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특수 기능을 탑재하지 않은 구조체가 어떻게 날(우릴) 여기까지 몰아붙일 수 있지!
격렬한 전투 끝에 "에코" 뒤에 떠 있던 기사 조각상의 빛이 마침내 어두워지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가식적인 가면이 아이라의 광날에 베어 부서지자, 익숙한 레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 하...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녀의 얼굴을 적시며, 몸에 묻은 순환액을 씻어냈다.
만화의 아머가 여러 곳 파손됐고, 건랜스에 있는 에너지도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의식의 바다 편차 때문에 자신이 기절하는 걸 방지하고자, 아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양쪽 모두 힘이 빠진 상태였지만, 기사의 부상이 "에코"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컸다. 게다가 "에코"의 화살도 다 떨어져서 아이라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면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네.
약속대로... 나와 함께 돌아가자. 레나!
너와 그런 약속한 적 없어...?
우리 지휘관이랑... 그러니까 시카랑 약속했잖아?
당신은 대원으로서 시카가 유능한 지휘관이 되는 걸 지켜보겠다고 했잖아!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난 중도에 포기하고 약속을 깨는 게 제일 싫어!
……
난(우린)... 너희와 동료도, 친구도 아니야. 그냥 알고 지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는 사이일 뿐이야.
날 데려가도 의미 없어. 사태가 이 지경인데 아이리스 월블러 소대가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 시카, 나 그리고 트로이도... 우린 도구이자 장기 말일뿐이었어. 윗사람들이 자신의 더러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었다고.
가치가 있으면 이용하고 없으면 버리고, 자신의 목적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파괴하는... 집행 부대는... 그런 존재야.
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지금도 미래도!
윽...
"에코"는 자기 이마를 감쌌다. 기사 조각상과의 연결 및 전투로 인해 그녀의 정신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난 어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야.
난 그냥 아이리스 월블러의 대원을 데려가고 싶었을 뿐이야. 이 사건의 배후에 어떤 의미가 있든 상관없어.
난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모든 게 끝나고 나서 왜 그때 행동하지 않았냐고 한탄하거나 또다시 잡아야 할 것을 놓쳤다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난 원체 자기중심적이라서 그래!
우리의 인생은 원래 후회로 가득 차 있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얻은 "힘"으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하고 싶어!
아이라의 핑크빛 눈동자엔 각오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광날은 아이라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마지막 섬광을 뿜어냈다.
레나와 기사 조각상의 연결을 끊는다면...!
아이라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손에 들고 있던 건랜스를 던졌다. 칼날은 추진기의 비행운과 함께 기사 조각상을 향해 날아갔다.
안... 돼...
▅▃▆▅▂▄▁▅▇!!
소녀의 애원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잠들어 있던 기사가 갇힌 야수와 같은 포효를 내뱉었다. 그리고 "에코"를 품에 안은 채, 광날이 자기 갑옷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놔뒀다.
그 뒤, 그것은 의식을 잃어가는 소녀를 안고 고탑 위에서 뛰어내렸다.
……!?
기사 조각상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아이라는 즉시 상황을 확인하려 했지만, 의식의 바다에서 자신을 지탱하던 심지가 끝에 다다랐다.
안 돼... 아직...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듯, 그 격려마저 마력을 잃고 말았다.
현실의 차가움이 아이라의 시야를 침범하고 의식을 얼리기 시작했다.
아이라는 다시 미궁 앞에 섰다.
……
여긴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고, 오롯이 아이라 자신뿐이었다.
왜 또 그런 얼굴이야. 이번엔 또 어떤 문제지?
이젤 앞에 팔레트를 든 소녀가 서 있었다. 익숙한 발소리를 들은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늘 하던 질문을 했다.
고고학 임무에 실패했어? 새로운 작품이 인기가 없어? 아니면 널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한 거야?
실현하고 싶었던 꿈은 아직도 희미하고, 지금까지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된 거야?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런 건 어디서 알게 된 거야?
하하. 네가 불평할 때마다 몇 가지 내용을 바꿔가며 말했었잖아. 아주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야.
미안해.
뭐, 이곳은 원래 그런 걸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왜 출구가 없는 미로에 자신을 가두는 건데?
출구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디로 가도 막다른 길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누구도 실패를 가지고 자신을 문책하지 않으니까.
누가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노력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는 건 비장하고 숙명적으로 보이지.
하지만 어떤 각도로 보면 "가장 쉬운" 길이기도 해.
……
네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겠지.
이 미로에 출구가 없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인간은 왜 출구가 없는 미로에서 탈출할 수 없는 걸까?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는 자신들의 날개를 만들어 냈어. 그전까지는 아무도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어.
그러니 미래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해?
그럼,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응. 당연하지.
아이라는 소녀와 작별하고 혼자서 라비린토스로 들어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순간, 자신을 침식했던 차가움이 따뜻한 손에 의해 씻겨버렸다.
의식의 바다와 어떤 마인드 표식이 연결됐다. 하지만 그건 시카가 아닌 좀 더 독특하고 익숙하지만 낯설기도 한...
[player name]... 지휘관?
괜찮아. 난 별일 없어.
아이라는 지휘관의 부축을 받으며, 필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기체의 각 파라미터 경보로 또다시 지휘관의 품에 쓰러졌다.
방금 했던 말은 취소할게... 조금만 더 쉬게 해줘.
그래... 내가 얼마 동안 의식을 잃었지? 30분? 아니면 한 시간?
아이라는 귓가에 울리던 빗소리가 멈춘 걸 알아차렸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싸웠던 전투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참, 그녀는... 그녀는 아직 거기 있어?
……
아... 아무것도 아니야.
마녀의 마법은 효력을 잃었다. 낙담한 신데렐라의 화려한 드레스는 사라지고 다시 재투성이로 돌아갔다.
환상 속의 모험은 엔딩으로 향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 내가 또 실패했어.
단 한 번이라도 만화 속 주인공처럼, 내 힘으로 결말을 바꿨으면 좋겠어.
알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해피엔딩을 고집하는 창작자일수록, 해피엔딩이 드물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거든.
왕자님의 키스로 공주님이 부활하거나 주인공의 부름에 절친을 돌아오는 것 그리고 원수끼리 마지막에 서로의 오해를 푸는 것...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창작에서 그 아쉬움을 채우고 싶어.
하지만 난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싶었어. 이야기의 창작자뿐만 아니라, 늘 시원치 않은 현실과 항쟁하려고 했어.
이미 그걸 봤으니까...
아이라는 눈앞의 그림자에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그렸는데, 뭔가... 분해.
……
고마워. [player name].
아이라는 출발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휘관을 꼭 껴안았다.
소녀는 세계를 향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깨끗한 캔버스를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세계는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는 그림 도구를 가지고 희망 없는 수색을 시작했다.
소녀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다.
소녀는 그 캔버스를 찾지는 못했지만, 소녀의 발자취는 세계에 남겨졌다.
소녀는 때론 실망했고, 때론 흥분했으며, 때론 슬퍼했고, 때론 기뻐했다.
이런 여정은 계속될 거였다. 소녀가 이를 깨닫고 다음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였다.
무심코 뒤돌아본 것뿐이었다.
……
어떤 색깔도 남지 않을 것 같았던 하늘에 기적처럼 무지개가 나타났다.
완벽하지 않은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다음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그저 별하늘 아래에 있는 무지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저 그 달 무지개를 자기 눈동자에 채울 뿐이었다.
그냥 그곳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캔버스 속의 풍경이 됐다.
——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구름 한 점 없이
—— 별 총총한 밤하늘처럼.
—— 어둠과 빛의 그중 나은 것들이
—— 그녀 얼굴 그녀 눈에서 만나
—— 부드러운 빛으로 무르익어요.
—— 난한 낮에는 보이지 않는
……
기사 조각상은 의식을 잃은 소녀를 안고 거리의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다.
빗물은 상처투성이의 몸에서 흘러내렸고, 마스크 밑 어두운 빛은 금방 꺼질 것만 같았다.
이때, 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기사 조각상 앞에 나타났다.
또 만났네. "꼭두각시".
상황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내가... 좀 도와줄까?
너희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 사악하고 왜곡된 "희망"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