금 달라.
몇 번이나 정찰해도 찾을 수 없자, 알파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눈앞의 나뭇가지를 헤치자, 단번에 시야가 넓어졌다.
여기서도 저 탑을 볼 수 있는 건가?
드넓은 평지에 선 알파는 이어지는 산 뒤에 있는 푸른색 나선의 탑을 봤다.
알파의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앞머리가 바람에 날리자, 회색 눈에 나선의 탑이 비쳤다.
윽!
망가졌던 시각 모듈 속에서 강렬한 붉은색이 나타났고, 강력한 의식 충격에 알파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윽...
초월(탈락)... 수용(지배)... 개조(선별)...
청각 모듈의 잡음이 점차 여러 단어가 겹쳐서 들리기 시작했고, 왼쪽 눈에서 떨어진 순환액은 땅에 검게 그을린 흔적을 만들어 냈다.
승격... 진화...
침식체?
어느샌가 주변은 침식체로 둘러싸여 있었고, 알파는 그것들이 현실인지조차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잠식... 지배...
그것들은 죽어가는 사자를 나눠 먹으려고 맴도는 대머리 독수리 같았다.
알파의 주변에 퍼니싱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타는 듯한 통증을 가져다주었다.
반이중합 탑에 전환된 퍼니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승격자들을 찾아 진화의 양분이 되기도 했고...
승격자들을 갉아먹어 없애기도 했다.
눈에서 흘러나온 순환액은 조금씩 끈적끈적한 검은색 액체로 변해갔다. 그리고 접촉 불량의 모니터처럼 희미한 색깔을 반짝이며, 알파의 온몸을 덮기 시작했다.
그러자 온몸이 부식되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됐고, 알파의 것이 아닌 분노가 그녀의 의식을 가득 채웠다.
옷, 칼날 심지어 기체 자체까지 모든 것이 분해되고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를 담근 스틱스강처럼 고농도 퍼니싱 중합체가 알파를 완전히 감쌌다. 그리고 알파의 기체를 개조하며 그녀의 정신을 잠식해 갔다.
하지만 이번엔 알파를 인간 세계로 이끌어 줄 테티스가 없었다.
……
"사냥감"이 행동을 멈추자, 대머리 독수리들은 더 이상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삐삐삐...
바로 그때, 진흙투성이가 된 손이 침식체의 머리를 짓누른 뒤 움켜쥐었다.
진흙으로 뒤덮인 그림자가 일어서더니 손에 쥔 잔해를 내던졌다.
허...
파도처럼 몰려오는 침식체를 앞에 두고 나락으로 떨어진 그녀는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
어느 지하의 카지노 옛터에 마주 앉은 두 그림자가 보였다.
웃음을 머금고 있던 여성은 펼쳐 놓은 카드 위에 손가락을 살포시 얹었다.
본·네거트 님. 카드를 추가하실 건가요?
여성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황금시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하 카지노였다. 넓은 공간과 백만 단위의 칩이 과거의 휘황찬란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폐허가 돼 있었고, 과거에 가장 비쌌던 칩도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화려한 기계들이 산산이 조각난 곳이라 릴리스가 멀쩡한 의자를 찾는 데 한참 걸렸다.
가면을 쓴 남자는 테이블 위 카드를 그저 보기만 할 뿐, 확인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패가 좋든 나쁘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릴리스는 카드 한 장을 반대편으로 내민 다음, 카드 한 장을 자기 손에 쥐었다.
본·네거트 님. 정말로 카드를 확인하지 않으실 건가요?
미지도 내기를 즐기기 위한 일부분이다.
운에 맡기시겠다는 건가요? 아니면...
운은 그중 하나일 뿐이야.
묻고 싶은 게 이것뿐인가?
본·네거트 님한텐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겠군요.
정말 이해가 안 가서 말인데요. 공중 정원의 정화 부대가 진실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상황에서 망각자가 "우연히" 조사해 낸 인원 명단까지 얻게 된다면...
"겨울 요새"의 정확한 위치를 추측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들이 그 연구소의 위치를 알아내도 괜찮은 건가요? 쿠로노는 아직 저희와 협력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정보는 적절한 곳으로 흘러가야 제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법.
나한테 "겨울 요새" 정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이 패를 던질 적절한 시기지.
왜 하필 지금이죠?
인간은 흔히 가장 기본적인 생존 문제를 해결한 다음, 도덕적인 문제를 청산하기 시작하는데...
세계를 혁신하기 위해선 이들을 구시대의 무덤에 매장해야 하거든.
인간은 지키고자 하는 정의를 지켰고, 나도 원하는 결과를 얻었으니, 서로가 윈윈인 셈이지.
그들의 승리를 막으면, 더 큰 반항을 불러일으키게 될 거다. 이 "비제로섬 게임"에선 매번 조금씩 이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렇기 때문에... 네가 루시아를 추격하는 쿠로노 부대를 알파 측으로 유도했지만, 난 따질 생각은 없어.
릴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고, 카드가 조금 구겨졌다.
단지 알파가 저에게 신세를 졌으면 하는 생각이었고... 그 외의 상황은 몰랐어요.
어두컴컴한 불빛 속에서 침묵이 흘렀다. 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꼿꼿이 앉았지만, 맞은편의 남자는 여전히 느긋한 모습이었다.
이때, 자그마한 그림자가 문 앞에 나타났다.
릴리스. 물건 준비됐어.
하이디. 고마워. 내가 뭐 갖다 줄까?
예를 들면... 쿠로노 히사카와의 소식?
아니. 난 어머니만 있으면 돼.
출발하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러.
그녀가 잠식당하든, 승격 네트워크의 가장 예리한 칼날이 되든 아니면 긍지를 버리고 승격 네트워크의 은혜를 받았든, 우린 그녀의 상황을 확인할 의무가 있어.
본·네거트는 넘겨 보지도 않은 카드를 다시 카드 더미에 밀어 넣었다.
이건 너에 대한 마지막 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