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라는 로봇이 구룡성에 갔을 뿐만 아니라 진짜 곡을 만났을 줄은 몰랐네요.
구룡 전시관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걸 보면, 퍼니싱이 폭발한 후에 구룡을 떠나는 야항선에 탑승한 적이 있는 거 같아.
그리고 극지 전시관과 뒤에 탐색하지 못한 전시관이 있는 걸 보면, 세르반테스가 전 세계를 한 바퀴 돌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세르반테스는 뭔가에 대한 집념이 강한 것 같아요.
응. 컨스텔레이션에 돌아와 이 예술관들을 지은 것도,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모두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거야.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가 섬기는 주인이자 컨스텔레이션의 설계자인 미켈레·바사리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
미켈레... 그도 예술 협회의 멤버 아닌가요? 그럼, 미켈레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 같은데요?
음... 그렇긴 한데, 미켈레 선생님과 예술 협회의 전 회장님이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았대. 그래서 미켈레 선생님은 협회를 탈퇴하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무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 이런 상황 때문에 참고할 만한 기록이 별로 없어.
게다가 컨스텔레이션의 건설은 극비 작업이었어. 그래서 미켈레 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의 말년 행적은 협회의 대부분 멤버에게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어.
퍼니싱 폭발 이후, 예술 협회는 황금시대의 대부분 자료를 잃어버렸고, 많은 멤버가 공중 정원으로 이주하지 못해서 더더욱 조사할 길이 없어졌어.
앨런 회장님께선 뭔가 아실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들과 연락이 닿지 않잖아.
원래는 이쪽 단서를 알아봐야 했었지만, 그땐 나도 다른 일이 있어서...
그땐,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간과한 것도 어떻게 보면 정상이에요.
3일 전까지만 해도 전 지금 이 예술관에서 임무를 수행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어요.
하긴, 나도 도시를 점령하는 사악한 로봇들을 만날 줄 알았어, 자신보다 큰 로봇을 조종하며 매일 구역을 점령하기 위해 싸움을 벌일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니면 이 도시가 거대한 로봇 요새이고, 지하엔 영점 에너지 반중력 엔진이 숨겨져 있어서, 그걸 가동하면 도시가 완전히 무장하면서 공중 보루로 변신하는...
… 아예 세계관까지 갈아엎을 생각인가요?
지금 이 세계에 저런 상식 밖의 이중합 탑도 나타났는데, 거대한 로봇과 공중 보루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지.
정말로 그런 게 있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괜찮아. 우린 용감히 나서는 영웅들을 응원해 주면 돼. 그때가 되면 나도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공중 환상 요새 정복기> 혹은 <신세기 차징 팔콘 전기: 유성 작전> 등과 같은 거대한 그림집을 그릴 수 있을 거야.
스스로 맞설 생각은 없었던 거군요.
난 화가잖아. 화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림 그리는 일인 걸.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아이라와 트로이는 클리어한 구룡성 전시관을 지나, 전시관과 연결된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배터리가 다 나간 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복도 벽에 나란히 기대어 있는 초췌한 두 사람이 보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군요.
두 사람도 수고 많았어.
……
……
시카와 레나는 아이라와 트로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들은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레나, 아이라랑 트로이가 왔으니, 우리도 출발해야 해요.
조용히 해요. 조금 더 쉬고 싶어요.
바닥에 앉은 시카와 레나는 티격태격하는 기세마저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15분 정도 지나서야 둘은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다친 것 같지도 않은 데, 왜 그렇게 지친 거예요?
아니에요. 체력적으로 피곤한 건 시카뿐이고, 전 단지... 신경쇠약일 뿐이에요.
이마를 짚은 레나는 시카와 동행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전투할 때마다 제가 지정한 안전 범위 밖으로 벗어났고, 몇 번이고 제 앞으로 돌진했어요. 그리고 생각하는 전술이라곤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술뿐이었어요…
전투력이 분산됐으면 좀 더 대담한 방법을 사용해야죠. 이것, 저것 다 무서워한다면, 전투 시간을 늘릴 뿐만 아니라 아이라 쪽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겠죠.
왜 저를 믿어주지 않나요? 전 이래 봬도 파오스의 졸업생이고,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경험도 있어요.
믿음이요? 알게 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당신을 무조건 믿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설마 이름밖에 모르는 구조체에 자신의 목숨을 맡길 정도로 순진한 건가요? 파오스에서는 구조체와 지휘관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던가요?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하던가요?
지휘관은 구조체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지 친한 전우 따위가 아니에요. 무조건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세운 전술 자체가 틀린 거라고요.
전장에서 지나친 믿음으로 한 의사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얼마나 많이 초래했는지 모르시나요? 한두 번 잘 됐다고 해서 리스크를 무시하는 건 임무 수행에서 해만 될 뿐이에요.
레나의 연이은 질문에 당황한 시카는 무의식적으로 반론하려고 했지만, 기세는 처음보다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같이... [player name] 선배님이 이끄는 소대가 있잖아요.
구룡성, 풀리아 삼림 공원, 이중합 탑 전투... 많은 사례가 있잖아요.
……
네 아버지는 공중 정원의 "영웅"이셨다. 그는 면역 시대 이후, 처음으로 구조체 개조를 받은 군인 중 하나였지. 그의 딸인 네가 그와 같은 길을 걸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다만 아쉽게도 네 탄탈-193 공중합체 적성 테스트는 표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구조체 개조 수술을 진행할 수 없어.
아니면 지휘관이 되는 건 어때? 지휘관도 인간에게 많은 도움이 돼.
"74호 도시 공략 작전은 대성공을 거뒀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다시 한번 결정적인 역할을..."
그레이 레이븐 소대...?
어떻게 하면 구조체의 신뢰를 얻을 수 있냐고? 왜 그런 짓을 해?
구조체는 물건이고 도구며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수단일 뿐, 너와 친구 놀이나 하려고 있는 게 아니야.
도구가 부서지면 마음이 아파? 그런 마음가짐으론 좋은 지휘관이 될 수 없어. 전에 그렇게 했던 게 바로 피닉스 소대인데, 그와 그의 대원들이 어떻게 됐는지 너도 잘 알지?
참, 내 앞에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이름은 꺼내지도 마. 이 상처는 그들 때문에 생긴 거니까.
그런 지휘관이 되고 싶다는 소리를 지껄일 거면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믿어달라고요? 땅 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꼬맹이랑 신뢰 놀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파오스의 수석을 배정해 준다고 들었는데... 흥, 이건 뭐 우리 보고 보모 하라는 거 아닌가요?
하아... 앞으로 전투할 때, 후방에 얌전히 있어 주는 게 우릴 도와주는 거예요. 그래야 "경험"을 쌓을 수도 있고 이력서에 몇 줄이라도 더 적을 수 있지 않겠어요?
직설적으로 말하면, 넌 제2의 크롬이나 제2의 [player name](이)가 될 수는 없어.
자질, 잠재 능력 그리고 실적 모든 면에서 불가능해.
전 단지... 제가 동경하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전 그들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해서...
……
레나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우리가 알게 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제 경험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한 자신의 등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건 좋지 않아요.
더군다나 지휘관님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잖아요… 지상에 있을 땐 더욱 조심해야 해요.
아이라도 이렇게 생각하나요?
음... 레나가 은근 츤데레 성격이라는 걸 나도 조금 느꼈거든. 길거리 생활에 익숙한 길고양이처럼 츄르 몇 개를 준다고 해서 품을 내주지는 않아.
저한테 그런 이상한 비유를 쓰지 않았으면 하네요! 전 단지 집행 부대의 기본 상식을 말했을 뿐이에요.
대장은 지상에 여러 번 내려온 적이 있으니, 제가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고 있겠죠.
나도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시카의 생각이 전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우린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아니잖아.
……
우린 다른 소대와 달라. 대원 편성과 전망이 상대적으로 복잡하다고 해야 할까?
이 소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진 미지수야. 하지만 어찌 됐든 시카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아이리스 월블러 소대만의 모습을 만들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봐야 해.
이러쿵저러쿵해도 시카는 "아이리스 월블러 소대"의 지휘관이니까.
……
가로등에 기댄 트로이는 말없이 팔에 있는 개인 단말기를 조정했다.
차가운 불빛이 트로이의 파란 머리로 쏟아졌다. 그녀는 단말기에 표시된 웹페이지를 내려다보며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카는 연이은 조우전으로 많은 체력을 소모했고, 트로이와 아이라의 무기는 "곡"과 맞서 싸울 때 손상이 발생해 유지 보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레나는 탐색을 잠시 멈추고, 예술관 외곽에 위치한 가로수길로 후퇴한 뒤, 하룻밤 머물면서 정비하자고 제안했다.
예전에 가로수길 상황은 확인했었지만, 만일을 대비해 소대는 교대하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그리고 트로이가 첫 번째 불침번을 맡았다.
밤이 된 도시는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고요하지 않았다. 고층 건물의 불빛은 입체적인 암호 행렬처럼 불규칙하게 계속해서 점멸했다. 그것을 본 로봇들은 빛의 행렬 조합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을 탐색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풍차에선 투명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트로이는 문득 저곳에서 이 도시를 내려다보면 어떤 야경이 펼쳐질지 상상하게 됐다.
세르반테스라는 로봇이 풍차의 꼭대기에 서서, 풍차를 바라보고 있는 트로이를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세르반테스...
트로이의 먼 곳을 바라보던 시선은 이내 주위를 경계하는 시선을 바뀌었다. 그런 뒤 단말기에 있는 가상 스크린을 거두고 돌아섰다.
교대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는데, 잠이 오지 않나요?
응. 이 도시의 로봇들을 생각하고 있었어. 세르반테스와 미켈레 선생님의 관계도 흥미로웠고.
그리고...
그리고요?
아무것도 아니야. 임무와 상관없는 일이고, 지금은 말할 필요가 없는 거 같아.
시카처럼 동료 간에는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는 타입 아닌가요? 그런데 숨기는 게 있어요?
헤헤~ 당신들과 비슷하게 나도 나만의 비밀이 있으니까. 궁금하면 열심히 내 신뢰도를 올려보던가.
그리고 이번 임무가 복잡한 만큼, 당분간은 예술관 탐색에 전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세르반테스의 기억 데이터가 조금 마음에 걸려. 그리고 바지유가 말한 "공중 정원에서 온 구조체들"도 있고...
항상 밝아서 이런 거엔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럼 트로이 넌? 얼굴을 찌푸린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잖아. 심란한 일로 머리가 납작해질 것만 같은 거야?
나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거든. 다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행동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그래.
우리 소대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하지. 이번엔 내가 처음으로 집행 부대에 가입하고 지상 임무를 수행하는 거잖아. 아직도 설렌다니까.
그리고 다들 잠재력이 있잖아. 이전 전투에선 손발이 안 맞긴 했지만, 결국엔 다 이겨냈고.
트로이 너도 마찬가지야. 참, 구룡 전시관에서 멋진 케미를 보여줬는데, 지금이라도 하이파이브 할까?
말을 마친 아이라가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어 트로이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트로이는 한숨을 쉬더니 손을 들어 아이라의 손바닥에 살짝 대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미리 말하지만 전 레나와 같은 생각이에요. "파트너"라는 말은 10대 때, 황금시대의 그림책에서 본 게 마지막이에요.
음... 물론 우린 파트너가 못 될 수도 있지. 이 세상의 대부분 사람은 파트너가 되기 어렵다고 봐.
목숨을 맡길 만한 절친을 만난다는 건 기적 중의 기적이고, 정말 만났다 해도 계속 함께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하지만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 해도, 우린 같은 소대의 "대원"이잖아.
동기나 출발점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가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자유롭다고 해야 할지, 집념이라고 해야 할지...
당연히 집념이지! 난 아직도 트로이와 레나의 과거가 궁금한걸.
직감이긴 하지만, 왠지 멋진 이야기 소재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다면, 보통 제 이야기를 듣고, 오글거리는 대사로 제 마음의 앙금을 풀어주며,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트로이 네가 원한다면 해볼 순 있어. 하지만 그쪽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라면, 그런 부분에 능숙한데, 시간 되면 그분과 얘기해 보자.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이라... 집행 부대에서도 상당히 특별한 존재죠.
퍼니싱의 침입과 승격자의 계획을 여러 차례 막았고...
Ω 무기 연구에 필요한 재료를 확보했고, 달 표면 기지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잖아요.
그리고 폐기될 걸 각오하고 달려든 "백야"를 목숨을 걸고 구하셨으니, 공중 정원의 구세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게 더 비현실적인 거 같은데요?
트로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이라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소대가 주둔지로 선택한 건물 2층에서 가녀린 그림자가 창문을 열고 가볍게 땅으로 착지했다. 고양이처럼 조용한 그녀의 발걸음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건 맞지만, 그 희망은 복제될 수 없는 겁니다.
재현할 수 없는 희망은 독이 되고,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외면하게 할 뿐이에요.
그 지휘관이 백야 옆으로 내려가자, 지상에 주둔하고 있던 구조체들이 대대적으로 배신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지휘관들이 소대의 구조체에게 배신당했고, 얼마나 많은 구조체가 자기 지휘관이 씌운 누명으로 처분당했는지 알아요?
위에선 이 일을 누르고 전력을 다해 "백야"의 기적을 홍보했지만, 그 배신을 직접 목격한 이라면 그런 헛소리는 믿을 수 없죠.
그래서 시카한테 그런 말을 했던 거야?
늦기 전에 시카의 바보 같은 인식을 바로잡는 게, 그녀의 지휘관 생애에 좋을 거라 생각해요.
시카가 직접 경험하고 후회하게 두기보다... 아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시카는 후회할 기회조차 없었겠죠.
왠지 모르겠지만 말속에 뼈가 있네요. 방금도 그렇고, 밤이 된 후로 계속 절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요?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그랬어요.
예술 협회가 제안해서 편성한 소대임에도 불구하고, 리스트에 쿠로노 배경의 구조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많은 걸 설명해 주고 있죠.
아... 남의 출신 가지고 뭐라 하시네요. 제가 쿠로노에 있었던 건 십여 년 전의 일이에요. 그 후론 계속 집행 부대에 있었어요. 그리고 소대에 합류한 것도 월리스 참모장님이 허락하신 거예요.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리, 케르베로스 소대의 베라 심지어 니콜라 사령관님도 쿠로노와 관련된 과거가 있어요. 그럼, 그들의 입장에도 의문을 제기할 건가요?
그렇다면 군역 자료는 왜 공백인 거죠? 과거 소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모든 자료가 지워진 거죠?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그전에 그쪽에게 묻고 싶네요, 왜 무스 소대에서 나왔는지 말해줄래요?
……
둘은 싸늘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트로이는 자신이 내려놨던 톤파에 손을 살짝 뻗었고, 레나도 손에 든 활을 움켜쥐었다.
음...
둘 사이에 낀 아이라가 어느새 노트와 연필을 꺼내 수시로 적을 준비를 하며, 레나와 트로이를 응시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둘이 하던 거 마저 해. 난 혹시라도 대박 뉴스를 놓칠까 봐 기록하려는 것뿐이야.
지금부터 서로의 흑역사를 파헤칠 생각이야? 아니면 바로 싸우나? 양쪽에 방해되지 않게 내가 좀 물러서 있을까? 아니면 내가 심판을 맡아줄까? 난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아이라는 곧 하이라이트 장면을 찍으려는 기자처럼, 트로이와 레나를 말리기는커녕 부추기고 있었다.
대장으로서 곧 싸울 대원들을 막아내며, 가슴 뭉클한 말로 둘을 화해시키고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게 보통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좀 더 흥미로운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내가 지금 꾹 참고 있어!
……
계속 몰아세울 건 아니죠?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요?
아이라가 둘 사이에 개입할 생각이 없다는 걸 본 트로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레나에게 화해의 뜻을 내비쳤다.
좋아요. 이것도 일종의 경고인 셈이니까요.
어쨌든 임무가 종료된 다음...
레나는 트로이한테서 시선을 거두고 풍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쳇... 전 돌아가서 지휘관님의 상태를 볼게요. 교대할 때 불러 주세요.
레나는 아이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긴장돼서 땀이 날 것 같았어요.
어때요? 대원들의 사이가 상상 이상으로 나쁜 것 같죠? 그래도 아이라의 반응을 보니,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거 같네요.
사실 소대를 편성하기 전에 앨런 회장님께서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어.
하지만 방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어떤 이유로든 우리가 한 소대의 대원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아.
트로이도 "아이리스 월블러"를 통해 뭔가를 이루기 위해 온 거지?
이상과 신념은 단독으로 실체화될 순 없어. 행동에 의해 현실에 흔적을 남기는 거잖아.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으니 "아이리스 월블러"가 의미와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
마지막에 모두가 원하는 결말로 끝나지 않더라도, 남에게 실패작이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하더라도...
난 노력했던 걸 후회하지 않아.
달빛이 어두운 실내를 어렴풋이 드리우자, 작은 훈장이 반짝반짝 빛났다.
……
건물 한구석에 기대어 앉아 있는 시카가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 안에 있는 차가운 "증명"을 바라봤다.
은도금이 되어 있는 파오스의 표시 아래엔 시카의 이름 약자인 S·L이 새겨져 있었다.
시카는 졸업식에서 "수석"을 의미하는 훈장을 받았을 때, 무대 아래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낸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러움, 질투, 경멸, 조롱... 그리고 멸시와 납득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시카는 자신이 얼마나 분수에 맞지 않는 증명을 받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시카는...
이 소대에서 나가겠다고?
네. 저희 셋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이대로 "아포디데"에 남아 있는다 해도, 이 소대는 아무 성과를 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소대 지휘관으로부터 대원 보충 신청이 제출된 상황에서 참모부가 이번 편제 동원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현재 지휘관님과 협력에 문제가 많고, 그분은 저희 전투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
이중합 탑 전투 때, 시카는 너희에게 정비 부대를 27호 보육 구역으로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지. 하지만 임무를 완료한 후에 너희들은 지휘관과 연락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나?
당시 지상의 모든 통신이 끊긴 상태여서,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소대가 서로 연락이 닿지 않은 상태였어요.
지휘관과 연락되지 않는 경우, 구조체는 일정한 범위 내의 의사 결정권을 수행할 수 있어요. 이건 군법에 위반되는 사항도 아니에요.
하지만 통신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너희들의 응답 단말기는 손상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휘관도 계속해서 너희들의 좌표를 확인하려고 시도했지.
하... 그때, 전자기 교란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참모부에서도 잘 아실 거라 생각해요. 참모장님께서는 설마 저희가 지휘관의 지시를 고의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너희들의 지휘관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희들의 안전을 염려했다는 것만 알아둬.
너희들의 신청을 허락한다. 마침... 참모부도 같은 생각이었거든.
……
……
그동안, 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는...
훈장을 움켜쥔 시카는 뭔가를 봉인하려는 것처럼 훈장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전술용 허리 팩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