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관의 경보는 아직 해제되지 않았고, 로봇 조각상들은 계속해서 아이라 일행을 향해 공격했다.
조각상들의 패턴은 복잡하진 않았지만, 수가 많아서 아무리 쓰러뜨려도 숨겨진 문에서 새로운 조각상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리고 예술관 전체가 복잡한 미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닥과 벽이 정교한 장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카는 다음 적이 어디서 공격해 올지 예측할 수 없었고, 아이리스 월블러 소대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소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대원들 간의 협력도 아직은 서툴기 때문에 방어 전술만 계속 사용하게 된다면, 로봇 조각상이 그녀들의 방어선을 뚫는 건 시간문제였다.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요!
전술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조각상의 연약한 관절 부분을 연달아 명중했다. 학교에 있을 때 시카의 사격 성적은 항상 반에서 1위였지만, 아무리 사격을 잘한다 해도 무장의 차이는 메꿀 수 없었다.
시카가 로봇 조각상 하나를 마비시키려면 탄창의 절반을 사용해야 했다. 이런 수준의 전투에서 지휘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은 한정돼 있었다.
쳇, 제 뒤에 숨어요! 지휘관님이 다치면 곤란해요!
합금제 화살이 윙윙거리며 엄청난 출력으로 발사되자, 시카 눈앞의 로봇 조각상 여럿이 연이어 관통됐다.
이러다가 끝이 없겠어!
어떻게든 그들을 멈춰야 해!
광선 건랜스의 칼날과 중형 톤파가 조각상에 현란한 불꽃을 일으켰다. 앞장서 격렬한 공격을 막고 있었던 아이라와 트로이는 막대한 압력을 감당하고 있었다. 최신 기체로 교체한 아이라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트로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식의 바다 손상 후유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예술관 자체의 안전 시스템을 건드린 것 같아요. 황금시대의 규격이 적용된 거라면, 이 "경비원" 조각상과 시스템은 원거리로 연동됐을 확률이 높아요.
설명은 고마운데, 포인트가 뭐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술관 방화벽을 해킹해서 경보를 차단하면 조각상들을 멈출 수 있다고요!
그럼, 여기 있는 기체들 중 해커 기능이 탑재된 기체가 있나? 미리 말하지만 내 기체엔 없어.
역사상 유명한 컴퓨터 바이러스와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황금시대의 골동품 같은 저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길 바랄게요!
"저 쓸모없어요"라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는 건 처음 보네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안전 시스템을 해킹할게요. 하지만 전 보조형 구조체가 아니니 좀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그전까지 최대한 버티세요.
스캔한 공간 데이터에서 로비에 숨겨진 노드 인터페이스를 찾아낸 레나가 뒤에 있는 화살 주머니에서 특제 화살촉을 꺼냈다. 그 화살에는 소형 단말기가 장착돼 있어서 구조체 연산 능력을 외부 해독에 사용할 수 있었다.
기체에 연결된 화살촉을 인터페이스에 꽂는 순간 대량의 데이터 스트림이 레나의 의식의 바다로 흘러들어왔다. 레나는 이 조각 데이터들을 집중적으로 처리하면서 해독할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이 기체는 정말...!
레나의 전투력 공백으로 시카가 아이라, 트로이와 함께 구축한 방어선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적의 공격은 더 격렬해졌다. 이 와중에 지휘관인 시카는 자신과 연결된 트로이의 의식의 바다가 계속 동요하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적군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은데?
시스템 자체의 2차 보안 메커니즘이에요. 누군가가 노드를 통해 해킹한다는 걸 감지해서 그런 거니까 시간을 조금만 더 벌어 주세요!
로봇 조각상들은 레나를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했다는 듯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모든 공격이 레나를 주요 목표로 삼는 바람에 아이라와 트로이의 방어는 더욱 어려워졌다.
(내가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면...)
레나! 11시 방향을 주의해요! 적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톤파로 조각상의 머리를 내리친 트로이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트로이는 눈앞의 로봇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더 이상 그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젠장! 얼마 안 남았는데...
괜찮아요. 제가 메꿀게요!
바보… 아니! 뭘 하시려는 거예요!?
시카는 레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각상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시카는 허리춤에서 전술용 단검을 꺼낸 뒤, 한 마리 아포디데처럼 가벼운 움직임으로 조각상의 목 관절을 정확히 찔렀다. 그러자 단검의 전자 펄스가 발동되면서 터져 나온 일회용 전류에 조각상은 맥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서서 돌진해, 오는 또 하나의 로봇을 향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근접 거리에서의 명중은 조각상의 가슴에 불꽃이 튀게 했다.
단숨에 조각상 두 개를 해치운 시카는 어금니를 악물고 총을 든 후, 가까이 다가오는 조각상을 향해 연달아 사격했다.
하지만 확장 탄창으로 장전된 최신 총기라도 총알이 고갈되는 순간이 있었다. 시카는 어쩔 수 없이 총의 개머리판을 들고는 눈앞 조각상의 전자두뇌 부위를 힘껏 내리쳤다. 조각상의 석고로 만든 얼굴 부위는 통째로 깨졌지만, 눈 같은 카메라에서 반짝이는 붉은빛이 그가 행동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걸 설명하고 있었다.
칙!
쫙!
섬광이 번쩍이면서 청색 에너지 파도가 스쳐 지나갔더니, 시카의 눈앞에 있었던 여러 로봇을 잔디 깎듯 날려 버렸다.
멀지 않은 곳, 아이라의 손에 들려 있던 총구에서 엄청난 위력을 지닌 에너지 포가 발사되며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걸 왜 이제야 써요?
이건 비장의 기술이야! 게다가 "휘효"의 헤비 해머 데이터를 참고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효과가 있을진 나도 장담할 수 없었어!
기체 개발 초기에 카레니나를 찾아갔고 브레인스토밍했을 때, 이 기능을 꼭 넣어야 한다고 말했거든.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해야겠어.
광선 건랜스의 칼날이 점멸하고 있었다. 방금 전 일격으로 무기 내 저장돼 있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거 같았다.
됐어요! 해제했어요!
레나의 말과 함께 귀청을 찢는 경보 소리가 멈췄고, 나머지 조각상들도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았다.
시카, 괜찮아?
아이라가 반쯤 무릎 꿇은 채 시카를 향해 손을 내민 뒤,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네. 괜찮아요.
죄송해요. 그들이 갑자기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당황...
네 잘못이 아니야. 조각상은 중간까지 멀쩡했잖아.
우린 그들이 적대할 만한 행동을 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경보도 우리가 작동시킨 게 아닌 것 같아요.
어쩌면 세르반테스라는 로봇이 설치한 함정일지도 모르죠.
음...
아이라는 로비에 흩어진 조각상 잔해들을 봤다. 일련의 전투로 인해 세련되게 디자인된 공간은 엉망이 돼버렸다.
분명 자신이 공을 들여 지은 예술관일 텐데, 침입자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장"으로 사용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눈살을 찌푸린 아이라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등 뒤에서 작은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한 거예요? 왜 제 앞에 막아선 거죠!?
계속 차가운 태도를 보였던 레나가 다른 이가 된 것처럼 시카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지휘관님이 크게 다치면, 지휘관님과 의식을 연결한 구조체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은 안 하세요?
레나의 눈엔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눈앞의 시카를 보는 것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지상 임무를 맡은 신입인가요? 왜 기본적인 내용조차 모르시는 거죠?
전 공격을 당해도 부품만 바꾸면 고쳐질 수 있어요. 설령 제가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지휘관님은 나머지 두 명을 데리고 계속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휘관님은요? 소대의 핵심은 바로 지휘관님이에요. 지휘관을 잃은 소대가 적을 만날 때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파오스에서 가르쳐 주지 않나요!?
……
왜 그 소대의 구조 요청에 응해야 하는 거죠!? 우린 앞에 있는 전선에 집중하면 돼요!
지휘관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이해득실도 알지 못하세요? 그 소대는 적의 포위망에 있어요. 구조하러 가면 우리의 목숨만 헛되이 희생할 뿐이라고요!
지휘관님은 마인드 표식으로 우리 의식의 바다를 안정시켜 놓으면 다예요? 전술? 전장에 몇 번 나가보지도 못한 책벌레가 제대로 된 전술을 내놓을 수나 있나요?
전...
제 행동이 무모했다는 건 인정해요. 전장에서 지휘관은 구조체의 생명줄이기에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방금 전 상황은 레나를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어요. 레나의 시스템 해킹이 없다면, 우리의 전투는 더 길어질 것이고 상황은 더 불리해졌을 거예요.
이건 제가 지휘관으로서... 내린 판단이에요.
……
레나는 꽉 쥐었던 손을 푼 뒤, 무언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제가 실례했네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정찰을 담당한 제 실수이기도 해요.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죠.
뭔가를 피하려는 듯 레나가 앞장서서 로비 옆 출구 복도로 걸어갔다.
우리도 가요.
시카의 어깨를 토닥토닥한 트로이가 레나를 뒤따라갔다.
레나가 네 안전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네... 저도 알죠.