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함정일 수 있어. 성의라는 말로 다른 의도를 포장했을 수도 있다고.
밤이 깊어지자, 발소리만 들리던 청각 모듈에 익숙한 잡음이 들려왔다.
공중 정원이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함정을 설치하지 않았을 거야.
알파는 잡음이 나타나는 타이밍을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지금은 이 잡음을 이용해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적은 공중 정원과 인간뿐만이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
돌아보는 거야? 아니면 믿는 거야?
정말로 함정이라면, 미끼를 충분히 놓아야 할 거야.
달리는 알파의 시선은 숨어 있을 만한 모든 장소를 스캔했고, 미행하거나 매복하는 이가 없는지 살폈다.
탑 근처에서 요행을 바라는 것보다 이쪽 확률이 더 높아.
하지만 그것도 확실한 건 아니잖아. 이번에 실패한다면 넌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그리고 이번 선택이 옳다고 어떻게 확신해?
뒤돌아보는 길의 대가를 봤으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어. 저울의 양쪽에 있는 의무와 권리의 무게는 같아.
머리를 흔든 알파는 예전처럼 잡음을 무시하려고 했다.
일시적으로 도망치는 건 미래를 지불하는 것과 같아. 그리고 넌 갚아야 할 때가 됐어.
착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머릿속 잡음에서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도망? 난 처음부터 대행자가 될 생각이 없었어.
비 오는 그 밤이 지나고 무거운 군복을 벗은 알파가 하고 싶었던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루나의 소원을 이뤄서, 루나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알파는 순간 멈춰 섰지만, 곧바로 잔해를 밟으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의미 없는 분노는 현재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격한 감정은 의식의 바닷속 무언가를 싹트게 할 뿐이었다.
이에 대해 알파는 침묵으로 맞섰다. 하지만 빨라진 발걸음과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않는 눈빛이 그녀의 불안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했어. 그것이 소원을 이루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지.
혈육이라는 연결고리를 잃었는데, 승격자라는 마지막 연결고리도 끊어버릴 셈이야?
몸속에 같은 피가 흐르지 않다고 해도 우린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어.
차가운 달빛은 발밑의 길을 밝게 비추지 못했다. 하지만 38만 킬로미터 떨어진 위성에서 나오는 굴절된 빛은 알파 주위에 어둠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난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승격 네트워크는 루나를 선택했고, 나도 루나를 선택했어.
청각 모듈 속 잡음은 구식 자동 응답기를 귓가에 들이댄 것처럼 한순간 침묵했다.
이윽고 전류 소리는 간결한 말을 천천히 만들어냈다.
승격 네트워크가 루나를 찾은 게 아니라 루나가 승격 네트워크를 찾은 거야.
수개월 전, 도시 유적 아래.
죽일 거야.
꼼짝달싹 못 하는 몸 위에 날개의 잔해가 있었고, 날카로운 발톱도 가지런히 잘려 있었다.
일어나서 눈앞에 있는 사냥감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관절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려고 하는 말은 파열된 가슴에서 새어 나오면서 낡은 송풍기 같은 소리를 냈다.
알파는 순환액을 털어낸 태도를 칼집에 넣지 않았다.
등 뒤에서 미친 듯이 외치는 소리를 무시한 채, 그저 말없이 한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이상한 의자에 앉아 있는 보라색 머리의 구조체가 알파 앞에 나타났다.
왜 그냥 떠나지 않았어? 날 보면 기분이 별로일 텐데?
루시아...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알파의 의식의 바다에 작은 파동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건 낙엽이 떨어진 수면처럼 이내 잠잠해졌다.
여긴 뭐 하러 왔지?
난 그냥 내 동료를 데려가고 싶을 뿐이야.
대답을 듣고 납득한 알파는 칼을 거두고 기지 밖으로 걸어 나갔다.
혹사. 저 여자를 막아!
죽일 거야. 저 여자를 죽일 거야. 저 여자는 나와 같은 운명을 맞이해야 해. 콜록... 아니. 나보다 더 비참해야 해.
우리 둘만으론 그녀를 막을 수 없어.
그리고 그분께서 내린 명령은 이렇지 않았어.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아니면 더 괴로울 테니까.
종이학. 부두를 데려가.
혹사 밑에 있던 의자가 그의 말을 듣고 뱀 모양으로 변한 뒤, 부두를 살며시 감았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날 내려놔! 저 여자 도망가잖아... 콜록...
혹사는 기지 입구까지 걸어간 알파를 바라보며 물었다.
날 죽일 생각은 없는 거야?
난 의미 없는 일은 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릴 수 있잖아.
야. 혹사!
걱정하지 마. 내가 죽어도 종이학이 널 돌려보낼 거야.
널 완전히 죽일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했겠지.
그때, 네가 없었더라도 그들은 갖은 방법으로 다른 승격자에게 연락했을 거야.
시간문제일 뿐, 언젠간 일어났을 비극이야.
그리고 지금의 난 공중 정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과거의 그늘에 갇혀 있기보단 더 중요한 일을 끝마쳐야 해.
그래. 그분께선 다른 생각이 있을 테지만, 난 네 소원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
혹사의 말에 응답하지 않은 알파는 유적의 출구로 곧바로 나갔다.
다음에 꼭 죽일 거다! 더 강한 발톱으로 찢고, 더 날렵한 날개로 날려버리겠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도 다치는 건 너일 테니까.
그 여자의 다리를 입에 쑤셔 넣을 거야! 눈알을 파내고 순환액으로 채우고 말 거라고!
부두는 외부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지 미친 소리를 해댔고, 가슴의 순환액이 종이학의 꼬리를 타고 땅에 떨어지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로키든 부두든 최선을 다해 구해줄 테니까.
통신 내용을 모두 들은 알파는 전속력으로 그 유적을 향해 달려갔다.
롤랑과 부두가 도착하기 전에 비행선을 타고 달로 가 루나를 찾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먼저 출발했던 부두와 롤랑이 비행선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부두와 대치하는 동안 승격자인 알파는 네 번째 인물이 서둘러 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본·네거트가 이런 수를 쓴 이상, 알파도 그곳에서 이 "눈"들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롤랑과 함께 승선하면 수많은 가능성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루나를 구하는 데 불리해질 게 뻔했다.
루나가 어떻게 변하든 알파는 절대로 루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파 자신도 본·네거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 또한 그 대행자가 막으려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번 구조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알파는 하고 싶었던 말을 롤랑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했다.
내 말이 루나에게 전해졌을까? 루나는 어떻게 됐지? 그 후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황야 속에서 혼자 걷고 있는 백발의 승격자는 모든 희망을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를 들은 듯한 알파는 고개를 들어 새벽녘이 다가오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거무스름한 막을 찢듯 하늘을 가로지른 유성이 천천히 땅으로 추락했다.
루나...
대지와 하늘은 6,400km 거리를 두고 있으며, 유성의 불꽃이 하늘의 끝에서 사라졌다.
서로 다른 피를 흘리고 있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굴레는 여전히 그녀들을 단단히 연결하고 있었다.
잠깐 멈칫했던 알파는 곧바로 한곳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알파가 도착했을 때, 태양이 대지에 첫 줄기의 빛을 비추고 있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제멋대로 자란 나무는 오래된 집보다 높이 자라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틈 사이로 비추는 햇빛들이 은백색 소녀의 주변에 드리웠다.
알파는 앞에 있는 썩은 나무 울타리를 봤다.
이곳을 떠나기 전, 그녀의 키는 울타리의 절반 높이에도 미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뒤돌아보자, 자신에게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이대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싶기도 했고, 상대방에게 달려가 포옹해 주고 싶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언니. 나 다녀왔어.
응.
알파는 몇 년 전처럼 석판을 밟으며 루나에게 다가갔다.
이곳에 자라난 잡초를 제외하곤, 마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