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새로운 이합 생물과 침식체가 사방에서 튀어나오지 않았고, 구조체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
아이라는 반쯤 무릎을 꿇고, 눈앞에 있는 색 바랜 구조체를 바라봤다. 우주 무기의 하얀 빛이 모든 것을 삼키려는 순간, 아이라는 그 구조체의 손을 잡으려 했다.
주변은 고요해졌고, 투영 속의 구조체는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무채색의 창백한 원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빠져들지 마요. 이것들은 모두 과거의 투영일 뿐이에요.
여기에선 뭘 한다고 해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어.
아이라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손을 뻗어 정지된 손을 잡았다.
아이라는 구조체의 손바닥 안에서 데이터 칩을 찾았다.
또 다른 기억 데이터인가 보네요.
시카는 아이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있던 트로이는 무기로 몸을 지탱하며 아이라에게 "읽어 보세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럼, 이번에도 내가 해볼게!
아이라는 익숙한 듯 칩을 기체의 데이터 인터페이스에 꽂았다.
>>>확인. 기계 교회 시간...<<<
>>>모듈이 손상되어 다시 교정 중입니다.<<<
>>>기억 데이터가 저장되지 않았습니다.<<<
>>>인격 시뮬레이션이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범위 내의 생체 반응 수가 1로 확인됩니다.<<<
2시간 16분 23초 전, 밤하늘을 가르는 하얀 빛과 함께 우주 무기의 공격이 이 숲에 내려왔다.
공중 정원의 병사들은 공격으로 생긴 깊은 구덩이에서 철수했고, 수많은 대가를 치르고 모체 샘플을 채취한 소대를 숲 밖으로 호송했다.
여과탑이 있던 자리는 검게 그을린 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그는 부러진 무기를 지나 쓰러진 잔해를 일으켜 세웠다. 성분을 알 수 없는 액체가 포탄 구멍 속에서 작은 웅덩이를 이뤘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이 일었다.
무언가가 일어서려는 그를 붙잡았다. 내려다보니 전사의 시신과 검게 그을린 나무 아래에 묻혀 있던 포탄 구멍에서 손 하나가 뻗어 나와 그의 옷자락을 잡은 것이었다.
……
파손된 발성기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더니 구조체의 머리가 아래로 처지자, 소리가 없어졌다.
>>>범위 내의 생체 반응 수가 0으로 확인됩니다.<<<
이 메마르고, 다 타서 없어진 땅엔 더 이상 어떠한 생명의 흔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구조체의 옷깃에서 명패 하나가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달빛을 빌어 이 구조체의 이름을 읽었다.
"조이스".
거대한 구덩이를 건너는 과정에서 세르반테스는 희생된 모든 전사들의 이름을 기록했고 그들의 기억 데이터를 저장했다.
대부분 데이터가 이미 손상된 상태였다. 빈 탄창과 부러진 칼날이 전사들의 신념을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을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품고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다.
……
세르반테스는 거대한 구덩이의 가장자리 쪽, 폭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숲속에서 누군가 급하게 도망치다가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는 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바닥에는 가방에서 떨어진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생존을 위한 식료품 도구와 의료용품이었다. 도로변에 쓰러진 수많은 스캐빈저의 시체에서 이와 비슷한 걸 많이 봤었다.
이건...
세르반테스는 부스러진 건빵 옆에 떨어진 네모난 카드를 주웠다. 누렇게 변한 신원 정보 카드의 식별 번호는 스캔할 수 없었고, 사진과 뒷면에 있는 마크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생명 과학 유한 회사?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가방은 주인이 이곳에서 습격당했고, 다친 몸을 이끌고 숲 밖으로 이동하려 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풀밭 사이의 핏자국을 따라 한참 걸어간 세르반테스는 피로 얼룩진 손바닥만 한 주머니를 발견했다.
주머니의 가장자리가 마모된 걸 보면, 한때는 더없이 소중하게 잘 보관됐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물품을 확인. 해당 물품은 식물의 씨앗이며, 진정쌍떡잎식물군 수국과 식물인 수국입니다. 황금시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관상용 식물입니다.<<<
>>>데이터베이스가 오프라인 상태로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검색 키워드는 식물입니다.<<<
>>>기억 모듈을 판독했습니다. 기록 재생을 시작합니다.<<<
선생님의 명령대로 가급적 키우기 쉽고 실내 재배에 적합한 꽃으로 골랐어요. 대부분은 그 기관에서 아직은 정식으로 판매하지 않는 개량 품종이에요.
기관? 아, 지난번에 내가 없을 때 찾아왔던...
네. 그들이 선생님과 협력하길 원했어요. 컨스텔레이션의 녹화 사업을 맡겨주시면 안 되겠냐고 했어요.
생각해 보지.
이러면 된 건가?
일어서서 손에 있는 흙을 탁탁 턴 미켈레가 눈앞의 작은 꽃밭을 바라보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선생님이 절묘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자주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네.
물을 주는 빈도나 일조 환경 조정 그리고 비료를 주는 방식에 대해선 이곳에 메모해 뒀어요. 아니면 언제든 저한테 물어보셔도 되고요.
그리고 꽃씨와 구근의 종류는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각각...
쉿, 무슨 품종인지는 말하지 마.
꽃이 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그전까지 모르는 게 더 재밌지 않겠어?
네. 알겠어요.
미켈레는 조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꽃밭 앞에 있는 또 다른 안락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
봐. 꽃들이 발코니를 가득 채울 때면 컨스텔레이션의 꼭대기에 있는 풍차도 돌기 시작할 거야.
그때가 오면, 저 도시의 탄생에 꽃을 보내자.
관상용 식물의 씨앗은 지금의 인간 생존에 아무런 쓸모가 없어.
왜 이렇게 소중히 간직한 걸까?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오는 길에 수집한 흔적으로부터 시뮬레이션 연산했을 때, 여과탑의 방향에서 도망친 인간 두 명은 이곳에 도착한 것이 한계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0에 가까웠다.
세르반테스는 씨앗 봉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으려 했지만, 결국 그 신원 정보 카드와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행동은 그의 예정된 행동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확인. 기계 교회 시간...<<<
>>>237번째 시뮬레이션 연산을 실행해 결론을 생성하고 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예배당에서 가장 먼 첨탑 위에 서서 모든 걸 내려다봤다.
몇 번을 연산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최전선에서 혈전을 벌이던 구조체들은 하나둘씩 퍼니싱의 침식으로 지성이 없는 침식체로 변해갔다. 아무리 강인한 전사라도 재앙의 파도 속에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이 세계가 비극과 절망이 끝없이 반복되는 파국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새벽녘이 먹구름을 뚫고 들어오자, 순백의 소녀가 불길을 항해 날갯짓하며 날아다니는 것을 봤다. 그러자 빛 아래 저승의 강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전사들이 모두 소환되고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침식에서 깨어난 전사들이 주저 없이 그들의 동료를 향해 돌진하는 것, 푸른 서리와 총알이 그녀를 위해 철벽을 쌓는 것과 인간형 생물체가 순백의 불길 속에서 패배하는 것을 봤다.
세르반테스는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아직 낫지 않은 몸으로 외골격의 도움을 받아 전력을 다해 달려갔는지와 추락하는 흰 새를 어떻게 받았고 그녀 몸에 있는 항쇄를 풀었는지를 봤다.
그들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얼마나 많은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또 연산과 다른 결과가 나왔어.)
왜지?
(왜... 너희들은 이런 걸 할 수 있는 거지?)
오면서 본 것들은 세르반테스의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영야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는 눈부신 소녀의 모습에 세르반테스는 선생님께서 "등대"를 말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바라셨던 건가요?)
세르반테스에게 들려오는 건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확인. 기계 교회 시간...<<<
>>>목표 좌표 확인 완료. 얼굴 매칭에 진입합니다. 신원 확인이 완료됐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연산에서 절대 살아남지 못할 인간이 살아남아서, 재건된 보육 구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는 재난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어떻게 되는지 관찰하려고 했을 뿐인데 뜻밖의 결과를 얻게 됐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현실의 궤적은 다시 한번 세르반테스의 연산을 빗나갔다.
그리고 이건 세르반테스의 질문이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부탁할게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물건이 전달되어야 하는 장소에 배송하는 것이 제 업무입니다.
이건...
아... 아...
인간은 꽃씨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움켜쥐더니, 천천히 무릎 꿇고 앉았다.
벽 뒤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흐느낌이었는데, 후에 걷잡을 수 없는 통곡으로 변했다.
세르반테스는 왠지 그의 눈물이 절망 때문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걸 분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세르반테스는 더욱 곤혹스러웠다.
……
저 사람은 왜 꽃씨 주머니에 저런 반응을 보일까?
물어봤는데, 보육 구역 안에는 이 씨앗이 어디서 보내져 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불쑥 튀어나온 게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
아, 내 말은 기적 같다는 거야.
그런데 진짜 깜짝 놀랐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물어봐서... 그런 모습은 오랜만이네.
이걸 찾는 날이 올 줄은 몰랐거든. 나한텐 정말 소중한 물건이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울던 남자는 마음을 가라앉힌 듯했다. 여전히 씨앗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있던 그는 고개를 들어 절뚝거리는 자기 동료가 옆에 앉는 걸 지켜봤다.
어휴, 나도 알아.
몇 년이 지났어도 딸이 살아 있다고 믿는 거지?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래. 나도 끝까지 도울게.
그러고 보니 저쪽에 있던 사람이 꽃을 심을 수 있는 작은 텃밭을 남겨주겠다던데?
잠깐 의논했더니 바로 허락해 주더라고. 여기 사람들은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아.
……
손이 불편해서 그런데, 나중에 삽 좀 갖다 줄래?
이렇게 됐는데도 꽃을 심으려 하다니, 참 이해가 안 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보급품을 더 많이 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넌...
"수염"은 고개를 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한 페이지 넘겼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씨앗을 심으면 싹 트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거야.
내 딸이 정말로 살아있다면, 내가 심은 꽃을 보기만 해도 내가 찾고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하긴, 넌 항상 이랬지. 나도 너한테 옮은 것 같아.
조금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손에 들고 있는 그건 뭐야?
만화야. 우리 때는 많았잖아. 수십 년 가까이 못 봤다가, 설마 보육 구역에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공중 정원에서 내려온 구조체가 가지고 온 것 같은데, 원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남은 찌개랑 바꿨어.
그래도 이야기는 재밌어. 자크가 이런 걸 좋아할까?
자크의 컬렉션에 애니메이션 CD가 있었던 것 같은데.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비슷한 그리움을 느꼈다.
언젠가... 인간이 지구를 탈환하는 날이 온다면 이런 것들도 다시 유행하겠지?
그때가 오면 난 딸과 함께 꽃 가게를 열 수 있을 거야.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참, 이 책 보고 싶으면 저쪽 벽에도 한 권 있어. 이것보다 새것이야.
만화...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책자를 보며 세르반테스는 손으로 표지의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
>>>황금시대에 출판된 책 정보를 검색합니다. 분류는 만화입니다.<<<
>>>결과가 없습니다.<<<
이건 황금시대에 출판된 만화가 아니라, 최근에 인쇄된 거였다.
이런 시대에 대부분 사람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창작을 꾸준히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속지를 넘기자, 밝은 색조와 화려한 상상들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획 한 획마다 생기발랄한 생명력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 페이지를 박차고 나와, 눈앞에 있는 연회색 폐허가 된 도시를 화려한 색으로 색칠하는 것만 같았다.
이건...
속지에 만화의 출처도 적혀 있었다.
공중 정원-예술 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