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라가 겹겹이 가로막힌 장애물을 뚫고 폭발의 진원지에 도착했을 때의 현장은 예상했던 것만큼 격렬하진 않았다.
오히려 주변이 밀폐된 묘지에 침입한 것처럼 몹시 조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살려...
한 구조체가 너덜너덜한 몸뚱이를 이끌고 로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두 동강 난 1인용 대전차 발사기가 들려 있었다. 허리와 뱃속 깊숙이 파고든 상처에서 나오는 짙은 색 순환액이 땅에 흘러서 구조체 뒤에 민달팽이가 기어 온 듯한 자국을 만들어 냈다.
아이라가 앞으로 가기도 전에 그의 두 발은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면서 몸도 바닥에 쓰러졌다.
이건... 쿠로노의...?
아이라는 구조체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 구조체는 이미 힘이 빠져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
아이라는 반쯤 닫혀 있던 로비의 문을 열고 나서야 내부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웠던 내부의 인테리어는 순환액이 튀어서 지옥의 풍경이 돼 있었고, 바닥엔 수십 명의 낯선 구조체의 시체가 있었다. 파열된 아머와 찢어진 부위들은 이 전시관의 새로운 "장식"이 돼버렸다.
아이라...!?
심하게 다친 트로이 옆에 반쯤 무릎 꿇고 있는 시카가 고갤 돌려 아이라를 바라봤다.
잘 왔어요. 아이라. 어서 방해만 되는 지휘관님을 데리고 떠나세요.
안 돼요. 트로이의 상처는...
레나가 평소에 한 말을... 어디로 들은 거예요... 조금 있으면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도착할 테니, 그들과 합류한 다음 다시 대책을 의논해서...
……
하지만 아이라는 트로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이라는 그 빛에 이끌린 듯 이 모든 것의 장본인인 로비 중앙에 서 있는 두 그림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레나라는 구조체의 얼굴엔 검은 가면이 박혀 있었고, 뒤에 서 있는 기사 조각상은 숙주에게 달라붙은 악령 같았다.
레... 나...?
……
보라색 머리의 구조체 앞면은 가면에 숨겨져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기사 조각상의 희미한 빛이 불규칙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공중 정원의 준비는 정말 철저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화 부대는 도시의 주요 도로에 차단선을 설치했어. 이용할 수 없다면 소멸시킨다... 한결같은 수단이군.
정화 부대?
예상외의 일이 너무 많은 탓에 아이라는 아직도 눈앞의 광경을 소화하고 있는 단계였다.
전멸한 쿠로노의 구조체 부대, 중상을 입은 트로이, 갑자기 튀어나온 기사 조각상과 다른 이가 된 듯한 레나.
아이라는 이번 임무의 뒤에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전모는 엿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라가 알고 있는 그 "레나"는 조금씩 아이라가 모르는 낯선 "존재"가 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뒤에 있는 게 그 실험체인 거야!?
실험체...? 아니, 난(우린) 자신만의 이름이 있어.
난(우린) 과거에 묻힌 망령, 욕망과 죄악에 의해 만들어진 "에코"다.
이게 마지막 경고다.
로비 주변의 장치들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고, 로봇 조각상들이 꼭두각시처럼 아이라와 레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로봇 조각상들의 눈엔 기사 조각상과 같은 보라색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건 기사 조각상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날(우릴) 귀찮게 하지 마라. 공중 정원.
말을 마친 "에코"라는 구조체는 뒤돌아 예술관의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농담을...!?
에코를 따라잡으려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자, 그 조각상들이 아이라를 향해 일제히 공격해 왔다.
윽...
하카마와 스프너는 오는 과정에서 아이라와 헤어졌다. 그리고 아이라는 방금 전 달 표면 전시관 전투에서 많은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에, 트로이와 시카를 지키면서 로봇들을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에코와 기사 조각상이 완전히 시야의 경계에서 사라졌고, 이를 악문 아이라는 손에 있는 건랜스를 휘두르며 트로이와 시카의 전방을 지켰다.
어쩔 수 없겠어. 시카. 트로이. 일단 안전한 구역으로 철수해.
내가 레나를 따라가...
아이라! 그건 허락할 수 없어요!
트로이의 부상이 심각해요. 그러니 트로이를 치료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우선이에요!
지휘관으로서 아이리스 월블러 소대의 임무는 중지할게요! 아이라도 우리와 함께 이 도시에서 철수해야 해요!
……
피로 빨갛게 물든 시카의 눈동자엔 타협은 없다는 눈빛이었다. 시카는 자신이 아이라의 요구를 들어줄까 두려워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몸이 그녀가 자신의 나약함을 애써 누르고 있다는 걸 설명했다.
시카가 레나를 따라잡고 싶은 마음은 아이라 못지않게 크겠지만, 어떤 일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지휘관인 시카는 필요한 순간에 모든 충동과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을 버리고, "소대"에 가장 유리한 판단을 해야 했다.
계속 꿈속에서 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뒤를 조심해요...! 더 많은 로봇이 오고 있어요!
이 조각상들은 자동으로 리셋되는 NPC인가? 도대체 몇 마리가 숨어 있는 거지!?
입구에서 몰려드는 보라색 눈동자의 조각상들이 그녀들의 퇴로를 막았다. 시카는 트로이를 부축하며 사격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트로이의 전투력을 잃은 지금, 이 포위망을 돌파하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결국 이렇게 됐네요. 친애하는 대원들, 아직 숨겨 놓은 필살기가 있나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아이라가 에너지탄으로 눈앞에 있는 조각상을 날려버렸지만, 곧 새로운 조각상이 다시 나타났다. 게다가 부상자가 있는 상황이라 앞으로 나가기 더욱 힘들었다.
그럼, 절 버리세요. 아이라의 무기엔 단거리 추진 기능이 있어서 틈만 만들 수 있다면, 시카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안 돼! 지휘관이 방금 말했잖아, 우린 널 데리고 돌아가서 치료받을 거라고.
이건 당신이 수송기에서 말했던 전개 아닌가요!?
그때는 내가 말을 너무 함부로 했어. 어쨌든 우리 이야기를 그렇게 진행하게 둘 순 없어!
결말이 나지 않는 한, 모든 게 미지수라고!
이야기를 고쳐 쓸 힘이 없어도 끝까지 저항하는 게 내 스타일이야!
끝없는 어둠을 찢는 한줄기의 섬광처럼 양 갈래 머리를 한 구조체가 서리를 뿜어내는 암적색 태도를 들고, 어두운 로비 안에서 선명한 궤적을 그렸다.
그녀의 옷자락은 등에 있는 분사기의 기류로 흩날렸고, 조각상 무리에 차가운 칼 빛이 번쩍였다. 적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칼날이 멀리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베면서 다가왔다.
철벽같았던 포위망은 몇 초도 안 되는 사이에 거대한 틈이 생겼다. 적색 눈 같은 태도가 질주 끝에 두 번 회전하더니 주인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칼을 든 소녀 구조체가 걸음을 멈추고 시카 일행 앞에 섰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아이라에게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저희가 늦었죠.
루시아! 그리고 [player name]!
나이스 타이밍...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시겠죠?
[player name] 선배님! 그리고...
새하얀 인형이 날카로운 칼날을 찌르며, 가벼운 몸짓으로 로비에서 춤을 췄다. 그녀의 공격은 정확히 조각상의 핵심을 명중했고, 깔끔하게 남은 로봇들의 행동 능력을 뺏어버렸다.
주인님, 주위의 모든 적대 반응을 소멸했습니다.
저 품위 없는 신인에게 바깥 방어선을 지키라고 말해. 죽지 않는 한 계속 그곳에 있으라고도 말하고.
밤비나타가 주인님의 명령을 전달할게요.
공손하게 그녀의 지휘관 뒤에 서 있는 여자아이 모양의 구조체는 단말기로 명령을 전송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옆엔 또 다른 젊은 지휘관이 있었다.
뭐지? 내가 구하러 온 걸 열렬한 환호로 환영해야 하는 거 아냐? 전교 1등?
정, 정말 감사해요.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백로 소대의...
아니. 됐어. 너무 진지하게 나오니까 기분 나빠.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오는 길에 전시관에서 옛날에 싸웠던 적이 나타났어요. 로봇 모조품이긴 했는데, 그래도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거든요.
그들이 없었다면 1시간은 더 일찍 올 수 있었을 거예요.
잠깐만요. 그 적들을 1시간 만에 모두 해결했다는 건가요?
네. 예전에 상대했던 적들이라...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그때와 많이 다르니까요.
역시 내가 알던 그레이 레이븐 소대다워.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마. 전교 1등. 어서 상황을 보고해.
네! 지금 상황은...
네 대원과 그 실험체가 합체했다는 거야? 뭐가 뭔지...
어쨌든 우리가 받은 명령은 실험체 회수니, 목표를 포기할 수는 없어.
정화 부대가 이 도시에 쳐들어오기 시작했어. 네 대원의 행동은 정화 부대가 실험체와 함께 그녀를 폐기할 만큼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어.
쿠로노의 행동은 공적으론 권한을 받지 않았지만, 그 실험체를 의회에 가져갈 수 없다면 그들이 우릴 물어뜯을지도 몰라.
그래. 상황이 이렇게 된 만큼, 화려한 대반격이 없으면 안 돼!
저도 레나를 데려오고 싶지만, 트로이를 그냥 두고 갈 순 없어요.
바네사 선배님, 혹시 백로 소대가 트로이를 안전한 곳으로 호송해 줄 수 있을까요?
왜? 네가 소대의 골칫거리를 돌보고, 나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함께 그 실험체를 찾으면 되잖아?
흠... 2 대 1이군. 내가 전투 총지휘자가 아니란 게 아쉽네. 좋아. 너희들이 이겼다고 치자. 난 이의 없어.
트로이 쪽으로 걸어간 바네사는 밤비나타에게 복원 세트로 트로이를 응급 처리해 주라고 지시했다.
이름이... 트로이? 어떤 구조체가 며칠 전 공중 정원에서 내 입이 험하다고 했었는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의견이니 당연히 잘 수행해야겠지. 전교 1등. 임무가 끝나면 이 구조체를 "그대로" 돌려준다고 약속할게.
고마워요. 바네사 선배님. 선배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게요!
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걸 또 믿고...
바네사와 철수 경로 및 예비 방안을 확인한 후, 그레이 레이븐과 아이리스 월블러는 에코가 떠난 방향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루시아와 [player name]하고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날이 오다니, 성공한 팬이 된 느낌이야!
아이라가 집행 부대에 들어간다고 결정한 소식에 저도 의외였어요. 그 결심이 존경스럽네요.
시카는 앞서 쿠로노와의 충돌에서 레나를 지키려다가 부상을 입었지만, 지휘관으로서 아이라와 함께 행동하길 원했다.
괜찮아요. 이마를 스쳐 간 것뿐이에요. 출혈은 멈췄어요.
아이라한테서... 소대 대원들한테서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지금의 전 저만의 페이스로 나아가고 있어요.
이사루스 임시 대장님. 봉쇄선 1, 2, 4, 7은 배치 완료했고, 나머지 봉쇄선의 진행도는 80%를 넘었어요.
……
신중히 사냥감을 기다리는 사자처럼 선두에 있는 구조체가 말없이 통로의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할게. 내가 할게. 이사루스는 이런 거에 서툴러.
이사루스 옆에 있던 베테랑 대원이 이사루스 대신 단말기를 받아 들고, 이번 긴급 임무를 맡은 행동 팀에 명령을 내렸다.
각 팀은 봉쇄선 배치를 서둘러야 한다. 우리의 임무 시간은 한정적인 데다가 이번 정화 대상은 극히 위험하기 때문에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선행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이번 대상은 로봇을 조종하는 능력을 갖췄다. 그러니 주위에서 로봇 반응이 나타나면 고정식 무기를 사용해 처치해.
A팀이 먼저 핵심 건물에 들어가 정화 대상을 수색한다. B팀과 C팀은 A팀의 명령을 기다렸다가 행동한다. 지금은 봉쇄선에서 명령을 대기한다. 이상.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나 혼자면 충분해.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함께 행동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임시 대장님이 강한 건 저도 알지만, 이번 임무는 이전과 달라요. 소식통이 좋은 형제가 조사 좀 했는데, 이번에 망치면 우리도 큰일 날 거 같아요.
난 그런 거에 관심 없고, 상대가 강하기만 하면 돼.
하아... 임시 대장님이 주요 담당자이시니, 책임질 일이 있다면 임시 대장님이 책임 지시는 거니까 편하게 하세요.
30미터 범위로 후퇴하고 후방을 주시해.
? 왜요?
앞에 있는 적은 내가 상대한다.
이사루스는 손을 흔든 후, 소대를 떠나 앞으로 갔다.
통로의 끝에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중 한 명의 외형으로 판단했을 때, 두 명 모두 로봇이었다.
(공중 정원의 정화 부대입니다. 전투력 평가를 진행합니다. 선두 구조체는 상대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세르반테스는 이런 골칫덩어리들을 우리에게 맡기다니, 알면 알수록 인상 점수를 깎아 먹는군요.)
(정화 부대의 봉쇄선이 완성된다면, 이 도시의 각성 로봇도 위험해질 겁니다. 그럼, 세르반테스 님도 그들을 데리고 안전하게 철수할 수는 없을 겁니다.)
(세르반테스가 말한 대안에 우리까지 포함돼 있을 줄은 몰랐네요. 설마 교회에서 누군가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요?)
(한 가지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 내부용 대형 정보 교환기로 사용되는 "잿빛 탑"의 주요 디자이너는 세르반테스 님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잿빛 탑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놈들을 이곳에 붙잡아 두면 된다는 거죠?)
(이 도시 안에는 공중 정원의 집행 부대가 아직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집행 부대가 실험체를 찾게 되면, 정화 부대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집니다.)
(우린 집행 부대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제 생각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선두의 인간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것도 아이라를 돕는 겁니다.)
(흥... 두 명의 "친구"가 아이라를 위해 이런 고생을 했다는 걸 아이라가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내부 통신기로 교류를 마친 하카마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낫을 들고 이사루스의 앞길을 막았다.
너희들... 강해 보이네.
이곳의 다른 로봇과는 달라 보여.
……
가능한... 오래 버텨줬으면 좋겠어!
도발하는 듯한 미소를 지은 이사루스가 허리춤의 무기를 꺼낸 뒤, 하카마와 스프너가 있는 곳을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